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갇히다 -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
김성일 외 지음 / 구픽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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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상상력 끝내준다. 


세상에 없는 신선한 방식으로 찬탄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표현력도 달리거니와 그저 모두가 오, 진짜? 정도로 수긍 공감할 수 있게 단순히 감상을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으까... 라고 쓰는 순간, 아마도 하지현 선생님 책에서 본 것 같긴 한데 '헐' '열여덟*나' 로 모든 의사소통이 다 되던 젊은냥반들의 에피소드가 떠오르면서 손이 오그라붙었다. 아... 그나마 '상상력 끝내준다'를 붙여놔서 다행일지. 저는 그 랭귀지패밀리에 끼기엔 좀 연식이 그러한지라.


아무튼...


읽을 책을 고를 때의 내 모습을 머릿속에 재생해 보면 대강 이렇다. 대체로 일단 '읽어야 할 책들' 칸에 꽂아둔 책들을 주욱 눈으로 쓸어본다. 여기서 먼저 골라 읽는 게 맞는데, 이쪽 칸에서 뽑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럼 여긴 왜 사다 메워놓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문이네요. 아마도 비어보이면 좀 쓸쓸하니까...?


그 TBR(To Be Read)칸을 지나 90도로 꺾어지게 놓인 책꽂이로 옮겨오면 이미 안쪽에 꽂아둔 책들은 책등의 존재조차 보이지 않게 사라진 지 오래고 그 앞으로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책들이 빽빽하게 몸을 누이고 있다. 아이고 보는 내가 다 불편하고 좀이 쑤시네. 미안. 도서관 책들은, 당연하게도 대출기한이 있으므로 먼저 손이 닿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인생, 뭐가 됐든 마감이 없으면 진도가 안 나가요. 휴...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달인가 아니면 그 전인가, 신간 프리뷰 적을 때 '오 읽고 싶어!!' 하고 핀해 둔 것인데 마침 도서관의 신간서가에 꽂혀 있더라. 이상하게 내가 읽고는 싶지만 새 책은 그만 좀 사들여야하지 않겠어? 하고 결심하고 난 뒤로(물론 결심은 깨기 위해서 하는 거고)상당히 많은 수의 관심신간들이 우리 도서관에 들어왔다. 

어머 이거슨 웬 우연. 나의 지독한 공상과 기대의 헛발질이지만, 어쨌건 간에 굉장히 땡큐한 마음으로 잔뜩 빌려다는 놓습니다만, 어떤 것들은 허겁지겁 읽고 어떤 것들은 열 페이지 남짓 읽다가 도로 반납하고... 어째 식생활을 이런 식으로 했으면 소화불량에 위염 걸리기 딱 좋은데. 그런 불량한 독서생활을 지속 중이다. 이것도 무슨 큰 병이나 지독한 슬럼프라도 오지 않는 이상 쉽게 낫지 않을 중병 같아 보인다. 


이게 다 무슨 횡설수설인지, 또 각설을 한 번 더 하고 


<책에 갇히다>는 개중 끝까지 다 챙겨 읽었고 재미도 쏠쏠하니 챙겼다. 실속 있는 독서였다고나 할까. 앤솔로지는 늘 카달로그처럼 읽는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저는 카달로그를 그 옛날 영단어 공부하듯 집중 정독하면서 읽는 스따일입니다. *-_-* 

상품 카달로그가 그렇듯 어머 이건 사야해(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 괜찮지만 내 스타일 아니네(이걸로 끝), ... 그리고 뭐 기타등등, 그런 것이다(잔인한 말은 무조건 생략해야한다). 


책과 서점 그리고 이야기에 대해 쓴 이야기들은,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무조건 읽을 수밖에 없다. 이건 나한테만 있는 병은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좀 유난히 혹독하게 걸린 것은 맞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발군이다. 특히 우리가 고전의 반열에 올린 작품들이 부족 탄생 설화가 되어있는 세계의 이야기, 종이책 대신 살아있는 책이 되어 인권이란 게 없는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인간책의 이야기, VR책의 주인공 실종사건 이야기. 이 단편들은 기막힌 아이디어의 승리였고 물개박수를 쳐줄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마음을 준 이야기는 <켠>이었다. 나는 헌책방 이야기도 좋아하고 우리가 흔히 별 자각없이 아무렇게나 쓰는 말들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닦아 반질반질하니 윤을 내고 원래의 색을 입혀주는 단어발굴가(누가 사전덕후 아니랄까봐)를 발견하면, 그냥 막 마음이 다 노글노글해진다. 


