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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었던 그래픽 노블 세 권을 기억하며 한데 묶는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런 환상을 갖는다. 내 제일 친한 친구는, 어쩌면 나하고 영혼도 나눠가졌을 거라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그 친구도 반드시 좋아할 거고, 내가 즐기는 취미는 당연히 그 친구도 함께 즐길 것이라고. 우리는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그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눌 것이라고. 당연하게도 그 유아기적 환상은 오래가지 않아 깨진다. 다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아프게 깨어진다. 그리고 우정이라 믿었던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이기성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그 과정을 직접 겪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간접적으로 체험해서 항체를 생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 겉으로는 한없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보이지 않는 손톱을 잘 접어 감추고 있는지 그녀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른다. 롤러 걸도 아마도 그랬지 싶지만, 섀넌 헤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책들은 한 번에 다 읽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현재진행형으로 섀넌처럼 힘든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 아이들이 있다면(있겠지만), 꼭 이 책을 쥐어주고 싶다. 



이것도 사실 읽기가 쉽진 않다. <진짜 친구>에서보다 나이를 좀 더 먹어 사춘기에 진입한 섀넌이 겪었던 일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또래 압력이다. 본인이 전혀 원하지 않는 일들을, 또는 하고 싶었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친구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척' 하면서 그 무리 안에서 버텨야 했던 시기의 고단함은 마찬가지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특히 책 말미에 실린 부록이라고 해야 할지 본인의 이야기임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자필 원고와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그 험난한 시기를 잘 견뎌내고 훌륭한 작가로 살아남은 작가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주인공과 같은 학년인 둘째아이에게 어느 책을 가장 추천하겠냐고 물어보니 <진짜 친구>란다. 심적으로 덜 무리간다고. 하기사 이미 저 시기를 오래 전에 지나온 나로서도 쭉 읽어나가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딱 그 나이인 아이 입장에서는 괴롭기도 했겠다. 

다만 우리나라 정서와 조금 안 맞는 부분도 있긴 한데, 잘린 컷 없이 들어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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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먹는 일이 힘들면서 소중한(...) 시절을 보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는, 감사하게도. 뉴스에 보도되는 것만큼 자극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전시상황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상시의 마음으로 살기는 쉽지 않은 곳에서 버티는 느낌이다. 배급표 받으러 줄 서는 기분으로 서서 기다리다보면 마켓 입장이 허용되고, 그나마도 물건이 뭐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고. 사재기가 너무 심한 품목들 밑에는 품목당 1개씩만 구입 가능, 이런 딱지가 붙어 있고... 식사 때면, 아이들한테 툭하면 난 이거 좋아하는데 못 먹는 건데 같은 사치스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야단치고. 아이고, 머리야.



맛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기보다 생존을 위해 먹는다는 의미가 더 부각되는 요즘에 더 생각나는 글이다. 히라마쓰 요코의 글은 눈으로 읽다 보면, 먹은 것도 아닌데 글따라 맛이 당겨올라와 입 안에 머무르는 신묘한 체험을 하게 한다. 이건, 정말 먹는 일을 사랑하고 맛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다이어터라면 히라마쓰 요코의 책은 금서다. 



히라마쓰 요코보다는 좀 더 가볍고, 댄디한 느낌의 글을 쓰는 작가. 사실에 근거한 배경지식을 얻는 용도로 읽으면 안 된다. 재기발랄한 상상을 구경하고 읽고 깔깔 웃기에 딱 좋다. 책이라도 덜 무겁고 즐겁게 읽고 싶은 요즘엔 딱이랄까.



최근의 아만다와 미스터 라떼,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의 사진을 우연히 봤다. 미스터 라떼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진 밑에 누군가가 미스터 라떼, 당신이 이렇게 나이가 들다니! 우리가 나이를 먹었군요... 라고 댓글을 단 걸 보고 순식간에 이 책이 기억났다. 아, 정말 유쾌하게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라서 더 그럴수도. 



몰리의 책도 아만다의 책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아만다에 비해 몰리는 자신의 인생 전반부를 그녀의 인생과 얽힌 음식들과 엮어 회고한다. 너무 가볍지는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진지한 것은 아니고. 적당히 무게중심을 잘 잡고 있는 유쾌한 책. 몰리의 책은 더 있는데 번역돼 나온 건 이것밖에 없는 듯. 



