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5

 

 

1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더 소중한 사람은 낯익은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일 때가 많다. 낯익다는 느낌은 매일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생각해 보지 않은 얼굴, 가물가물한 이름, 언젠가 한번쯤 만났던 것 같은 희석된 기억 같은 것들을 다시 마주쳤을 때, 혹은 그것들과 유사한 것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낯익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워하는 사람, 내 가장 가지고 싶은 사람에게서는 낯섦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낯익은 사람이 자꾸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반대가 아니라.

 

당신을 참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 것이 거칠고 조악한 오해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내겐 치명적이다. 나는 당신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실은 당신을 잘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겐 이 세계가 나와 당신,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단 한방에 내 세계의 2/3가 무너진 것이다.

 


 낯익은 당신

 

 빛인가당신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봄빛인가 당신그래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뭉큰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시간저 육빛인 당신당신은 빛 아닌물인가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물 냄샌가 당신그래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덜컹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시간저 온탕인 당신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저 땅 아래 실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망설이는바위인가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저 낯익은 당신

허수경낯익은 당신」 전문

 

 


2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 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5-106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라서 더욱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정말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보고 적어놓은 수많은 세부사항들이 이 세상에서는 60년도 넘는 세월동안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syo의 머릿속에서는 3일 이내에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철학사 책이나 입문서, 한나 아렌트 개론서에서 몇 페이지 안짝으로 요약해 놓은 지식 이상의 그 무엇도 건지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만 박살낸 셈이다. 이게 syo의 탓인지 한나 아렌트의 탓인지(수십 년의 역사가 증언하건대 아무래도 전자일 확률이 크지만) 혹은 세월의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으니 말하지 않고 알겠다 싶은 것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정말,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진짜로요.

 


 

3



우울증의 문제는 언제나 존재론적 성질을 띠었다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그리고 이 드러남을 이런저런 규칙이나 규범관념에 비추어 바람직하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방식의 문제와 늘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로랑 드 쉬테르마취의 시대, 29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한병철피로사회, 11

 

당연히 더 먼 기원이 있겠으나, syo의 지식 범위 내에서 보면 질병(의 정의나 그 대처방법)과 사회(시대) 사이의 은밀하지만 명백한 관련성을 최초로 의미 있게 짚어낸 이는 미셸 푸코였다. 특히 정신질병(과 더는 그렇게 분류되지 않는 과거의 흔적들, 예컨대 동성애)에서. 그 후 다양한 방면의 논의가 있었던 걸로 보이고, 최근의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가 푸코에게서 뻗어 나왔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푸코의 사상은 이제 적실성을 잃었음을 선언하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것 같다. 재미가 있다.

 

syo가 알기로 푸코는, 니체를 언급한 것에 비해 보자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고, 심지어 후기에는 마르크스를 훌쩍 건너뛰어 칸트를 만지다가 생을 마무리한 것 같다. 그런데 후학들이 푸코적 관점으로 연구를 거듭해오면서 다시 마르크스와 은근한 연결점을 구성하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푸코의 시대에 비해 오늘날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압박이, 주체가 기꺼이 스스로를 성과주체로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생존압력이, 각종 정신질환과 정상상태를 판가름하는 잣대 속에 은근하게 숨겨져 있는 노동 착취 가능성혹은 노동력 재생산 가능성따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피로사회야 재독이고, 원래 괜찮은 책임을 알고 있었지만, 마취의 시대는 단순히 표지와 두께에 끌려 빌려온 것인데 굉장히 신명나게 읽는 중이다. 아무 생각 없이 빌려온 책이 즐거운 독서를 보장해주는 경험은 드물고, 드문 만큼 소중하다.

 

 

 

4

 

2005년 처음 월든을 만난 이후로 매년 한 번씩 읽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작년은 그냥 넘어간 것 같다. 얼마 전 책 정리를 하면서야 그걸 깨달았다. 잠깐 패닉에 빠졌으나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나의 월든 연속 독서 기록은 사망했다. 월든 연속 읽기(2005-2017). R.I.P.

