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가락이 닮았다

 

 

1

 

피부가 더 칙칙하냐 인생이 더 칙칙하냐를 놓고 뇌내 논쟁이 한판 벌어졌는데 호각이다. 나이를 먹고 먹다 딱 어느 시점을 지나면 그때부터 한 번 망한 피부는 불로초에 우담바라를 갈아서 팩으로 처발라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 번 망한 인생이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티핑포인트, 오늘은 비록 시원하게 망했지만 내겐 내일도 없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구슬픈 지점은 몇 살쯤일까? 35? 40? 50? 500?

 

그러거나 말거나 날씨가 추워지면 역시 읽는 것뿐인데, 아니 작년까지는 분명 그랬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자꾸 책 집어 던지고 찬바람 면담하러 나가고 싶어진다. 어디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두꺼운 옷 걸치고 나가도 동네 한 바퀴 휘 돌고 오면 얼굴이 김장김치가 될 만치 추위에도 약한데, 그래도 괜히 꾸역꾸역 기어나가고 싶다. 엄마는 너 이제 그러다 감기 걸리면 죽을 수도 있는 나이라며 핀잔을 주는데 그 표정이 사뭇 엄숙하고 진지해서 이쪽은 더 빡친다. 앉아서 머리 말리고 있는데 뒤에 서서 내려다보다 흰머리를 발견하고는 또 쓸데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너 그 흰머리 뽑지 말고 염색해라, 뽑으면 머리 안 난다, 너 가뜩이나 머리숱도 적은데, 이러면서 걱정하는 척 돌려깐다. 어디서 주워듣고 온 비과학적 발언으로 아들 마음에 생채기를 내다니 이 엄마가 내 엄마가 맞는지 과학적인 의구심이 생겨난다. 엄마, 내 머리숱 적은 거, (동생) 머리숱 적은 거, 그거 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면 거울 한 번 보소서. 그러자 엄마 역시 와, 저게 내 아들인지 후레아들인지 과학적인 의구심이 생겨난다는 표정인데, 그 순간 이쪽에서는 역시 우리는 모자관계일 확률이 99.98% 라는 과학적인 확신이 드는 것이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그 조각만이 있을 뿐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무엇을 하건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제임스 설터가벼운 나날

 

그래서 침묵이 강요된 이 시간 동안나는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을 쓰기 시작하고심지어는 아무도 읽지 못하게끔 비밀 문자를 만들기도 한다나는 일기에 나의 불행나의 고통나의 슬픔나를 밤마다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적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문맹

 

손님 혹시 직업에 대해 설명한 책이 있나요딸한테 동기 부여를 해주고 싶어요.

직원 따님이 입시를 앞두고 있나요?

손님 아니요아직요우리 딸 저기 있네우리 공주님이리 와봐. (네 살 배기 아이가 온다우리 딸여기 친절한 언니랑 잠깐 얘기하고 있어나는 어떻게 의사나 과학자가 되는지 알려주는 책을 찾아보고 올게너도 의사나 과학자 괜찮지?

(아이는 아무 말도 없다)

(직원에게금방 갔다 올게요.

(손님은 논픽션 서가로 간다)

직원 이름이 뭐니?

아이 세라요.

직원 세라이름 예쁘다.

아이 고맙습니다.

직원 세라이다음에 크면 뭐가 되고 싶어?

아이 : ...꿀벌요.

직원 참 멋진 꿈이구나.

젠 캠벨그런 책은 없는데요 



 

2



 

오은의 시를 읽으며, 이 사람은 천재적인 데가 있구나, 하고 느꼈던 적이 많다. 성 농담과 쌍벽을 이루며 아재 개그의 영토를 크게 양분한다고 알려진 글자 조작’(말장난?)의 미학을 최대치까지 밀어붙여 시로 만드는 쉽지 않은 재능이랄까. 이런 걸로도 시가 되는구나, 대단하구나, 생각하게 하는 시가 그의 시집 속에는 많았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갑자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정쩡한 시가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바로 이런 거.

 

어젯밤 꿈에는 네가 나왔다. “잘 지내?”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잘 지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까봐누구보다 네가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나 나쁘다꿈속에서도 나아지지 않는다.

오은 표리부동전문

 

syo가 나이 열다섯에 저런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고 그날 일기에 오늘도 한 편의 시를 썼다.” 라고 기록하곤 했다. , 흑역사.

 

혹시 syo가 뭔가를 똑바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무려 오은인데. 어쩌면 저 안에 뭔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래 곱씹어 읽으면 그제야 보이는 뭔가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렇게 오래 곱씹어 비로소 저 시가 아름답게 된다면, 그때 저건 오은의 시가 아니라 오은 반, syo , 반반시가 되는 것은 아닐까?

