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캉 입문서만 들입다 파다가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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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욕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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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면, 조금쯤은 변해 있곤 했다. 소소하고 시시한 변화들이지만, 어쨌든 그런 시간들이 한 움큼씩 모이고 쌓여 천천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참 어리고 어리석을 적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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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저 딱 한 뼘만 더 자라고 싶다는 고백 속에 들어있는 작은 욕심은 참 순박하고 귀여워, 만나면 머리를 쓱쓱 쓰다듬거나 어깨를 도닥여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너는 아직 훌륭하구나, 너는 아직 단단하구나, 너는 아직 반짝반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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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너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이 되면 나는 그저 아슴아슴할 뿐이다.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그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밖에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내가 계단을 오를 때 내 눈도 거길 함께 오르는 법이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닐까 싶을 때, 나는 네 가지 가능성을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하나, 내 눈은 한 뼘 나아갔고 내 발은 두 뼘 나아갔다. 둘, 내 눈은 멈춰있고 내 발이 한 뼘 나아갔다. 셋, 내 발은 멈춰 있는데 내 눈이 한 뼘 물러났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넷, 내 발이 한 뼘 물러났는데 내 눈은 두 뼘 물러났다. 하나이거나 하다못해 둘만 되도 좋겠는데, 알고 보면 셋일 수도 있고, 심지어 넷이 아니라는 법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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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그저 ‘타인’이라고 하지 않고 ‘대타자/대문자 타자’라고 했던 것이 후려쳐 퍼져 있는 건데, 그 뜻을 새겨 생각하는 것이 점점 의미를 더해가는 것 같다. 오늘의 짧은 앎일 뿐이라 언제든 정정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입장에서 단언컨대, 저 말은 결코 ‘그러므로 남의 시선이 강요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바라는 것을 찾고 추구하자’로 바꿔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그나마) 정상적이고(그 경우 신경증에 걸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그 경우 정신병이나 도착증에 걸린다).
세상의 어떤 ‘나’도 태어나면서부터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아기 때 주어진 다양한 장난감들(타인의 욕망이다) 중에 우주선 장난감(타인의 욕망이다)에 유독 흥미를 가진다. 낮보다 밤이 좋고(타인의 욕망이다)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하늘을 보며(타인의 욕망이다) 별자리(타인의 욕망이다)를 가리키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타인의 욕망이다)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각종 발사체(타인의 욕망이다)가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타인의 욕망이다) 장면에 심장이 뛰고, 우주를 다녀온 사람(타인의 욕망이다)의 인생에 관한 책(타인의 욕망이다), 우주에 대한 지식(타인의 욕망이다)이 들어 있는 책(타인의 욕망이다)을 읽느라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날 생각한다, 나는 우주인이 될 거야. 그게 내 꿈(꿈이라는 용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조차 타인의 욕망이다)이야. 미안한데 아이야, 그건 타인의 욕망이란다.
어색하게 읽힌다면, 그것은 철학적 용어인 라캉의 ‘대타자’를 일상용어인 ‘타인’으로 무지막지하게 치환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실제 대타자는 내게 특정 생각을 강요하는 타인이나, 다수가 유익하다고 믿는 단 하나의 가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닌 것 같다(물론 그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음에도). 라캉에 대한 긴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자격도 없어서 멈추겠으나, 어쨌든 라캉의 저 말을 ‘진짜로 네가 바라는 걸 하라’는 단순한 자기계발적 조언으로 치환하는 것은 굉장한 기만이고, 그 자체가 누군가의 욕망이다.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것, 남의 욕망을 나쁘고 억지스러운 것으로 치환하는 이분법적 사고다. 네 욕망을 결코 너 혼자 만들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땡겨 쓰나. 그냥 라캉이 그랬다는 말 같은 거 하지 않고 ‘네가 바라는 일을 하라’라고 주장하면 충분할 것을, 왜 전문가의 권위를 빌려오려고(타인의 욕망이다), 전문가의 말을(전문가의 욕망이다) 마음대로 조리(이게 당신의 욕망인가)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분별한 ‘나’의 강조는 ‘나는 나’라는 생각을 불필요할 정도로 강화한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미친 생각을 머릿속에 심어 넣는다. 나는 결코 나를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나 말고는 누구도 모르는 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알아도 나이기 때문에 결코 나만큼은 알 수 없는 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이 필요하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거울이 필요하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그저 모든 거울이 거울을 대주는 사람의 욕망을 포함한다는 피치 못할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에 따라 거울의 각도와 곡면, 조명의 조도를 조절하여 나를 비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거울을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도 욕망 때문이다. 나 역시 내 이미지를 받아들면 나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는 또 다른 타인의 욕망)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포토샵을 가동한다. 사실 자아포토샵은 의식의 부팅과 동시에 자동으로 실행되며 심지어 '종료하기'메뉴도 없는 아주 괴랄한 어플리케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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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좌절을 수반할수록 건강해지는 것 같다. 아직 괜찮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괜찮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기가 어렵지는 않을까?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이성을 미친 듯이 의심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수록 나야말로 합리성의 기준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잘 인식하는 것처럼.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망한 것 같다고 느끼는 경험을 가끔씩이나마 하지 않고, 그저 순탄하게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주변 풍경을 둘러봐야 한다. 내가 주조할 수 있는 모든 나의 욕망이 실제로는 이런 저런 타인의 욕망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 만들어 낸 작품의 카탈로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타인을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내 욕망을 내 욕망답게 만드는 일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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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글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지 모르겠다..... 촉촉갬성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분노로 끝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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