몰리의 책처럼 지향하는 바는 비슷한데(인생 전체를 본인과 가족의 추억 속의 음식들과 함께 기억하고 돌이켜보는), 조금 더 진중하다. 짠하고, 마음 아프고, 박장대소하게 되고, 그녀가 쓰면서 울었을 것 같은 대목에서 같이 훌쩍거리게 되고. 캐슬린의 책 속에서 등장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생생하게 그려졌는지 마치 실제 옆집 사는 이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됐으면 좋겠다. 일일이 사전 찾아보기 귀찮아서, 대충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간 대목들의 디테일 (특히 대공황 시절(이었던가?) 관련해서 -_- ...)이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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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좋아해서, 많이 갖고 있기도 하고 도서관에서도 종종 빌려오기도 한다. 어떤 책들은 그냥 휘리릭 넘겨보고 어떤 책들은 좀 더 꼼꼼히 훑어보고, 또 어떤 책은 온라인 서점 검색창을 열어 다른 사람들의 리뷰도 찾아 읽어본다. 마음에 들어온 책일수록 남들의 느낌도 궁금해지기 마련이라... 남들도 나처럼 생각하는지, 아예 다르게 생각하는지. 



혹시나하고 찾아봤는데 번역본이 나와 있었네...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번역본이기는 한 게 작가는 원래 프랑스어로 낸 책이다. 그런 까닭에 원서를 얼마나 잘 살린 번역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여기서 찾아보든 저기서 찾아보든 이 책은 칭찬일색. 


삶이 어떤 형태로 흘러가는지, 혹은 흘러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나긋나긋하게 풀어 그려낸 책이다. 어느 정도로 안온한 어조인가하면,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뭐야... (시간이 정말 느릿느릿 흘러가는 이야기다) 하면서 책장을 넘길지 몰라도 넘긴 페이지가 많아질수록 코가 맹맹해질 수 있다. 뭐야, 하는 기분으로 시작한 어떤 감정이 천천히 스미는데, 갈수록 찡해져서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달까.

이야기는 이렇다. 

배저 부인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산책이라고 하긴 좀 벅차고 본격적으로 산행이라기에도 어딘가 미묘한 걷기가 취미인 듯하다. 정상까지 앞뒤 안보고 마구 올라가는 게 아니라, 주변도 찬찬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자연물이 있으면 줍기도 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잠시 잡담도 나누면서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올라간다. 배저 부인의 일요일은 대체로 거의 항상 그랬다.

고양이 룰루를 만나기 전까지는.


배저 부인은 수풀에 숨어 흘끔거리며 엿보는 룰루에게 원하면 같이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룰루는 자신의 신체조건(산행에는 어째 부족한 듯한)에 겁을 내며 망설인다. 여기서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 등장한다. 

배저 부인은, 룰루의 망설임을 이해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고 도전할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부인은 룰루가 자기 발로 따라나설 때까지 다그치지 않는다. 얼마나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인지! 


부인은 룰루에게 산길을 걸을 때 썩 유용한 지식들도 가르쳐 준다. 호기심이 넘쳐나는 룰루의 질문에 대답도 충실히 해 준다. 그렇게 정상에 오른 룰루는 '표현할 수 없지만, 가슴에 꽉 차오른 그 어떤 감정' 때문에 아무 말 않고 거기에서 보이는 세상을 충분히 오래 바라본다. 이 장면도 정말 좋다. 내 마음에 들어 온 기분을 충분히 더듬어 헤아려 보는 기회가, 실제로는 얼마나 많이 박탈돼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말이지... 





어쨌거나 배저 부인에게 배우고, 많이 따라다니면서 꽤 산을 잘 타게 된 룰루는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산행이 거뜬하지 못한 부인을 돕는다. 그렇게 함께 산을 오른다. 그러다 결국 노쇠한 부인은 이제 룰루더러 혼자 산에 오르라고 권한다. 다녀와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이야기해 달라며 룰루를 보낸다. 