이런 책들은 번역돼서 지구상의 적고적은 우리 동족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이야기에 이르러서 이건 안되겠구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 이 미묘한 말과 뜻의 맛을 살리는 건, 이건 번역이 안 되겠지. 앨리스나 팬텀 톨부스가 우리말로 번역됐을때 니맛도 내맛도 아닌 밍숭맹숭한 텍스트가 되어버린 것과 똑같겠... 


뱀발_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 텍스트를 그대로 카피해다 파파고에 한 번 넣어보았다. 파파고의 영작 실력은 50점 주고 싶었... 

조승연 작가가 오래전에 어디 방송에서였나, '번역기 성능이 좋아진대도 우리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뭐 이 비슷한 강의를 했었는데, 맞는 말이다. ㅋㅋㅋㅋ 오밤중에 포복절도했음. 특히 'nyangba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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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읽고 싶었었는데, 내가 알아봤을 때는 분명히 번역서가 없었다. 원서 제목을 그대로 입력하면 역서가 출간됐을 경우 그 책이 뜨던가, 작가 이름이 나오던가 뭐 아무튼 그런 결과가 나오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길래 그냥 원서를 샀더랬다. 아무래도 원서는 역서보다 읽는 속도가 현저히 더뎌지기 때문에, 이미 읽어야 하고 읽고 싶어서 쟁여둔 원서가 내 키만큼(작지 않다는 게 함정) 쌓여있는 까닭에 번역이 있다면 굳이 원서에 손을 먼저 뻗지는 않는단 말이다. 


예약해둔 「키르케」와 「침묵 박물관」을 찾아서 그냥 나오려다 한 번 둘러만 보고 가지 뭐... 진짜 들러만 본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1초간 잠시 경직의 시간을 가졌다. 왜때문에 너는 원서 표지 그대로를 달아서 바로 내 눈에 띄어버린거니. 잠시 당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올라오는 신경질의 스멜. 


뭐... 아무튼지간에 있으니까 너를 읽도록 하겠노라하는 기분으로 뽑아가지고 왔달까

여러가지 이유로, 집에 어차피 사둔 게 있으니까 원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는 게 문제다. 


바바야가 설화를 바탕에 두고 쓴 소설이다. 바바야가는...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마녀(비슷한 존재)인데, 이 이야기에서처럼 다정하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외려 아이들을 잡아먹는, 어쩐지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 비슷한데 훨씬 늙고 음습하게 생기고 공포스럽고 그런 느낌.


열두 살 난 마링카는 할머니가 늘 강조하는 자기의 운명이 몸서리나게 싫다. 그 운명이란 할머니처럼 죽은 자들을 저승문으로 인도하는 망자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마링카는 망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의 세계에서 어울려 살고 싶어하지만 야가인 할머니도, 닭다리가 달린(생명체나 다름없는) 집도 마링카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을 갈망하는 마링카는 결국 금기를 깨고 또래의 죽은 소녀를 저승으로 인도하지 않고 숨겨둔 채 자기의 친구로 삼는 대형사고를 치고, 이 때문에 마링카는 상상하지도 못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만다.


형체는 없되 먼지구름처럼 뭉게뭉게 주변을 떠다니던 욕망이 실체를 띠고 하나의 목적으로 단단하게 뭉치면서 마링카는 어린아이의 시절을 벗어나는 계단을 오른다. 삶의 양면성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아이이니만큼 충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좇던 아이는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해보려는 단순한 시도들이 계속 엉크러지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에 쫓기면서 마지못해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일을 하지 않고서는, 꼬여버린 자기의 앞날을 하나도 제대로 풀 수 없게 된 마링카는 어떤 선택을 할까. 


환상적인 소재로 예쁘게 쓴 소설 같은데 은근히 무겁게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다. 어른 입장에서는 이 철딱서니가 도대체 왜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까, 생각하게 되지만 13-16세의 아이들은 마링카에게 절대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을 거다. 강인한 자아와, 건강한 욕망과, 끝까지 버티는 책임감을 배워야 하는 나이에 읽으면 참 좋은 소설. 


