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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아름다움 - 어느 우정의 역사
앤 패칫 지음, 메이 옮김 / 복복서가 / 2025년 8월
평점 :
나와 특별한 관계였던 어떤 사람에 대한 회고록을 쓰는 건, 그가 죽은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스갯소리지만, 글을 쓰는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류의 말이 있지 않나. 언제 나와의 일이 글감으로 재활용당할지 알 수 없으므로. 솔직히 말해 그 말에 반박할 재간이 없다.
심지어 아주 가벼운 잡담을 할 때 흘리듯 한 이야기조차 저거 쓰면 재밌겠는데, 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재빨리 망태기에 건져놓곤 하니까. 피차에게 슬픈 일이긴 한데, 그게 참… 아무튼 어렵다. 내 경우엔 그거 써도 돼, 하고 꼭 묻긴 하는데, 오래전에 손절한 관계라면 손톱만큼의 양심의 가책은 묻어버린 다음 쓰기도 한다. 에라 보복이다, 하는 정도의 가벼운 기분으로 각색을 덧붙여서. 아무튼.
그렇다면 회고하는 사람과 회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둘 다 작가라면 어떨까. 아, 만약 두 사람이 다 살아 있다면 책이 나온 뒤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데 전재산을 걸겠다.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다. 그러므로 앤 패칫이라는 걸출한 작가 역시도 그의 오랜 친구였던 루시 그릴리가 사망한 뒤에야 이 회고록을 쓸 수 있었을 테다.
나는 앤 패칫을 「벨 칸토」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처연함과 연약한 연대의 정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이 작가에겐 거미줄처럼 연약하지만 섬세한 관계를 읽어내는 눈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에야 아,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구나. 몇 번을 그렇게 내리 납득을 했었는지.
앤 패칫에겐 아주 특별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려서 암 때문에 턱 아래를 절개해야만 해서, 기형에 가까운 얼굴을 가졌던 친구가. 이름을 루시라고 하는 그 친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죽고 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말해, 앤도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도 너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날 것 같아’라는 말을 하고야 말지만, 나라면 진작에 루시를 떠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옥으로 떠밀 수가 있을까. 물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지독하게 외롭고, 괴로웠을 그의 인생을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루시의 곁에 힘겹게 버티고 있었을 그의 친구들을, 앤 패칫의 심경을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감히 루시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는 없기에.
타인과 어떤 한계까지 함께하고 나면 그 타인과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 역시 생겨난다. 그렇게 나는 외로워졌다. -69쪽
루시와 나는 점점 더 다른 모든 이들과 비슷해졌으며,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은 매일 점점 더 물러져서 우리를 조금씩 삼켰다. 아무도 우리 인생을 구해주지 않을 것임을 점차 깨달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하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건 단 하나의 기술이며 그것만이 희망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직업이고 재능이지만, 또한 내가 갈 수 있는 머릿속의 어떤 장소이기도 하다. 그건 오후에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상상 속 친구다. -99쪽
루시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고, 상황이 온통 암울해 보일 때 자신이 내뿜는 환한 빛을 빌려주었다. 나누어줄 빛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빛을 빌려주는 것, 수년에 걸쳐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온 일이었다. -212쪽
나는 루시가 앤에게 어떤 친구였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앤은 이렇게 썼다.
루시를 만날 때마다 마치 내가 그동안 외국에서 외국어를 대충 사용하며 지낸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루시가 나타나 영어로 말을 걸면 나는 갑자기 유창해져서, 그간 내게서 사리진 줄도 몰랐던 복잡하고 미묘한 표현을 전부 다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루시와 있을 때 나는 원어민이었다. -322쪽
이 책은 내가 읽어본 중 가장 감탄스럽고, 가장 피폐한 우정의 연대기였다. 한 피폐한다고 자부하는 나인데도 이 책만큼은 완독하는데 꼬박 2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최대 허용치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었던 one & only 한 피폐한 우정의 본이 읽고 싶다면 기꺼이 추천한다. 책을 덮고 나면 마음에 사막의 바람이 불 테다. 그래도 괜찮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