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있으면 나 좀 살려줘요,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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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이 자꾸 작년에 썼던 글을 들이밀어 사람을 빡치게 한다. 이야, 웃긴데? 이야, 날카로운데? 이야, 여기가 킬링파튼데? 이야, 얘가 나보다 훨씬 잘 쓰는데? 이야, 이야?
누군가 책을 왜 읽느냐고, 독서의 효용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이제는 당당하게 대답을 해줄 수가 있다. 네, 책은 글을 못 쓰기 위해서 읽습니다. 퇴보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조금 무리해서 1년에 700권쯤 아득바득 읽고 나면, 정말 몰라보게 글 못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장하죠! 자, 작년의 제 글을 한번 보시고, 올해 글을 한 번 보세요. 정말 눈부시게 못썼죠?
실제로 요즘은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너무 커서, syo 같은 자는 그냥 입 다물고 손 묶고 사는 게 인류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지 않나 싶다. 책에 대해서 쓰는 것 역시 그렇다. 내 ‘견해’는 애초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니 나는 그저 책 속에 든 ‘개념’만 옮기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우선 ‘개념’이라는 것이 되게 잘 정제되었을 뿐, 실제로는 나 아닌 누군가의 ‘견해’에 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설령 책 속에 든 것이 정말 ‘개념’다운 ‘개념’이고 그것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 하더라도 책을 통째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느 부분을 옮길지 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그대로 ‘견해’가 되므로, 결국 보르헤스의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제국과 동일한 크기의 제국 지도처럼, 책을 그대로 옮겨 오지 않는 이상 책에 관한 어떤 글도 견해가 아닐 수는 없다. 심지어 어느 책의 첫 활자부터 마지막 구두점까지 그대로 옮겨온다고 해도 견해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보르헤스의 다른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활자 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써낸 피에르 메나르라는 인물을 제시하며 그의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 얼마나 더 오묘하고 풍부한 작품인지를 설명한다. 결국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쓴 글은 내 견해고, 나는 내 견해가 내 견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못마땅한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으므로, 백스페이스와 딜리트 빼고는 자판 위의 모든 공간이 꼴도 보기 싫은 중이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 syo는 나까야 쪼우의 『헤겔』 중 한 부분, 그러니까 헤겔이 신비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수의 비례와 혹성의 거리를 대응시켜,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어떤 혹성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논문을 제출했지만, 실제로 이미 그해 1월에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소혹성 ‘세레스’가 발견되었다는 대목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 아래에 syo는, 헤겔조차 깝친다, 제발 깝치지 말자, 뭐 이런 글을 띡 써놓았다. 그런데 테리 핀카드의 『헤겔』은 그에 관해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겔은 수열의 힘에 대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사변들을 논하고 이런 서술을 덧붙인다. “만일 그 수열이 자연의 참된 질서를 보여 준다면, 넷째 자리와 다섯째 자리 사이에는 큰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찾아야 할 행성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헤겔은 실제로 화성과 목성 사이에 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수열이 자연의 참된 질서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사변들에 대해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므로 헤겔이 취한 애매한 태도는 일견 공정하다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적들에게 물어뜯기 좋은 부위를 내준 꼴이기도 하다. 어쨌든 테리 핀카드에 따르면, 자신의 교수자격방어논문에서 헤겔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 혹성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명확히 주장한 적은 없는 듯하다.
그러면 내가 뱉어 놓은 말은 이제 뭐가 되지?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떤 말을 뱉기 위해 어디까지 깊이 뒤지고 찾아내야 하지? 그러면 말하기보다 입을 다무는 쪽이 인생을 훨씬 더 쉽고 덜 피곤하며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사는 길이라는 게 결론이 되나?
그런데, 그런다고, 내가 안 쓸까?
정말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쓰지 않아야 되느냐고 쓰고 앉았으니......



