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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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동안 읽은 책들을 모아놓고 대강의 결산 비슷한 것은 하지만 올해 최고의 책, 과 같은 부담스러운(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은 무게있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한두 권을 고르는 일은 안 했습니다. 말 그대로 부담스럽고 무서우니까요. 물론 가까운 친구들이 주로 둘러보고 가지만서도 누군가가 우연히 '이 책이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라고 쓴 글을 보고, 아니 뭐 그런 책을 좋다고 추천해요? 라고 묻는다면 극소심(그리고 속으로는 가시를 세우는)한 저는 아 그런가요... 하고 말꼬리를 흐릴 것만 같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3월 중순을 보낸 이 시점에서, 남은 몇 달 동안 책을 더 이상 안 읽을 것도 아닌데 이 책은 정말 최고였어라고 몇 번이고 되뇌게 하는 소설을 만났고 이 책에 대해서 몇 줄이라도 떠들지 않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에 꽉 짓눌렸단 말이지요. 


읽고 싶은 책을 내가 직접 고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책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그닥 없는 순간에도 '자율성'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게 인간 본성이어서일까요, 예고된 도서관 휴관을 앞두고 좀 허전해진 한국책 서가를 맴돌다 눈에 익은 작가 이름을 발견했어요. 이 작가의 전작 중에서는 두 권을 읽어 보았고요.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입니다.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오베...>가, 캐릭터의 생동감은<할머니가...>가 훨씬 좋았습니다. 즉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느낌은 아니었다는 뜻이예요. 개인적인 판단으로서는. 


공통적으로 모아지는 특징이라면 이런 거였습니다. 굉장히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을 오밀조밀 뜯어보는, 그래서 뭐든 꿰뚫어보고 있는 노인 같은 작가다...라는 것.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속단하기에 사람은 너무 많은 얼굴을 갖고 산다는 거, 당신들이 잊고 있을수도 있지만 어떤 일들은 둘 이상의 각도에서 바라보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손을 뻗어 미처 보지 못한 어떤 부분을 가리켜 보여주는 예리한 감성의 소유자일 것 같다... 라는 것.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어떤 교육과 독서와 여타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너그러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감싸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됐을까.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결점투성이고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을 창조해냈을까. 인간으로서는 바닥인 것 같은데도 그 사람 마음 바닥 어딘가에는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보듬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선택하는 비윤리가 어째서 옳지 않은지, 그것이 어떻게 의도된 무심함 속에서 타인을 목조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는지를 이토록 선명하고 인간미 넘치게 호소할 수 있을까. 

세상의 많고 많은 험악하고 질 나쁜 사건들의 피해자가 어떻게 삶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는지, 그들에게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이 무엇인지 이렇게나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 불편하게 하면서, 모든 진실을 뾰족하게 다듬어 찔러넣어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또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절대 즐겁지 않습니다. 굉장히 괴롭고 아파요. 그렇지만 그 아픔은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통이기 때문에, 저는 진심으로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은 폭력의 피해자가 실제 당했던 그 폭력보다, 생각없는 2차 폭력들이 양산되는 시간 속에 피해 당사자를 포함해 그 가족까지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을 훈계조도 설득조도 아닌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정말 무덤덤해요. 그러니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독자가 느껴야만 합니다. 쉽게 손가락질하고 쉽게 말을 옮겨 상처를 곪게 하는 무심함이 바이러스와 다를 게 뭔가 생각하게 하죠.

단순히 어떤 폭력사건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독자를 이야기의 배경인 베어타운 안으로 깊숙이 끌고가는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요. 그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곁을 지키며 이 두꺼운 소설을 든든하게 떠받칩니다. 

자신의 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번번히 남편의 직업적 소망에 짓눌려 자신을 희생하는 아내의 이야기는 속을 답답하게 합니다. 한때 가까웠지만 마음의 거리는 갈수록 벌어지는 부부사이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철렁해져요. 너무 현실적이어서요. 

