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파마
1
아, 정말 시간은 놀라우리만치 잘 간다. 인정사정없다. 뭐 하나 찌끄린 다음, 공부 좀 하고 책 좀 읽고 나면 일주일이다. 그럼 한 번에 일주일치의 독서 자취를 남겨야 하는데...... “읽는 책”이라는 명목의 기록은 ‘작년 오늘 나는 무엇을 읽고 있었나’ 랄지 ‘이 책을 내가 며칠 동안 읽었나’ 같은 것들이 궁금할 때를 대비하여 남겨두는 것인데, 이게 의미가 있으려면 못해도 3일에 한 번씩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Q. 근데 뭐 읽는 게 많아야 뭐라도 쓰지.
A. 원래부터 딱히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살지는 않았다......
Q. 근데 이런 데 시간 쓰니까 공부를 못하지.
A. 원래부터 딱히 공부에 시간을 많이 쓰고 살지는 않았다......
2
목요일(목요일 있었던 일을 월요일에 쓰는 패기)에는 데이트가 있었다. 여섯 시에 근사한 곳에서 감자와 치즈로 충만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영웅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자 엄마는 영웅 영화의 최고봉으로 <성웅 이순신>을 꼽아 아들을 안타깝게 했다)를 보기로 약속했다. syo는 조금 일찍 시내(서울에서는 잘 쓰지 않는 듯한 표현이다. 서양말로 downtown)에 나가 서른 넘어 처음으로 머리를 볶아(엄마는 굽는다고 표현하지만 아무래도 면발은 볶는 쪽이) 보았다. 미용실과 옷가게를 가장 무서워하는 syo로서는 결연한 다짐이 필요했다.
저..... 쇤네가 가르마 펌을 좀 해볼까 싶어서..... 저 같은 게 감히 가르마 펌님을 해도 되올는지요(굽신굽신샤바샤바)...... 안 되겠는데요? 아, 네, 역시 안 되겠구나. 나는 안 되겠구나...... 그게 아니라, 고객님 앞머리가 가르마 펌을 하기에는 좀 짧아서요. 기본적으로 눈을 찌를 정도는 돼야 되는데, 이 정도 길이라면 펌을 하고 나면 앞머리가 달랑달랑 들려서 멋이 없겠어요. 아, 네, 역시 멋이 없겠구나. 나는 멋이 없겠구나...... 그리고 고객님들이 인터넷에서 관리 잘 된 사진 보고 오셔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는데, 실은 그 사진들이 엄청 세팅을 잘 한 상태에서 찍은 것들이거든요. 실제로는 그렇게 세팅하려면 솜씨가 좀 필요해서, 잘 할 줄 모르시는 고객님들께는 어지간하면 추천을 안 드리거나 혼자서 세팅 하실 때는 스타일이 잘 안 나오실 수도 있다고 꼭 알려드리거든요. 가르마 펌이 그래 보여도 사실 세팅하기 어려운 머리스타일이거든요. 아, 네, 역시 어렵구나. 나는 어렵구나...... 지금 길이에서는 그냥 볼륨 펌을 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아, 볼륨 펌이요? 아이구, 해야합죠, 해야합죠. 그러믄입쇼, 볼륨 그거, 네, 그걸로 해주세요.
뭔가 대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에 찬 안도상태에 들어간 syo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볼륨 펌이라는 게 뭔지를 내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고 나니 볼륨 펌이란 그야말로 ‘빠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가장 기본적인 녀석이었고, 완성된 비주얼은 그야말로 6세 어린 syo에게 빠마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던 바로 그 꼬불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뚫고 다시 살아온 듯한 모습이었다(당시 뭘 크게 잘못했었는지, 엄마는 6살 syo를 발가벗겨서 대문 밖으로 내쫓았는데(잘 생각해보니까 이건 학대잖아 엄마, 성웅 이순신이 엄마 이러는 거 알면 가만 계실까?) 어린 syo는 누드보다 빠마가 더 부끄러워서 대문 앞에 있던 빨간 플라스틱 바케스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앉아 잉잉 울고 있었다(또 잘 생각해보니까 빠마가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쫓겨난 데 트라우마가 생겨야 되는 게 아닌가? 아이의 마음이란?)).
하여간 심하게 곱슬대는 머리를 찰랑거리며 약속장소로 도착했지만 시간은 이르고 여친은 아직 도착 전이어서, 알라디너들의 영원한 오아시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가 잠깐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와 모퉁이를 딱 도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굉장히 리뷰 잘 쓰게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는 척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수도 있잖아? 소심한 syo,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슬쩍 그 사람을 지나친 다음 책장 사이에 숨어서 문자를 보낸다. “혹시 지금 알라딘이세요?” 그리고 15초 후, “네. 어디계세요? ㅎㅎㅎ”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리가 없지. 함박웃음을 짓고 다시 모퉁이를 돌아나간 syo.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syo를 마주하는 책 많이 읽는 얼굴.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눈 다음, 근처에 놓인 아동용 책상에 앉아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얼굴 본지 벌써 100일은 지났네요. 어쩐 일이세요. 전 데이트. 님은요. 전 독서모임이요. (......쉬지 않고 블라블라......) 제가 파마를 했거든요. 오, 그러네요. 네. 근데 파마를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꾸 좋은 일 있냐고, 여친 생겼냐고 물어봐서 별로에요. 그냥 다니던 미용실 원장님이 해보자고 해서 한 건데....... 아, 그러셨구나. 그랬다. 1월에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생머리였는데, 4월에 우연히 다시 만나자 각자 저마다의 사정으로 파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우리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안녕, 안녕, 6월쯤에 꼭 다시 봐요, 안녕, 안녕,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읽어요. 덕담을 주고받으며, 파마한 syo와 파마한 cyrus는 각자 저마다의 약속을 지키러 발걸음을 옮겼다.
3
<어벤져스: 엔드 게임>를 보는 내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호크아이의 호쾌한 헤어스타일이었다. 재작년부터 작년까지도 한국에서도 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투블럭 모히칸인지 투블럭 뭐시긴지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한껏 뿜뿜하는 남성미가 곱슬이 syo와 대차게 보색대비를 이루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어쩐지 호크아이가 죽어버려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치졸한.....
그나저나 호크아이 헤어스타일 스포일러해서 죄송합니다.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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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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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지음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지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