 

다시 차근차근 기록을 쌓아나가려니 서글퍼진다. 올해부터 바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저 연속기록을 경신하고 나면 거의 오십 줄에 드는 것인데..... 올해는 소로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지 싶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로마 황제의 방처럼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혼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다락방으로 올라간다이곳에선 거미조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마루를 쓸지 않아도재목을 나르지 않아도 좋다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진실이란 나를 더 나아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47


현재의 나라는 말을 어디까지 넓게 보느냐에 따라 이 문단은 상당히 달리 읽힐 수 있다. 무난하게는, 내가 나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반자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여러 의무들, 하기 싫은 일들, 혹은 겉치레를 위해 탕진하고 있는 시간들 따위를 전부 회수하여 내게돌려주자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좀 더 몰아붙이자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내 외부의 것, 관계로부터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침묵을 벗하여 지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읽을 수도 있다. 가혹하게는, 오늘까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윤리 도덕 준칙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왔던 세상의 많은 진리들을 다 걷어내고 발가벗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주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은 익숙해졌을 때부터는 종종, 손바닥만 한 창문에 커튼을 치고 불을 다 끈 채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혼자 살아도 혼자가 필요했고,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혼자라는 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불을 켜고 커튼을 걷었을 때, 늘 거기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던 내가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불을 끈 나와 불을 켠 내가 의미 있을 만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늘 하던 생각, 나의 생각과 함께라면 나는 쉽사리 혼자가 될 수 없다.

 

 

 

--- 읽은 ---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13 / 박시백 지음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지음

보트 하우스 / 장정일 지음

351 / 박시백 지음

 

 

--- 읽는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중국사상사 /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빨간 잉크 / 이택광 지음

도둑맞은 페미니즘 / 니나 파워 지음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지음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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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9-05-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어린이날 행복하시길 ^^;

syo 2019-05-05 12:59   좋아요 0 | URL
앗 ㅎㅎㅎ 날씨도 좋은 어린이날인데 북프리쿠키님두 행복하소서!!

반유행열반인 2019-05-0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여덟 달 만에 겨우 읽었는데 안 좋은 번역 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재미없는 거였을 수도 있군요. 읽을 때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었는데 서평을 쓰면서 아니 그런데도 서평이 써지네 하고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syo 2019-05-05 13:0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번역도 후져요. 심지어 주술호응이 안맞거나 조사를 이상하게 쓴 문장도 수두룩빽빽하지요. 이런 깔거리들은 월말 결산을 위해 남겨둔 것인데, 열반인님께 다 털렸네요 앜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5-05 13:09   좋아요 1 | URL
어 이 책 syo님도 읽으셨네 하는게 대부분인데 아아주 가끔 제가 먼저 읽은 책이 읽는에 뜨고 다시 읽은에 뜨면 그게 또 소소하게 뿌듯하네요. 헤헤

syo 2019-05-05 13: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1뿌듯 드려서 저도 2뿌듯하긴 한데, syo가 읽었을 법하지만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5-0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취시대> 읽꼬싶넹! 마 취ㅎㅎㅋㅋ마취시키는 쇼군 글~조아! 휴일에 피로회복제 같네 그냥 때론 내용이 이해안되고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음 뭐랄까 여기서 커피 한잔 마셔도 될 것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는. 한나 아렌트 잼없다는 거 아는데 넘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더 멀어질려나, 좋네요 어린이날 글 좋네욧!

syo 2019-05-05 18:16   좋아요 1 | URL
칭찬으로 저를 마취시키려는 계획이식군요 ㅋㅋㅋ 시도는 좋았습니다만 ㅎㅎ

공쟝쟝 2019-05-05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번의 두번째 문단 좋아요. 아프기도 하구. 꾹꾹 눌러담아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syo 2019-05-05 20:3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좋아요가 푹 들어가있더라니 쟝쟝님의 솜씨셨군요 ㅎㅎ

뒷북소녀 2019-05-0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읽다보면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렌트가요.

syo 2019-05-05 20:33   좋아요 0 | URL
결국은 한두 문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요 ㅎㅎㅎ

독서괭 2019-05-0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이히만 그렇게까지 재미없단 말입니까... 덜컥 사둔 한나아렌트 전집 땜에 읽긴 읽어야하는데.. 걱정이네요ㅠㅠ

syo 2019-05-05 20:56   좋아요 0 | URL
전 두 번째 읽는거라 더 재미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덤벼드세요!! 그러나 사실 번역도 후지......

2019-05-07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9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