혼자 걷는 산길은 배저 부인과 걸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룰루는 그 고독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성장한 룰루는 어느 새 자기보다 더 어리고, 미숙한 다른 존재와 함께 산길을 걷고,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인생에 대해 이렇게 할 말 다 하면서 시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단 말야? 이런 압축능력은, 기찬 비유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돼??, 가 책을 덮고 난 뒤의 솔직한 감상... 

인생이 뭐 엄청 거창한 게 아니야. 위대하고 오래 추앙받는 일을 해야 되는 게 아니야(어릴수록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그냥 내가 경험으로 배운 것이든, 시간이 흘러가며 가르쳐 준 것이든, 사소한 것이라도 잊혀지기엔 아까운 삶의 지혜를 아래세대의 누군가에게 잘 전달해서 이어지도록만 해도 그걸로도 괜찮은 거겠다... 그런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는 거다. 이런 책을 만나면. 아주 잠깐 생각하고 잊어버릴지언정, 마음속에서 한 번 긍정한 삶의 태도는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한참 이 여운을 굴리고 있다보니 문득 단속사회가 떠오르는 거다.



특히 프롤로그에서 말하는 이 부분을, 이 그림책이 그대로 그려냈구나 생각했다.


삶의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조언과 충고가 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나와는 다른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사회가 '사회'일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연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후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음을 뜻한다.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고 또 그 환경을 바꾸귀 위해 사람은 한편으로는 선대의 경험과 지혜를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새롭게 바꾸어내야 한다. 

- 20~21쪽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경청해야 하고, 좀 더 다듬은 말을 해야 한다. 내 살아온 인생을 주구장창 말로 전시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곧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므로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구걸 내지는 하소연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말이 나눔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심과 걱정이 타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사적인 투덜거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겪고 있는 무제를 자신만이 아닌 모두의 이야기, 아니면 적어도 사회적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내 이야기에 누군가 다른 이가 맞장구를 치며, 자신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통해 사적인 관심과 걱정은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사적인 투덜거림이나 징징거림을 그 자체로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 다만 그 자체가 독백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말 걸기이며 자시느이 경험을 나누기 위한 초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

이야기는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며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에 "참여"할 때에만 계속 이어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 

- 186~187쪽


젊은 사람들이 중장년, 노인들의 말을 대체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그게 대부분 공감하며 들어주기를 강요하는(문제는 그게 불가능한 전제라는 건데!!!) 징징거림, 푸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자신의 개별성에서 보편적 담론을 끌어냈던 어른들은, 늘 존경받았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은 다른 누구하고도 다른 자기만의 독특함을 지닌다. 이 독특함은 다른 어떤 특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다른 것으로 강제로 환원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엄기호'라는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고,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국제연대활동을 위해 외국에서 몇해간 돌아다녔고,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이 모든 것은 '나'라고 가리켜지는 한 사람의 특징을 어떤 특정한 집단 혹은 범주로 환원하는 방식의 설명이다. 경상도, 90년대, 국제연대, 강사 등이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나'가 먼저 나온 뒤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안에 수많은 '우리'가 있는 셈이다.


그렇더라고 나에게는 최종적으로 우리라는 그 어떤 '묶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만의 독특한 그 무엇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 없어지면 나는 그저 묶음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 109~110쪽


즉 집단정체성을 제외하고도 순수한 나,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가 남아 있어야 나는 타인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후대에 개인의 문화를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오버하자면 개인은 그 사람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개인문화의 아이콘이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와서, 배저 부인은 그저 일요일마다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다. 그렇지만, 산책과 산행과 여가가 오묘하게 뒤섞인 그 걷기에 더불어 쌓인 경험과 지식이 지혜를 생성했고,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곁이 생겨나고 그 걷기의 문화가 쭈욱 누군가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은, 아 그게 그렇구나 그런가보지, 하고 잊어버려도 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일의 중요성이, 그게 결국 사회에 퍼트릴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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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뒤로는 초록색 나는 것을 기르기가 여의치 않아 많이 나눠주고 집에 둔 것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나름 얼치기 가드너로 살았던 세월을 돌이켜보면 화초를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이랄 것도 없는 방법은 꾸준히, 규칙적으로 관심을 두고 물을 주고, 하엽을 치워주고, 비료를 주고, 가끔씩 화분 방향을 돌려가며 볕을 고루 받게 해 주는 것이었다. 간헐적으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조금씩 꾸준히.

