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만지는 방법
1
행동으로서는 명백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다는 사실 덕에 역설적으로 명백하게 의미를 갖추는 동작들이 있다. 예컨대 얼굴을 만지는 일.
얼굴을 만지는 일은 어떤 관계에서는 단지 동작으로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사실, 얼굴을 만지는 일은 없다. 오직 얼굴을 만져주는 일과, 얼굴을 만지게 해주는 일만이 존재한다. 오직 주는 일과 주는 일이 마주할 뿐이다. 어떤 사랑은 그렇게 생겼거나, 그렇게 생겼다고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몰두한다. 얼굴을 만지는 일에는 불필요할 섬세함이, 얼굴을 만져주는 일에는 요구된다. 그래서 그 일은 충분히 연구의 대상이 되고, 서로는 아무리 연구해도 충분하지 않은 대상이 된다. 우리가 충분히 몰두할수록, 우리는 몰두하기에 충분해진다.
가령, 핸들을 잡고 있는 당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갈 때, 나는 연구한다. 손등 방향으로 당신의 얼굴을 스치는 방식이, 손바닥과 붙어 있는 손가락 안쪽 마디를 평행하게 눕혀 당신의 볼을 귀에서 턱 방향으로 스치듯 훑어 내려갈 때 그 동작이 악셀을 밟고 있는 당신의 다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한다. 목 옆쪽으로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내릴 때, 어느 높이에서 시작해야 할지, 몇 개의 손가락을 동원해야 할지, 손가락 사이사이에 머리칼은 얼마만큼 품어 넣어야 할지, 손이 훑어 내려오는 속도는 벚꽃이 떨어지는 것보다 빨라야 할지 느려야 할지, 나는 천천히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음미한다. 그 모든 경우의 수가 내게서 무엇을 꺼내 당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살뜰히 짐작하는 일이 기껍다.
그 작은 얼굴에 손 하나 닿는 방법이 무수하여 무수한 시간동안 나는 당신을 무수히 생각할 작정이다.
내 심장에서
느티나무 같은 밤이 자란다.
너를 향해
내 발바닥엔 잔뿌리들 간지러이 뻗치고
너를 만지고 싶어서
내 모든 팔들에
속속 잎새들 돋아난다.
_ 황인숙, 「밤의 노래」 부분
나는 겨우라는 붓에 기대어 날마다 사과 한 알씩을 먹으며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하나의 성냥개비가 척, 하고 불꽃을 일으켰다가 꺼지는 찰나의 사건이지요. 내가 '당신의 첫'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라는 첫'은 저 오클랜드 서쪽 바다의 일렁이는 너울같이 내게 연이어 다가오는 첫사랑입니다. 당신이 첫사랑이 아니라면 옆에 있는데도 이토록 당신을 그리워할까요? 당신은 옆에 있지만 멀리 있어요. 당신은 찰나이면서 그 찰나가 품은 영원입니다.
_ 장석주,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아내가 뒤척거리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 바람에 발목이 담요 밖으로 빠져나왔다. 장길도는 아내의 새하얀 발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원래 저리 하얬던가? 모를 일이었다. 한 사람의 전부를 알려면 우주만큼 장수해야 할 것 같았다.
_ 박형서, 『당신의 노후』
2
무릇 인간이란 남을 지배하든가 남에게 섬김을 받든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잘 압니다. 누구에게나 맑은 공기가 필요하듯 노예란 필요하지요. 명령하는 것은 곧 호흡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에 동의하시죠? 가장 불우한 사람조차도 숨은 쉬게 마련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배우자나 자식이 있고 독신일 경우엔 개가 있지 않습니까. 요컨대 핵심은, 상대는 대꾸할 권리가 없으나 자신은 화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한테 말대답해서는 안 된다'라는 상투적인 말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말은 좀 이상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한테가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달리 보면 꽤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대적할 수 없는 상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이유들이 서로 대립할 수 있고, 결국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와 반대로, 권력은 모든 것을 단번에 끝내줍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터득했지요. 가령, 당신도 알아차렸겠지만, 우리의 늙은 유럽은 드디어 꽤 쓸 만한 방식으로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순진한 시절에 그랬듯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들 냉철해졌거든요. 대화도 통보로 대체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요. "이상은 사실이다. 당신들은 언제든 이것을 검토할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몇년 후, 경찰이 당신들에게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_ 알베르 카뮈, 『전락』, 46-47쪽
내가 도달한 나이는 콘수엘라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어. 노신사와 사귀는 여자아이들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게 아니야-나이에 끌리는 것이고, 나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왜냐고? 콘수엘라의 경우 그건 엄청난 나이 차 때문에 자신이 굴복하는 것을 스스로 허용할 수 있어서인 듯해. 내 나이와 내 지위가 아이에게, 합리적으로 항복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주고, 그러면 침대에서 항복하는 게 불쾌한 감각이 아닌 거야. 동시에, 나이가 훨씬, 훨씬 많은 남자한테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이런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성적인 수작을 할 때는 얻을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돼. 굴복의 쾌락과 더불어 정복의 쾌락을 누리는 거지. 여자의 권력에 굴복하는 남자아이, 그렇지 않아도 매력이 넘치는 존재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지만 세상을 아는 남자가 오로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굴복한다면? 완전한 관심을 얻고,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접근할 수 없는 남자에게 절실한 열정의 대상이 되고,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에게 열리지 않을 숭배하는 삶에 진입한다면-그것은 권력이야. 그것이야말로 아이가 원하는 권력이지.