뱀발_

마링카가 언젠가 그것이 할머니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언젠가 그것이 그들의 어른들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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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표지는 독자를 홀린다. 독자가 아닌 사람마저 홀릴 때가 있다. 아주 오래 전 대학생 때 북커버 디자이너를 잠시 지망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게 언제적????).... 꽤 유심히 본다. 표지가 엄청 세련됐다고 생각한다.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를 타이틀이 뿜는 의미와 아주 잘, 단단히 매듭지어놓은 그런 표지다. 그런데, 


작가에게 붙은 각종 타이틀과 전적이 화려해서 기대가 너무 컸다. 음, 나쁘다고 하진 못하겠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했다. 표지처럼은. 이것 역시 아주아주 옛날에 강경옥 작가가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인데,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일수록 충분히 준비된 다음에 해야 한다고(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뉘앙스로 기억하지만, 틀릴 수도 있다. 말했듯 워낙 옛날에 읽은 거라). 그 말이 쟁쟁 머릿속에 울리더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너무 잘 이해하겠다. 시종일관 아주 우직하게 말하고 있는데다, 머리로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잘 이해하겠는데 그걸 전달하기에는 좀... 캐릭터가 힘이 모자랐다. 설득력이 떨어져서 아까웠다. 조금만 더 묵혀 두었다가 썼으면 훨씬 잘 썼을 것 같아서 더 아깝더라. 어쨌거나 앞으로 쓸 소설들도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공감은 가서... 


충격의 대반전도 조금 무리수가 있는 듯하고요. 대반전이라고 하고 싶었으면 거기까지 이르는 길을 잘 닦았어야 했는데 덜 닦였거든요.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깔끔하게 휙 뒤집은 부침개가 되어야 하는데 덜 익은 것을 초짜 부엌쟁이가 엉거주춤 뒤집어보려다 절반은 그럭저럭 뒤집어지고 남은 절반은 반죽이 깨져서 들러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orz  분명 반죽은 엄청 잘했는데... 예술적인 맛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안타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도 말했듯, 심지가 있는 이야기였고 소재도 좋고 무엇보다 누구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불쏘시개를 당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꺼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심하게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되-게 불편한데 정말 이게 뭐지 싶은 건 아예 얘기도 안 꺼내는 법이니까요, 네. 


덧. 

이게 분량이 얼마나 된다고 지난 주부터 쓰다말다쓰다말다했는데 난데없는 눈 통증에 겁먹고 연이어 따라온 이상증세에 어쩐지 이것은 망막박리인것만 같다고 혼자 또 드라마를 쓰다말다하고 온라인 라이프를 모조리 접어버리고 생존에나 신경쓸까 고민도 하다가 어영부영 여기서 줄여버리게 되었다. 원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책이었는데(말이 많아지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개인적인 감정의 풍랑을 겪고 나니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소설이 다 뭐냐, 내 사는 일이 소설 같은데. -_-;;


"자신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타인을 믿는 상황 자체를 못 견디지. 애초에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타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이해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반복하며 경험을 쌓아올려야 하는 거고. 그런 걸 태만히 한 자는 다른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자네가 말하는 합리성은 이 경우 불합리일세. 왜냐하면 나는 나지만 타인은 타인이니."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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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말을 들으면 보호본능과 더불어 나를 공격하는 듯한 위협감을 느낀다. 아니 이제 그런 거 그만 졸업할 나이도 되었지 않나, 생각하지만 문득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전에 나는 정세랑 작가가 좋아,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 '좋다'는 표현이 참 모호하다. 호의를 대충 당의처럼 둘러입힌 말인데 기준이고 설정점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감아 덮은 것 같은 말. 가끔 '좋음'을 명쾌하게 파헤칠 필요가 있지 않나. 아무튼 그 때 나의 발언이 그런 점에서 애매하고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기는 하지만 '그런 류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반응에 그만 아연한 얼굴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 류라니? 그런 類라는 건 대체 뭐지? 

물론 한 작가의 작품들이 어떤 일정한 톤을 띠는 경우는 왕왕 있긴 해. 그러나 이 類라는 말은 말야... 말끔하게 밝혀 말하긴 어렵지만, 그런데 좀 싸잡아 말하는 느낌이잖아? 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이것은 뒷북이로다.


나름 이 바닥에선 유명한 어떤 이가 말하길, 내가 좋아하는 이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하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과 하는 대화가 어쩌면 더 유익하고 풍성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가정하에. 그래서 내가 참 좋다고 생각한 이 책을 박하게 평가한 분들이 쓴 리뷰를 열심히 읽어봤고 그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평가라는 것, 내가 반한 부분에 눈멀어 미처 보지 못한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독서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인 것을, 제대로 체험해 보니 알겠다. 