그런데 이건 사람의 모든 삶의 모습에 담겨야 하는 태도다. 당연히 이상적으로 표현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실천 가능성은 뭐... 남말할 처지가 아닌 까닭에 말줄임표가 필요하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런데, 어느 때는 폭포수처럼 사랑을 쏟아붓다가, 몸이 지치고 힘들다고 파리 쫓듯 손 휘저어 아이를 밀어내면 아이는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뭐... 비슷한 원리로다가 책을 읽다 말다 하는 자의 머릿속이 그닥 체계적일수가 없거니와 단정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여하간 그 뭣도 아닐 것이 분명함과 같다. 되다 만 밥 같달까. 아마도.

 

도저히 '꾸준함'을 삶의 기치로 내세울 수가 없다. 그저 '잊어버릴 만 하면 가끔 생각난 듯 한번쯤' 이 어울리겠다.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읽음이 읽지 않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이민가방에 바리바리 넣어왔던 책 몇 권은 대부분 사회과학서라, 책꽂이를 보면 좀 메마른 기분이었다. 여기가 사막기후여서 그런 생각을 한 것만은 아닐 거다. 딱히 문학을 읽어야 사람이 사람같아지지... 라고 주장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이 건네는 것은 역시 딱 자르는 마침표라기보다, '그리고,' 라고 얼굴을 돌려 바라보는 쉼표다. 이건 이렇습니다! 라는 선언문도 좋지만, 가끔은 ...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말을 거는 문장을 읽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와 있었다. 지난번에 얼핏 봤을 때는 이승우 작가, 김중혁 작가, 박상영 작가의 책이 보였고, 그 중 압도적으로 김금희 작가의 책이 많아서(출간됐던 책들이 다 있어서 진심 놀람) 다음번에 아직 못 본 김금희 작가 책을 빌려와야지 마음먹고 갔는데 어째 이번엔 다 대출됐는지 안 보였다.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어렵지 않게 그 누구도 빌렸던 흔적이 없는 깨끗한 새 책을 빌렸다. 뭘 먼저 읽을까 하다가 정세랑 작가의 책을 먼저 읽었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작품은 하나도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낯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보늬>가 특히 좋았다. 황망한 헤어짐 뒤에 남은 이들이 불안하게 붙잡은 손에서 어설픈 위로를 건네고 받기보다, 고통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스스로 찾아내는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곁이고, 그 곁에게도 그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가 필요하다는 이 말은 이 책에서 배웠다.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참 본성이라는 아연한 사실은 마지막 텍스트에서 시선이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고 언어로 소통할 수 없으므로 곁을 지키는 사람들도 점차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가는 까닭에 함께 피폐해져간다는 비통함은 현재 내게 당면한 일이 아님에도 단단하게 마음을 조였다.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는 물음이었는데, 완벽한 답이라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짧은 단편이 실마리를 준다. 그러니까 언어가 필요하다, 라는 선언에서 언어를 아주 좁은 새장 안에 가둬놓고 의미를 제한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슬픔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책 얘기로 시작해서 계속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도, 인터넷상에서 편한대로 끼적대는 잡기장이니까 가능한 얘기니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계속 마구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예술이 바로 그런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화가 난다고 아무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고함을 질러대길 계속하면 누군들 버틸 재간이 있겠냐만 캔버스에 물감을 계속 엎어버리고 치덕치덕 칠하고 또 칠해도 뭐라 그럴 사람은 없을 거다. 

벽면을 꽉 메운 유리함 안에 가늘게 찢어버린 종이쪼가리가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면, 더구나 거기에 어떤 감정을 환기시키는 타이틀이 붙어있다면, 나라면 압도당할 것 같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타인에게 도통 감정이입을 할 줄 모르고, 공감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물리적으로 체험시켜주고 싶다고. 이를테면 밀도라든가, 질감이라든가, 소리라든가, 그 무엇이 되었든 본인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게끔 오감을 동원해서 타인도 나처럼 감정과 감각을 가진 인격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선명하게 깨닫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그거슨 너무나 동물적인 발상이므로 이쯤해두고

 

여하간.