끌리는 이성에게 거절당하고 그의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을 폭로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해요. 잘못인걸 알지만 우리도 그렇게 순간의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던 순간이 있었으니까요. 주부 노릇이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이라는 말까지, 작가는 속시원하게 해줍니다. 어떻게 이런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야기가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과 이야기의 방향과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이 쉴새없이 싹틉니다. 계속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근에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책들 중에서도 이렇게 넘치는 질문을 끌어올린 책이 있었던가하고요. 계속 질문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입니다. 많은 독서가들이 말하고 있듯이요. 물론 모든 독자가 같은 질문을 하란 법은 없겠지만요. 묻게 만들고 답하기 위해 생각하게 하고. 역시 책은 그래서 읽는 것인가 봅니다.


이곳에서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저지르는 끔찍한 잘못은 대부분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날수록 실수는 더 커지고 결과는 더 끔찍해지며 자존심에 더 엄청난 금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31쪽


"애들 꼬맹이 시절이 기억나요, 파티마? 유치원으로 찾아가면 애들이 달려와서 말 그대로 내 품속으로 뛰어들잖아요. 내가 받아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온몸을 맡기잖아요. 나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파티마는 웃으며 말했다. "아맛이 하키를 하고 있으면, 행복해하면 나도 똑같이 느껴져요. 어떤 건지 알죠?" 안-카트린은 알고도 남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됐다. -117쪽


부모 간의 애정이 식으면 아이들은 아주 미묘한 것을 통해, 심지어 '너희'라는 아주 사소한 단어를 통해 알아차린다. 마야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인 척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예전에 그녀의 부모님은 서로를 그냥 '엄마'와 '아빠'라고 불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딸, 엄마가 진심으로 너를 천 일 동안 외출 금지시키겠다는 건 아니야." "딸, 네가 만든 눈사람을 아빠가 일부러 무너뜨린 거 아니야. 발에 걸려서 넘어진 거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한쪽이 거의 아무렇지 않게 "네가 집에 없으면 너희 엄마가 엄청 걱정하는데, 전화를 해주면 안 되겠니?"라고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너희 아빠랑 나는 너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라고 보낸다. 결혼 생활이 파탄 났음을 알리는 한 단어. 그게 바로 '너희'다. 둘은 이제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가.  -137쪽


엄마 노릇은 집의 토대를 굳히거나 지붕을 고치는 것과 같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완벽하게 끝내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아무도 칭찬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야근을 하는 것은 예쁜 그림을 걸거나 전등을 바꾸는 것과 같다. 모두가 알아봐준다.  -299쪽


우리는 항상 공격한 쪽의 감정을 변호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쪽이 그들이라도 되는 듯이.  -398쪽


다들 이건 한 사람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 속으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을. -414쪽


그 별채 안에서 마야의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타임머신을 만들지도 않고 과거를 바꾸지도 않고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누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날마다 여길 찾아와 무술을 배울 테고 조만간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 있을 때 공교롭게도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움찔하지 않을 것이다. 소소한 사건들 중에 가장 큰 사건이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슈퍼마켓이 아닌 다른 곳에 다녀오는 듯이 집까지 걸어갈 것이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에 연습하러 여길 다시 찾을 것이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31쪽


"개자식들 앞에서 울지 마요, 벤이 선배."

벤이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참지를 못하겠는데...... 너는 무슨 수로 감당하니?"

마야의 목소리는 하는 얘기에 비해 힘이 없다.

"그냥 들어가요.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나쁜 놈이 쳐다보면 그쪽에서 고개를 돌릴 때까지 눈을 똑바로 쳐다봐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벤이는 그의 안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묻는다.

"무슨 수로 견뎠니? 지난 봄에...... 그런 일이 있었을 때......무슨 수로 버텼니?"

그녀의 눈빛은 냉정하고 목소리는 딱 부러진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에요. 나는 생존자예요." 


