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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기의 천재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앤드루 산텔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2월
평점 :
1
유치원 다닐 즈음해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남자아이들은 대개가 공룡 덕후지만, 유독 공룡에 대해 더 잘 아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한 번 스치고 중학교 때 다시 한 반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두꺼운 하드커버 공룡 도감을 지참하고 다녔으며, 쉬는 시간이면 짤짤이나 판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교실이 라스베이거스가 되건 말건 책상 위에 도감을 펼쳐 놓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각종 사우루스들을 어루만지곤 하는 조용한 친구였다. 아이들은 그를 ‘사우루스 지니어스’라는 4·4조 민요 율격의 라임 쩌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한 번은 그에게 나이 열다섯에 그따위로 불리는 기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싫거나 짜증나지 않느냐고. 그는 이파리 뜯어먹는 아파토사우루스라도 되는 양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만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공룡에는 꼭 사우루스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우리 시절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천재로는 ‘삼국지 천재’를 들 수 있겠다. 세상에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대체로 삼국지 회독수를 쌓은 사람들은 언변과 지략이 축적되어 있으므로 덤벼봤자 물리치기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실제로 겪어보면 삼국지 빠들은 삼국지에 관한 견해충돌 앞에서는 마더빠더도 없는 독종들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적확한 듯하다. ‘삼국지연의’만 읽고 ‘정사 삼국지’를 읽지 않은 인간을 아예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하자로 취급하는 이 성골 삼국지 천재들은, 전투 한 번 없이 일주일이 지나면 그게 더 이상한 난세 속 그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의 시간 순서, 지휘관, 참여 병력, 승패를 가른 전술 패턴을 개략적으로나마 숙지하고 있었다. 삼국지가 농구나 축구보다 더 재미있고, 인간은 자신에게 더 큰 효용을 주는 재화를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체육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적벽대전을 논했다. 특히 우리가 ‘와룡’과 ‘봉추’라고 불렀던 두 삼국지 천재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서 황건적의 난을, 준비운동을 하면서 군웅할거를, 벤치에서 삼국정립을, 마침내 교실로 돌아와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진나라의 통일을 복기하며 한 시대를 마무리 짓는 그야말로 삼국지 비르투오소들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뜻밖에 와룡은 농구를 봉추는 축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3점 슛을 당연하고도 장쾌하게 실패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와룡을 붙들고 도대체 오늘은 왜 늘 하던 대로 봉추와 함께 난세를 종횡무진하지 않고 코트에 들어와서 민폐질이냐고 따졌더니 분한 얼굴로 대답해왔다. 아니, 봉추 저 새끼가, 장료가 장합보다 훌륭한 장수라고 하더라고. 와, 정말 상종 못할 새끼 아니냐. 와, 너야말로 정말 그런 새끼 아니냐. 와룡은 당당하게 두 손으로 드리블을 치면서 또 다른 실점을 이끌어냈지만 막상 본인은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룐지 장합인지 하여튼 그 양반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서슬 퍼런 청룡언월도로 뎅겅 네놈의 목을 쳐주면 내가 그걸 주워서 덩크를 넣겠는데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다시는 함께 삼국지를 논하지 않았다. 이후, 와룡인지 봉추인지 둘 중 한 천재가 이제 삼국지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하산을 선언한 뒤 일본 전국 시대에 대해 깊은 연구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걸 끝으로 그들과는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2
어른이 되기 전까지 syo가 만난 천재란 대체로 저런 귀엽고 무해한 녀석들이었다. 지방 도시의 교육열이 맹렬하지 않은 학군에 모인 꼬꼬마들은 고만고만해서 다정했다. 먹고 먹히는 독한 등수 싸움 없이 학교생활이라는 게 끝났고, 기어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기 시작 전에 미리 상경해 하숙집을 계약하고는, 땅 위로 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강인지 바다인지 한참 아리까리한 거대한 한강(!!)을 건너면서 촌놈은 생각했다. 이 넓고 높고 빠른 곳에는 또 어떤 소소하고 다감한 천재들이 있을까?
그런 천재들은 없었다. 혹은 숨었거나. 그 대신, 진짜 ‘천재’들이 있었다. 재수 없지만 감탄스럽고, 꼴 보기 싫지만 존경스럽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조별 과제는 함께 하고 싶은, 사전적 정의 그대로의 천재들이 서울엔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고, 줄줄 흘리고 다녔다.