그러니 호의적으로 두둔하는 경우건 따갑게 비판하는 말이건 그건 제대로 분별해서 밝혀 말해야 하는 거다. 왜 좋은지 왜 싫은지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좋으네 싫으네 하는 것도 우스운거지... 그런데 맘잡고 말해볼라치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진지하게 집중해서 읽어야만 한다. 대충 스토리라인따라 한 번 읽고 말고서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근데 그게 너무 힘드니까 아 난 이 소설 좋았어, 난 좀 별로야, 이 정도 평가(라고 할 수 있으려나)가 난무하는 거겠지. 거기에 일조한 일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정세랑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이것은 어떤 부분에서 무엇이 모자란다, 고 솔직하게 쓰신 분들의 리뷰를 읽다가 깨달았고 수긍했는데 비평의 언어는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 그냥 내 전공분야의 언어를 활용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기성이 아직 조금 모자란 느낌이라고. 적절한 곳에 여백이 있고 여백이 아닌 곳은 긴밀하게 단단히 짜여져 서로를 붙드는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 사이에 긴장과 완화가 있어야 하고 강세가 눈길을 끌어야 하지만 바탕에서 일탈해서는 안 된다. 말만 쉬운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색감도 훌륭하고 패턴도 창의적인데 다만 좀 성기게 짜인 텍스타일같은, 그런 부분들이 좀 느껴진다.


여하간 이제 무엇이 나를 잡아끌었는지를 잊지 않게 써두어야겠다. 


제사, 그놈의 제사. 


여기에 나오는 제사의 형식이 정말 비현실적으로 이상적이었다. 고리타분한 제사 따위 지내지 말라고 한 엄마의 제사를, 10주기가 된 시점에서 한 번은 지내야겠다고 큰딸이 제안하면서 가족들이 술렁인다. 아무렴 내가 전 부치고 지지고 볶는 제사를 지내자고 할까보냐하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굳이 하와이로 가는 이유는, 그곳이 엄마의 인생길에서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인덱스가 되어버린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사, 파격이다. 파격인데 근사한 파격이다. 이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제삿상에 며칠에 걸쳐도 다 먹지도 못하는 기름기 가득한 음식들만 그득그득 올려 지낼 게 아니라 모인 가족들끼리 먹고 끝낼 수 있는 정도의 음식만 마련해서, 고인께 한 사람씩 안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며 근황도 좀 나누고 돌아가신 분 이야기도 좀 하고, 그렇게 보내면 안 될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나는 그닥 제사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사람 모이는 걸 좋아하고 음식 가짓수 많은 걸 좋아하는 특이한 성격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맏며느리로써 이걸 몇 년을 하다보니 여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은 거다. 적어도 제사 준비가 힘들어서, 는 내 핑계가 못 된다. 그러나 이 무의미성은 몸서리가 나게 싫다! 그런 차에 이 소설을 읽으니 눈이 반짝 뜨이지 않을리가 잇나. 쓸데없(다고 굳게 믿는 바다)는 말 좀 읖조리지 말고, 그 의미없는 차례지켜 음복하는 것 좀 생략하고, 그 시간에 둘러앉아 안 그래도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궁금한 어린 것들에게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이시고, 어떤 시대를 사셨고, 몇 분의 자손을 낳고 그 중 몇 번째가 너희의 할아버지(내지는 할머니)시고, 무엇을 직업으로 삼아 사셨는지... 그런 살아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고, 그러면 좀 좋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이지. 


너무 이상적인 얘기만 썼나.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제사라는 형식 자체가 허울로 느껴지고 극심한 노동이라는데 이견을 제시할 생각은 없다. 집안 여자들의 노동력을 쪽쪽 빨아 기어코 각혈하게 하는 그 제삿상이 그리도 필요하면 필요한 자가 직접 할 일이지 안 그런가. 내가 제사를 큰 거부감없이 수용하게 된 건 모두가 사이좋게 노동하는 분위기를 만든 시어머님의 노련함이 한몫했지만, 세상 시어머니가 다 그럴리도 없고 말이지. 아무튼 너무 이상적인 소리라도 누구든 계속하면 거기에 말을 덧붙일 사람은 또 늘어날거고 계속 그렇게 이게 더 좋다, 저게 더 좋다, 그러다보면 점점 진짜 좋은 쪽으로 가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너무 알 것 같아서, 나는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는 아니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뛰어내린 1인에 불과하지만 그 마음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정세랑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 뒤끝 작렬하는 나라서, 내게 그 말을 했던 이에게 이 책을 내밀며 정세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기에 방점을 찍으며)의 소설만 쓰는 작가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까, 그냥 뱉을까를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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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자연스러워지는 쿠킹 클래스 - 요리에 서툰 사람들과 함께한 '진짜 요리' 이야기
캐슬린 플린 지음, 최경남 옮김 / 현암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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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하고싶은 말.