_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46-47쪽
두 거장이 각자 자기 책 46-47쪽에서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전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층위에서의 의미, 그 의미를 손으로 가리고 생각하면, 두 거장이 말하는 권력은 기이할 정도로 닮아 있지 않다. ‘권력’이라는 것이 현미경을 대고 관찰하기에 좋은(혹은 그렇게 관찰해야 옳은) 단어라는 반증이 아닐까. 정황과 화자와 청자를 모두 고려하면 수백만 가지의 미시적인 의미차이가 발생하는 단어, ‘권력’
그러나저러나 문장으로 이름난 작가의 책을 연속으로 읽는 일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글쓰기가 싫어지고, 억지로 써놓고 보면 꼴 보기 싫다. 에잇, 다 죽어버렸으면!
아, 맞다, 죽었지......
죄송합니다......
3
현재까지 확보된 수많은 증거에 따르면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낙랑군을 한반도 밖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고 싶어 하는 심리 저변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식민지 콤플렉스다. 고대 한반도 내에 외부 세력이 설치한 ‘식민지’가 존재했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싫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설치된 중국의 군현을 근대의 식민지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더러, 설령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한반도 바깥에 있었다 하더라도,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는 역사적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 ‘한반도 안쪽만 아니면 돼’라는 것은 그야말로 유치한 태도다.
둘째는 고조선이 대륙에 존재했던 아주 큰 나라였다는 영토적 허영심을 충족하는 것이다. 사이비 역사가들은 실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광대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역사를 반도로 축소했다고 열을 올려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륙의 역사는 우월하고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넓은 영토에 대한 환상과 욕망에 취해 정작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한반도를 혐오하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식민주의 사학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_ 젊은역사학자모임,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59-60쪽
물었다. 근초고왕 때 요서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을 아냐고.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 근초고왕이 누군데?
- 백제가 전라도야 충청도야?
- 요서가 북한에 있는 거야?
역사가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를 놓고 다투는 이들의 꼴이 더욱 웃겨 보인다. 저게 뭐라고.
잘못된 역사관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만주벌판의 어디까지 말발굽을 찍고 왔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지나가는 듯한 CF속에 숨겨져 있는 코드들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게 21세기 자본주의 세계다. 요컨대 저들은 진영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
어차피 모든 역사는 이데올로기다.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고, 출토된 유물은 영토와 영토 사이에 확고한 금을 그어주지 않는다. ‘사실’은 없거나 약하고, 최소한 ‘사실’을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이 ‘사실’보다 더 많고 열정적이다.
역사로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다 별로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자기 배 불리려고 헛소리하는 사람들은 차라니 견딜 만하다. 어차피 나는 안 믿을 거고, 그들이 역사로 국을 끓여 제 배를 채운다고 내가 배고플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역사‘의식’이니 ‘뿌리’니 ‘민족적 정체성’이니 하는 소리를 입에 올리는 인간들, 특정한 국가에 태어났으니 받아들여야 옳은 윤리적/사상적 규범조항과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의식적 원형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 그걸로도 모자라서 자기네들에게 그 규범과 원형을 발굴하고 해독해 낼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인간들은 혐오스럽다.
--- 읽은 ---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전락 / 알베르 카뮈 지음 / 유영 옮김
맑스주의 역사 강의 / 한형식 지음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지음 / 정영목 옮김
--- 읽는 ---
돈 후안 외 / 티르소 데 몰리나 지음 / 전기순 옮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후설의 현상학 / 단 자하비 지음 / 박지영 옮김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마이크 곤살레스 외 지음 / 이수현 옮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지음 / 안장혁 옮김
마르크스 평전 / 프렌시스 윈 지음 / 정영목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