그래서 급 줄이자면 한국이든 여기든 예체능계열 과목을 자꾸만 축소하고 있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싶다는 거.

갈수록 자기표현능력이 중요해질텐데 어째서 왜때문에 그런 스킬을 배양할 수 있는 (더불어 자기 감정조절도 배울 수 있고, 자기파괴적인 성향도 줄이고 창의성도 키우고 비판능력도 기를 수 있고, 뭐하나 빠트릴 게 없는) 과목은 자꾸 없애는가 이 말입니다...

잡담은 이쯤 접고

다시 본문으로 복귀해서,

 

사실 이 잡문을 쓰기 시작한 건 며칠 전이라 지금은 이미 세 권을 다 읽었는데, <시녀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으로 충격적이고 암울해서 책을 손에서 떠나보낸 뒤에도 며칠간을 시름시름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안타깝고 속상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간 다음에 상처를 후벼파는 쓰라림으로 복기했을 때야만 발견할 수 있는, 감정의 충돌 뒤꼍에 머무르다 느리게 걸어나오는 남은 마음들을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을까 싶다.

 

"전 그게 좋았어요. 주인공 둘이 작은 추억들을 나누는 장면이. 너무 이상주의적인이야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같이 견뎠다는 게......" -39쪽

 

나도 알아, 그 마음. 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94쪽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97쪽

 

진희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걸 좋아했다. 주제와 핵심 제재를 파악하는 것이 독서의 전부인 줄 알았던 미주는 진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재미를 느꼈다. -192쪽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209쪽

 

특히,

지금 이 사람이 전적으로 내 편인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들어주고 있(는듯 보이)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를 가지고 후에 나를 상처입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지 않나... 이런 지점을 만나면, 꼭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여기저기 긁힌 기분이 된다. 그렇게, 걸려 넘어져 쉬어가는 곳이 많을수록 그 소설은 내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로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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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서 너무 반가울 때,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건 말건 팔을 붕붕 흔들어 여기, 여기! 하고 소리질러 불러본 적이 있습니다. 경험이 있거나 없거나,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하면 웃어요. 아 그거- 알지. 그렇게 동조해 줍니다.

 

며칠 걸러 한 번 정도 근처 도서관의 신간 서가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책등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요조씨의 이 책을 발견했거든요. 책을 쓴 작가들의 이름 뒤에, 아무 저의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호칭 또는 존칭이 갖다 붙곤 하는데 (제 경우) 요조씨라는 호칭이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네요. 팟캐스트에서 너무 자주 듣다보니 혼자 친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모를 일이지만요. 나이도 나보다 어리니까 안 되진 않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ㅎㅎ

 

 

엄밀히 말해서 출간일을 보면 신간 코너에 있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지만 이 도서관에서는 신참일 수도 있긴 하죠.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것 같고요. 이미 팔에는 과연 대출기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걱정되는 분량의 책이 안겨 있었지만 한 권 더하나 빼나 무슨 차이겠나 싶어 이 한 권을 더 얹어 나왔습니다. 조금씩 나눠 읽기 좋아 보였으니까요. 일종의 쉼표처럼.

그렇게 읽기 시작했는데, 세 번째 글에 이런 문장들이 등장하는 거죠.

나는 아픈 것은 내 팔이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팔은 팔대로 스스로 나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내 루틴을 평소처럼 이어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점점 내 팔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었다. 금방 지치고 피로해지고 예민해졌다.

(...)

이런 멍청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그리고 절절하게 깨달았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주 사소한 아픔이라도 있는 힘껏 피해야 한다.  -52~53쪽

!!! 요조 씨는 팔깁스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일상생활의 기본 1부터 100까지 하나같이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을 겁니다.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그 경험이 몸에 남겼던 몇몇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생면부지(...라는 표현이 맞는건지 이 경우엔 좀 아리송하긴 하지만)의 타인을 순식간에 내 옆의 다정한 친구들과 같은 존재로 끌어당기는 순간은 바로 이럴 때입니다. 그거 저도 알아요. 환장하죠.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지금은, 괜찮으시죠?