그녀는 학교를 향해 걸어간다. 벤이는 영원의 시간 동안 망설이다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가 그를 기다린다. 그의 옆에서 걷는다. 그들의 걸음은 느리고 어쩌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살금살금 그 복도로 들어서지 않는다. 폭풍처럼 진격한다. -522~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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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도 않은 짧은 인생인데 너무 싸우지들 말고 서로서로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해주면 좋겠습니다. 보니것 슨세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린 다 너무 칭찬이 고파서, 그렇게들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는가봐요. 까짓것, 돈도 안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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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딱서니 없는 시절 우리는 늘 타인에게 나의 이상을 드리운다. 내가 색안경을 줏어 쓴 줄도 모르고 보고 싶은 색으로 칠해진 세상과 사람들을 보며 일없는 환상에 젖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닳을 만큼 닳아 색이 벗겨지기 시작한 안경으로 원래 빛깔을 그대로 드러낸 내 옆의 엄연한 타인들을 보며 환멸에 빠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도 하고 모두의 잘못이기도 한 이런 상황은, 이 욕 나오는 상황은 더 욕 나오는 작금의 전염병이 확산되는 걸 막고자 취한 조치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러모로 유익하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건강한 관계를 지속시키기도 한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보기 싫은 것도 좀 덜 보인다. 다만 위생상의 이유로 적극 권장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떤 관계들에서는, 심각한 정신위생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도 통계로 증명된다. 

바이러스로부터 건강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정신적으로는 몹시 병들어가고 있는 요즘의 나날들이다. 하루의 반은 따로 갈라져 있는 게 디폴트였는데 왼종일 같은 공간 안에서 부딪히자니 몹쓸 병증이 온몸에서 자라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함에 건강염려증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이 시점에서 부자들이 몹시 부럽다. 각자의 공간에서 충분히 자가격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전염병이 지나가고 나면 글쎄다... 상담치료 다닐 마음의 병을 얻은 다른 종류의 환자들이 급속도로 늘 것 같은 이 기분 뭘까. 나도 그 중 한 자리 예약...  -_- ... 


도서관 폐관 전에 책은 진짜 수십 권을 빌려다 쌓아놨는데 (미국인들 재밌는 게 마트만 싹쓸이하는 게 아니라 도서관 책도 싹쓸이해서 빌려가는 통에 서가가 다 텅 비었더라는) 전혀 책을 읽을 마음이 1도 안 생긴다. 그래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건 책밖에 없겠지. 적어도 얼굴을 책에 파뭍고 있으면 건드리지는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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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의 새 책이 나왔구나. 이 분의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그 기발한 상상력에 입도 정신도 뻐끔뻐끔한 상태로 세 권을 연달아 읽어치웠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를 엮는 솜씨는 물론 서툴렀지만 이 사람이 쓰기를 좀 더 연마하면 어떻게 변할까 몹시 궁금하게 하는 작가였다. 연마하는 과정이 빛나는 원석을 조금은 훼손해서 '누구나 아는' 그런 형태의 보석이 됐을까, 아니면 본래의 기발한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제나름의 개성있는 보석이 됐을까. 정말 알고싶다. 



제 손으로 제가 먹을 한 끼의 식사를 차려낼 줄 아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먹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은 언제나 환영이다. 한 끼의 밥은 단순히 배를 불리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는 늘 먹고 먹이는 일에 대해 남들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두고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라고, 어디가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주의 휴교령이 내려진 이 사태 앞에서는 눈앞이 깜깜해진다. 특히 잘 먹는 일이 건강과 면역력과 직결되는 요즘에는, 장을 보러 나가도 뭘 제대로 사 오기가 쉽지 않은 요즘에는, 집에서 텃밭 가꾸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축도 길러야 하나, 세상이 역행하고 있는 것 같다... 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 얘기하다가 엉뚱한 소리만 줄줄. 


이 책을 보는 순간 갑자기 떠오른 책 두 권. 




그의 책을 아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다. 누구나 알 법한 바로 그 책 말이다. 나잇값 못 하게도 그 책을 읽은 뒤 대략 1-2개월 간을 악몽에 시달렸고 그 뒤로 호러를 소재로 삼은 책은 가급적 안 읽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는 목덜미가 차가워지는 책을 일부러 찾는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 여기는 조금 낫지 않겠느냐고. 아, 무슨 이런 가학적인 자기위안이 다 있담.