누가 봐도 파마머린데 그게 제가 타고난 머리라 주장했던 김천재는 분신술이라도 배웠는지, 150명 정원인 동기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벌이는 모든 술자리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는 숙취 상태에서 한 과목 중간고사를 뚝딱 해치우고, 비어 있는 한 시간 반 동안 해장국 집에 들러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반을 마시고 돌아와 다음 과목 시험을 치렀다. 그러고도 꽤 잘 본 눈치였다. 다른 아이들은 말아먹은 중간고사를 벌충하려고 기를 쓰는 기말고사 기간에, 김천재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대신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이슬을 맞고 교실에 기어들어와 엎어져 자곤 했다. 넌 공부 안하냐? syo가 물었다. 김천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런 거 안 해. 그랬는데 2학기 개강하고 확인해보니 김천재의 1학기 성적표에는 16학점 A+, 2학점 A0가 찍혀 있었다. 넌 그렇게 술 마시고 PC방 다니면서 무슨 수로 이 학점을 받았냐. syo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슬쩍 흘리면서 물었다. 책 잠깐 봤지. 김천재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회피하며 시크하게 대답했다. 게임속의 syo가 드리프트를 시도하는 동안, 내면의 syo는 주머니 속에서 쟤를 찌를 칼을 꺼낸다. 야, 너 공부 그런 거 안 한다며. 김천재는 지금 너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노라- 하는 말투로 반문한다. 야, 물리, 화학, 미적, 논리회로설계, C언어 기초, 그런 과목을 ‘공부’라고 할 수가 있어? 걔들은 그냥 ‘소양’ 아니냐? 아, 제발 장료든 장합이든 누구든 뭐든 좋으니 무덤에서 튀어나와 이놈의 목을 뎅겅 쳐 줘요. 뚜껑 열고 뇌 꺼내서 내거랑 바꾸게...... 그러나 syo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새 나를 추월해 앞서가는 저 천재의 뒤통수에 물폭탄을 던지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3
무슨 일인지, 어느 순간 김천재는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천재는 수능을 다시 봐 의대생이 되고, 노천재는 스위스에 있는 어머어마한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고, 쟤는 천재라고 부르기는 좀 빠지지 않나 싶었던 홍수재는 카이스트로 적을 옮기고, 하여간 이 좁은 물에서 더는 놀 수 없다며 세상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무수한 천재들이 있었다. 천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서 syo는 왜 나는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를 고민하면서 그저 syo로 늙어만 갔다. 그러다 인생이 삐끗, 군대가 늙은 syo를 냉큼 삼키고 말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국방부 시계는 잘도 돌고 돌아갔고, 때가 되자 군대가 이제 더 늙은 syo 너는 필요 없다 퉤, 하고 뱉어냈는데, 그렇게 사회로 돌아온 syo는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천재성도 없다는 슬픈 결론을 등에 얹고 씹어놓은 껌 같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고, 나는 드디어 내 천재성을 찾아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이 천재성.
그렇다. syo는 천재였다.
미루기의 천재.
4
마감이 눈앞에 닥쳐 있을 때 내 아파트는 언제나 최고로 깨끗하고, 내 파일은 가장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나는 바로 그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용감무쌍하게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21-22)
응? 나?
내 패턴은 보통 이렇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내게 정말 간절히 필요한 건 방금 내린 커피 한 주전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커피를 내리려면 부엌으로 가야 한다. 일단 부엌에 가면 싱크대 위의 전구가 나갔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 전구를 갈려면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 가야 한다. 그러나 새 전구를 사러 모퉁이까지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구를 파는 가게는 정말 훌륭한 베이글을 파는 가게 바로 옆에 있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베이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반박이 어렵다. 또한 전구 가게와 베이글 가게가 있는 바로 그 블록에는 선집을 훑어보며 약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서점이 있다. 그래, 서점이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행하고 있는 자기기만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물론 일은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줄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때때로 일은 내가 무슨 일을 해서든 피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59-60)
진짜 난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책을 썼나?
내 낙관주의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 거의 정점을 찍는다. 나는 늘 아침을 사랑해왔다. 아침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연민과 심술이 덜하다. 아침에는 모든 게 가능해 보인다. 아이디어로 넘쳐흐른다! 가능성! 타인을 향한 사랑! 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오후 4시쯤 되면 나 자신과 인류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단념한다. 그렇게 미루기는 늦은 오후에 정점을 찍는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루를 내려놓고 모든 걸 내일로 미루는 시간. 그때쯤 되면 예외 없이 현재에서 빠져나와 내일 아침을 위해 산다.
내일을 향한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다. 내일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고 희망이 부활할 것이다. 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있어 희망은 언제나 경험을 이긴다. 내 생각엔 이것이야말로 꽤 적절한 신앙의 의미다. (91-92)
이제 그만해.....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러는 사이 마감은 다가왔고, 나는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텅 빈 구덩이로 떨어지며 당장 해야 하는 일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져갔다. 갑자기 트위터 프로필 업데이트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업무처럼 보였다. 그동안 수집한 디지털 음원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일을 '큐레이팅'이라고 하던데.