 

공감이라는 건 마음만 먹으면 너무 쉽게 만들 수 있는 무형의 교집합 같은 거잖아요.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라포를 형성한다는 웬지 친해지기 어려운 개념도 나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면 여하간 간단히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나가는 관계맺기의 기본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공감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내가 통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니까요.

흐릿한 '누군가'에게서 한 사람의 선명한 인간적인 모습을 읽는다는 건 다시 말해 언제 어느 순간에도 튀어나올 수 있는 공격성(또는 방어성)을 한 단계 낮추게도 해 주는만큼, 공감지수가 높아질수록 상호이해도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해도가 높아지면 인내심의 폭도 커집니다. 사람들의 인내력이 전체적으로 상승하면... 뭐가 좋을까요?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포츠 경기를 볼 때 눈물이 가장 많이 난다. 
... 
선수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 동안 겪은 시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호를 보며 울고 있으면 그들의 시간을 함께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눈물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대가로 내가 세상에 지불하는 동전인 셈이다. -67쪽

 

김중혁 작가님쯤 되면 공감의 아이콘일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에 대해 너그럽고 타인을 이해하는 스케일이 크다면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남의 일이 곧 내 일처럼 느껴질텐데.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의 이분의 일쯤은 이런 이유가 있고요.

 

 

 

 

 

 

 

 

 

 

 

 

 

 

 

 작가에게도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공감이라고 한다.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해 줄 때라는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말이다. -59쪽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까닭이겠죠.

 

 

 

 

 

 

 

 

 

 

 

 

 

 

 

"<와이키키>를 보고 나서 지하철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들, 청소하는 미화원들, 먹이를 찾아서 길거리를 헤매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다"고요. 제가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받고 싶은 피드백은 아마 이런 종류일 것 같아요. 관객들이 제 영화를 보고서,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연민을 갖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애초에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은 그런 거예요. -110쪽

 

 

 

 

 

 

 

 

 

 

 

 

 

 

 

보여주기 민망하다고, 이런 게 무슨 글이냐고, 제대로 풀어낼 자신이 없다고 굳이 내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그 쉼표의 위치와 마침표의 개수까지 모두가 소중한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닌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는 가장 큰 단서가 된다. 나를 고백함으로써 나의 세계를 드러내고 타인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다. 이해, 공감, 소통, 이러한 모호하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감각들은, 서로의 몸에 새겨진 언어를 공유하는 데서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를 쓰고, 타인을 읽어야 할 의무가 있다. -10쪽

 

나와 관계가 없다면 없을 타인들의 일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마음.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까지는 무리더라도 그 마음의 결을 최소한 따라 짚을 수는 있는 마음.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리' 대신 '개인'을 읽으면 좀 더 쉬워져요.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 이름은 오스카 쉰들러라고 하죠. 물론 그가 어떤 인류애적 비전을 갖고 그렇게 한 건 아니라는 게 아이러니이긴 합니다만.

 

 

 

 

 

 

 

 

 

 

 

 

 

 

쉰들러는 히틀러나 괴벨스처럼 악랄한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유대인에게 무관심했고, 그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손쉽게 수탈해도 되는 익명의 대중으로 보았다. 1940년까지, 그가 전쟁이 끝날 무렵이면 목숨을 걸고 거액의 뇌물을 바치면서까지 자기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 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 같은 급격한 전환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이의 어느 시점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쉰들러에게 일어났다.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의 회계사인 유대인 이츠하크 스턴에게서 비롯했다. -101쪽

내 바깥의 세계를 집단화해서 바라보는 시각은 의외로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돼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말하기는 어려워요. 결국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지양해야 할 경향성인데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 이것이 참 힘듭니다. 특히 아이에게 영향력이 큰 주변 어른들 중 어떤 사람이 '더할 나위없이 선량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특정 대상을 쉽게 집단화하는 발언을 하는 성향이 있을수록 어렵습니다. 말한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이것을 교육적으로 바로잡는 데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하는 요즈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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