그러나 나름대로 정말 치열한 독서를 했던 1년이었다. 그동안 나는 또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저 독자로 머무는 것에 점점 자족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정말로 훌륭한 책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다 읽으려면 시간이 많지 않겠다는 것도 알았다. 내 글, 그 속에 담겨 있는 알량한 사유와 감성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도, 심지어 그런 알량한 것들을 정말 아름답고 멋있게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도처에 너무나 많다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나보다 더 잘해주는 사람이 이미 충분해서 나는 옛날처럼 그냥 내 삶의 자존을 위해 독서만을 충실히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_ 요조, 『오늘도, 무사』
골짜기를 굽어보니 인간이 한 일이 바람과 물이 한 일에 비해 너무 작아 보였다. 앨런은 너무나 자주 보이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 살며 안 돼,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물이 없고 비가 오지 않고 바위가 많은 지형에 정착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 산단 말인가? 자연은 어디에서든 인간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평지에서는 토네이도로 죽인다. 해안가에 살면 쓰나미를 보내서 인간들이 수백 년 동안 만들어놓은 것을 지워버린다. 지진은 모든 공학과 모든 영속 관념을 비웃는다. 자연은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싶어하며, 우리 일일 비웃고, 자신을 깨끗이 닦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든 원하는 곳에 살았다. 그들은 여기, 이 대책 없는 골짜기에서도 살았고, 이곳에서 번창했다. 번창? 그들은 그냥 살았다. 사람들은 생존했고, 재생산했고, 아이들을 도시에 보내 돈을 벌게 했다. 자식들은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와 언덕 꼭대기를 깎아내고 똑같이 대책 없는 골짜기에 성들을 지었다. 인간의 일은 자연 세계의 등뒤에서 이루어진다. 눈치를 채고 에너지를 그러모을 수 있으면, 자연은 그 서판을 다시 깨끗하게 쓸어낸다.
_ 데이브 애거스, 『왕을 위한 홀로그램』
권위에 의한 진실의 핵심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문가의 의견을 따를 필요가 있지만,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전문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어떤 전문가를 따를지 결정할 경우, 우리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를 결정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에 합당한 전문가를 또 골라야 하는 난감한 역설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전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바탕으로 한 것이 된다. 그 판단이 온전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누구의 판단이 권위 있는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_ 줄리언 바지니, 『진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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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읽어 나가고는 있지만 쉽지가 않다. 어느 분은 이 책의 단점으로 ‘전기적 요소’에 지면을 많이 할애해 헤겔의 ‘사상’에 대해서는 분량 대비 아쉬운 데가 있다는 식의 평을 남기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덩치의 찰스 테일러 저 『헤겔』은 정말 사상으로 1000쪽을 꾹꾹 눌러 담았다는 느낌이다. 확실히 이 책은 헤겔의 ‘삶’을 조금 더 상세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지만 그마저도 syo에겐 철학의 융단폭격 같은 느낌이라 도무지 페이지가 뻗어나가지를 않는다. 헤겔의 인생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걸 감안해보면, 이나마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엉클 테리의 솜씨는 축복이다. 정말 좋은 책이다.
아무튼 헤겔은 지금 좀 외롭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일자리는 변변찮고, 열심히는 쓰는데 하나같이 맘에 안 들고, 인민의 삶에 개입하는 ‘대중철학자’가 되겠다고 깝쳤으나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으니 부끄럽지 않은 출구전략을 마련해야겠고, 그 와중에 베프 1 셸링은 나이도 어린놈이 열라 잘나가다 못해 아예 학계를 씹어 먹는 중이고, 베프 2 횔덜린은 하루하루 조금씩 더 미쳐가며 후세 사람들이 익히 아는 그 크레이지 횔덜린이 되는 중이고, 셸링 시다바리 소리 들어도 참고 또 참으며 예나 대학에 겨우 엉덩이를 들이밀었더니 그때부터 어쩐지 이놈의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망해가는 추세고, 유부녀랑 사랑하다 도른자가 된 횔덜린을 보고 느낀 것도 없는지 셸링 저 어린노무자슥은 기어이 유부녀 이혼 시켜서 결혼하더니 그 여파로 대학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결국 나는 또 혼자 남았고, 만나는 여자도 하나 없는데 나이는 자꾸자꾸 먹어가고, 아버지가 남겨 놓은 유산은 하루하루 줄어드는데 앞길은 여즉 깜깜하고...... 에라이 빡친다, 울분을 꾹꾹 눌러 담아 책이나 써야지...... 이렇게 헤겔은 목하 눈물 젖은 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혹은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곧, 읽을 수 없는 책의 지명타자, 『정신현상학』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빠밤
-- 읽은 --




손미,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팀 플래너리, 『지구 온난화 이야기』
윌 듀란트, 『위대한 사상들』
이근식, 『애덤 스미스 국부론』
-- 읽는 --







테리 핀카드, 『헤겔』
마이크 비킹, 『그들은 왜 더 행복할까』
조홍식, 『문명의 그물』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이영문, 『고인돌, 역사가 되다』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이명현, 『이명현의 과학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