일을 꼭 끝마치겠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집중력을 잃어갔다. 일을 못 하니까 우울해졌고(여러분이 아는 그 악순환의 고리가 맞다) 우울하니까 더욱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업무를 회피하고 다른 자잘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느라 몇 주의 노동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 나는 이 책에 넣을 인용문을 찾느라 책장을 뒤지다가 그동안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음악 평론집을 발견했다. 찾던 책은 전혀 아니었지만 선반에서 그 책을 꺼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대 뉴질랜드의 개러지팝garage-pop을 재검토하는 일에 푹 빠져들었다.
애초에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미루는 짓은 그만두고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또다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이름하여 메타-미루기라고 부를 법한 행동인데,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증발해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다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100-101)
내 이야기를 이만큼 잔뜩 하려면 뭐 허락이라도 미리 받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5
저자는 달인을 넘어, 이미 미루기의 천재다. 심지어 이 책에 실을 인터뷰를 위해 뉴올리언스까지 날아갔지만, 막상 거기에 도착하자 인터뷰를 미루고 관광을 하다 그냥 돌아오기까지 한다.
그런데 미루기라면 syo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리뷰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여러 명에게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 리뷰에 대한 생각을 미뤘다. 『설국』은 5월에 읽었다. 5월 15일 19시 44분에 생성한 설국.hwp 파일을 지금 열어봤는데, “국경의 긴 터널을 빠”라고 쓰여 있다. 이게 syo가 두 달에 걸쳐 써 놓은『설국』 리뷰의 전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글자 기세로 썼네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인정? 이걸로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월요일에 도서관에서 10권의 책을 빌려온다. 수요일 쯤 되면, 읽은 4권을 다른 도서관에다 반납하고 거기서 다시 10권을 빌려 온다. 그 즉시 월요일에 빌려온 남은 6권 읽기를 미룬다. 새로 빌려온 책부터. 그렇게 금요일 쯤 되면, 월요일 책 1권, 수요일 책 4권 정도를 읽게 되는데, 그걸 다시 다른 도서관에 들고 가 반납한 다음 거기도 또 9권을 빌려온다. 그 즉시 남아 있는 월요일 책 5권과 수요일 책 6권 읽기를 미룬다. 역시 새 책 first. 그렇게 두 주가 지나면, 결국 월요일에 빌린 책의 반절은 읽지도 못하고 바로 반납이다. 그럼 수요일 책은 다 읽는가 하면, 금요일 책 때문에 걔들도 대충 그냥 반납이다. 그럼 금요일 책은 읽는가 하면, 천만에요, 그 다음 주 월요일 새로 들고 온 책들 때문에 걔들도 대체로 그냥 반납이죠. 그럼 새 월요일 책들의 운명은 뭐가 다를까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이번에는 인정?
6
좁은 의미의 천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유해할 때가 있다. 그들이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가끔 그들은 그냥 숨만 쉬는데도 저도 모르게 주변 범재들의 가슴을 할퀸다. 내 무딘 손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 닿지 못하는 것들을 숨 쉬듯 당연하게 움켜쥐는 이들을 볼 때 마음은 비가역적으로 멍든다. 오랜 열등감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저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조차 부러워진다.
최초로 만난 천재들이 공룡이나 삼국지 천재였다는 것은 사실 내가 제대로 찾아먹지 못한 엄청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촘촘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으면 뜻밖의 천재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그랬다면 날카로운 천재들을 만났을 때도 찔리거나 베이지 않았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그냥 숨만 쉬어도 아름다웠던 그 좋은 시절을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풀꽃 천재라든지, 정량 배식 천재라든지, 제설 작업과 눈사람 만들기의 천재, 알람 없이 제 시간에 일어나기의 천재, 이에 팥 끼지 않고 팥빙수 빨리 먹기의 천재 같은, 무해하고 크게 부럽지 않은 수많은 천재들이 발견되지 않은 채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해독하는 사람들이다.
미루기의 천재란 어쩌면 한낱 말장난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해한 천재라는 사실이 기껍다. 장난의 경계선에 아슬아슬 서서, 소소하다 못해 하찮아 보이는 특징에다가도 ‘천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증거가 되서 뿌듯하다. 뭔가 더 좋은 사람, 한줌이나마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서 기쁘다. 진부하고 뻔한 결론이겠지만, 나는 내가 좀 좋다.
7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꾸준히 미루겠습니다. 서른 해 넘게 살며 하나밖에 못 찾아낸 천재성인데, 꽉 잡아야죠.
다른 사람의 미루는 습관을 얼마나 나쁘게 보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일을 미뤄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는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