한 때 필립 코틀러의 책을 끼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신간페이지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말을 뱉었다. 이 분 아직도 살아계셨어? 아, 나도 은연중에 내가 그때로부터 얼마나 나이를 더 먹었는지 자각은 하고 있었나보다. 옛날 생각하면서 끼워본다.



가장 낮은 시선에서 가장 멀리까지 파고드는 질문을 던지는 요시타케 신스케. 이 어려운 이름을, 여덟 살 난 막내도 잘 외운다. 어찌 그 긴 이름을 외우냐고 물어보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을 만드는 아저씨인데 어떻게 기억을 못 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분이 쓰신 책 중에서 나를 실망시켰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무릎꿇고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삶의 태도와 가치관, 그 어느 쪽이든 반드시 업그레이드가 된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고 '함께' 사는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널리 읽혀야 한다. 다만 소개글만 보고 내 인상을 추려 쓰는 것이라 실제 책의 내용도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어 신간에 관한 짤막한 몇 문장을 쓰면서도 늘 불안하다(예전에 책 소개만 보고 그렇게 적었다가 후에 직접 읽어보고 속았다는 사실에 분개한 기억이 있다).



교육에 대해 나오는 책들은 가급적 읽자 주의다. 일단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무슨 생각들을 하고 메인스트림은 뭔지, 또 대안들은 뭔지를 알아야 나도 어떤 선택을 할지 가늠할 수가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의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가자는 이야기를 떠드는 것만 아니면 된다(사실 그런 책이 나올 가능성은 없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이렇게 푸는 것은 얼마나 생산적이고 건전한지! 쓰는 것은 정말 좋다. 일단 한 번 거르게 된다. 내가 아무리 광분하건 슬픔에 절어있건 기쁨에 춤을 추건, 세상만사 심드렁하건... 조금은 내가 빠져있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와 자기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렇게 쓰면서, 나와 내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관조하면서 돌이켜볼 수 있는 쓰기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말하고 듣는 것도 좋지만, 읽고 쓰는 것도 그만큼 일반적인 것이 된다면 덜 화내고, 덜 분개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좀 더 차분해지지 않을까, 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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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하다. [형용사]

1. 정도에 알맞다.
2.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언급할 때 적당하다는 말을 한다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표현하는거다. 어떤 경우엔 대충, 부정확하게, 너무 깊이 따지고 들지말고 얼버무리기 위해 쓰기도 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엔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지만 누구나 알고 쓰는 용법이고.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알맞게! 가 맞는 것이겠다. 


코로나가 처음 국내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넌 거기 가 있어서 좋겠다'고들 했다. 그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게 그렇지가 않답니다. 라고 굳이 말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렇지 뭐 하고 말았는데 갈수록 심상치가 않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말하자면 '안일하게 대처할 일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공포에 젖지는 맙시다' 주의인데, 이곳 사람들은 갈수록 패닉하는 게 눈에 보인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확진자와 접촉했던 학생 두 명이 자가격리중에 있다. 그 외에는 아직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사람들은 거의 이성을 잃어가려는 것 같다. 마트에 가 보면 휴지나 생수 같은 것을 취급하는 매대는 썰렁하고, 학교는 정상적으로 등교하고 있지만 정부도 교육구도 불신하는 부모들은 자체적으로 홈스쿨링을 선언하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이러니 등교를 하고는 있어도 아이들도 수업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되지 않는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이민자로 구성돼 있는 지역 특성상, 개별행동이 많아질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일인지 좀... 아리송하다. 확진자수가 엄청난 우리나라 분위기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숨이 막힌다.


실제 바이러스가 침투하기도 전에 이 모두가 서로를 불신하고 의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질식해버릴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란... -_- ... 도대체가 그러면 예방차원에서 마스크를 쓰자고 하는 게 당연한데도 마스크를 굳이 쓸 건 없다, 의료진이나 쓰면 된다, 이런 소리만 계속하고 뭘 어쩌라는 건지 감을 못 잡겠는 이 나라 정부 정말 알 수 없어... 이런 상황이 닥치고 보니 여기가 정말 선진국이 맞나 선진국이라고 해도 되나 그런 의심만 자꾸 불거진다. 


아오 답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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