 

 

 

3



하지만 서점에서의 현실은 다르다.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평론가들이 열광적으로 논평한 대부분의 책들은 몇 달 동안 먼지가 쌓인 채 서가에 꽂혀 있다가 결국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리는 반면, 미처 평가도 받지 못하고, 토론이나 추천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문득 나는 이런 책들에 관심을 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리뷰를 써보겠노라 결심했었다. 각각의 작품들을 문예사조에 따라 분류하고, 책의 성격이나 경향을 규정하고, 이 책이 다른 책보다 나은지 못한지 독자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리뷰를 쓸 줄 모른다는 걸, 게다가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줘서 고맙고, 무려 쉼보르스카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서 영광이다.


도대체 서평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쓰고 어디부터는 안 써야 하는 물건인지를 고민하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잠깐인 이유는,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서평장르가 요구하는 함량을 채울 역량이 애당초 syo에게 없었음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고민을 1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잘 된 서평은 그 솜씨가 부럽고, 부럽다보면 가질 수는 없더라도 알기라도 하고 싶어서 꼼꼼히 읽게 된다.

 

쉼보르스카의 이 서평집은 한 편 한 편의 분량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syo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서평의 원형이라고 봐도 되겠다. 꼼꼼히 읽고, 어차피 서평인 듯 서평 아닌 서평 같은 것들만 쓸 팔자라면 이렇게라도 쓰고 싶다.

 



반면 이명현 선생님의 이 서평집은 서평에 과문한 syo의 입장에서는 논문급이다. 학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있으시겠지만. 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세하고 친절하며 그 와중에 다정하다. 오죽하면 이명현의 서평을 읽으면 원전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드니 읽지 말라는 말이 추천사로 붙었을까.

 

 

 

-- 읽은 --



이명현, 이명현의 과학책방

이영문, 고인돌, 역사가 되다

박병상,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역사미스터리클럽, 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세계사 명장면

오은, 왼손은 마음이 아파

 


 

-- 읽는 --



데이브 레비턴, 과학 같은 소리 하네

월터 앨버레즈,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김상현, 『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 이성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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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8-11-2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흰머리 따위는 그냥 새치로 치세가 세월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ㅠㅠ

syo 2018-11-24 00:37   좋아요 0 | URL
저 같은 경우는 붙어있기만 해준다면 희든 검든 그저 땡큐라는 마음가짐이랄까요.

비로그인 2018-11-24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학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있으시겠지만.’ ㅋㅋㅋ 저는 요런 소소한 멘트가 왜 이렇게 웃기죠? ㅋㅋ

syo 2018-11-24 09:19   좋아요 1 | URL
소소한 멘트에서 웃음을 발견하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

단발머리 2018-11-24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찬바람 면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11-24 12:07   좋아요 1 | URL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세상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를.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던져 본다!!

warmsoul 2018-11-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서 뭐가 될거냔 질문에 ‘꿀벌‘요 하고 답한 내용을 읽고 갑자기 눈물이 핑도는데 제가 이상한건가요?^^;

syo 2018-11-24 15:56   좋아요 0 | URL
전 그거 읽고 너무 귀여워서 빵 터졌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정말 눈물이 핑돌 수도 있겠어요.
막, 네살 짜리 여자애가 꿀벌 옷 입고 있는 걸 상상했거든요ㅎㅎㅎ

stella.K 2018-11-2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가족이란 그런 거예요.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어요?ㅋ

지난 목요일(정확히는 금요일일텐데) M본부에서 하는
<문화사색>이란 프로에 이명헌 씨 나왔는데 맨정신으로
봤어야 하는 건데 한 잠 자고 봤더니 다음 날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이명헌 씨 인상 좋더군요. 털북숭이라서 그렇지.ㅋ
과학엔 잼병인데 저 책은 정말 읽고 싶어지더군요.

눈도 왔는데 애인은 안 만나시나요?ㅎ

syo 2018-11-24 15:59   좋아요 0 | URL
대구는 눈 안 오고 비왔어요ㅎㅎㅎㅎ 여긴 그런 곳이지요.

그나저나, 천문학자 이명현 선생님이요. 저도 저 책을 읽으면서도 이명‘헌‘인 줄 알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저 책이 제가 읽은 이명현 선생님의 첫 책도 아닌데. 이제껏 계속 이명‘헌‘으로 알고 있다가, 페이퍼에 이 책을 추가하려고 이명헌을 검색했는데 책이 안 나온다??? 알고 봤더니 이명‘현‘ 선생님....

심지어 어제 알쓸신잡에서도 자막으로 천문학자 이명‘헌‘이라고 나오더라구요. 두 번이나.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이‘병‘헌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이렇게 된 걸까요?
이병헌 이병헌 이병헌 이병헌 이병헌 이명헌......

stella.K 2018-11-24 16:37   좋아요 1 | URL
헉, 그러고 보니 제가 오타한 건데...
저도 이명현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 아니었단 말입니까? 허허.

아, 그러고 보니 스요님 대구에 있죠?
전 서울에 눈이 오면 대한민국 전체가
눈이 오는 줄 순간적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건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야하남요...ㅠ

붕붕툐툐 2018-11-24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syo 2018-11-25 00:43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붕붕툐툐님의 독서생활에 보탬이 되었다니 뿌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