캐슬린 플린의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의 요리를 맛보고 싶어진다.

요리로 치면 과한 재료나 특별한(그래서 호불호가 아주 뚜렷하게 갈리는) 향신료 없이 담백하고 그냥 누구나 집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어 먹는 아주 평범한 것인데 그 평범함은 아주 단단히 다져진 기본기 밑에서 우러나오는 생활에 익은 평범함이다. 그런고로 아무나 이렇게 쉽게 쓰겠다 싶겠지만 이렇게 직업일상적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런 맛이 있는 글이라고 해야할지도. 

요리하면서 글도 쓰는 사람들의 문장에는 공통적으로 칼로 도마를 균일하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소리와 강불에 시어링하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앉아있는 바람에,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허기가 져서 뭔가를 입에 집어넣고 와삭거리는 배경음을 자체삽입하고 읽는 때가 종종 생긴다. 맛있는 책을 맛있게 읽는 비법이라고나 할까.


플린은 어느 날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모녀의 카트에 온통 마음을 뺏겨 은밀히 그들을 스토킹하며 무엇을 카트에 집어넣는지 면밀히 관찰한다. 그 카트 안에 들은 것으로 말하자면 굳이 주워섬길 필요도 없이 온통 인스턴트 식품. 이를테면 인스턴트 매쉬 포테이토라든가 냉동 라자냐라든가, 한마디로 초가공식품이다. 요리를 업으로 하는 플린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때 '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카트였던 것. 그러다 드디어 그 쇼핑객이 닭가슴살 한 팩을 집어넣으며 '비싸다'고 중얼거리는 순간 플린은 잽싸게 '한 마리를 사는 게 훨씬 더 싸요' 라고 참견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마트에서 만난 그 여성도 요리를 할라치면 자신감도 기술도 부족한 것이었다. 그녀는식재료를 저녁으로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요리를 할 수 없다고 하면, 이익을 최대한 많이 남기는 데만 관심을 보이는기업들에 휘둘리도록 자신을 몰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9쪽


플린이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고 생각했던 모녀 쇼핑객은 그녀의 오지랍에 감사하며 마트를 떠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어떤 아이디어를 얻게 된 그녀는 결국 자칭 요리무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 무료 클래스를 연다. 와우... 이쯤되면 보통 오지랍은 아니고 사명감을 등에 둘러업은 혁명가라도 봐도 되겠다. 


적어도 초가공식품에서는 탈출해 보겠노라 원대한 야망을 품은 아홉 명의 여성이 팀이 되어 칼질부터 배운다. 아줌마 경력 16년차인데 나도 이 첫날의 기본 수업에서 칼을 다루는 기본 중에 처음 배운 것이 있었다. 하루 세 번 밥상 내고 치우는 게 주요업무인 나조차도 이랬는데 부엌일과 친할 시간이 없었던 분들은 어떠하리... 


"이렇게 해보세요. 여러분의 냉장고를 열고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은 재료 세 가지만 골라보세요. 여러분이 신뢰하는 요리법 사이트에서 그 세 가지 재료를 넣고 검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과물이 끔찍하다고 한들 그냥 한 끼일 뿐이랍니다." -321쪽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팁들... 소중하다... 내 경우엔 부추라든가 상추라든가 여하간 대략 어마무지한 양으로 사게되는 채소들을 구입하기 전엔 그것들로 응용가능한 음식이 뭐가 있는지 얼마의 끼니 간격을 두고 그것을 상에 올릴지 미리 밑그림을 쫙 그려본다. 이를테면 오징어를 채썰어 넣어 부친 부추전이라든가 양파채와 함께 버무린 겉절이라든가 오이와 서걱서걱하니 버무린 송송이같은 김치라든가 그러고도 남으면 바지락 한 봉다리 부어넣고(해감 필수) 도로록 끓여 부추를 종종 썰어 휙 흩뿌려서 삼남매에게 돌리면... 끝난다. 드디어 그놈의 부추를 (쳐)부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 사전계획이 귀찮기 짝이 없지만 굳이 이러는 건 매번 새들새들해진 부추 반 단을 버리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이고 양심의 가책도 더불어 따라왔기 때문이다. 너 부른 적 없는데... 그런데 이걸 보는 순간 유레카 했다. 이런 건 생각 못해봤는데!


요리는 그저 한 가지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플 때 가져다준 치킨 수프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보살핌이다. 생닭을 사서 처음부터 만들었을 때 전해지는 메시지는 통조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당신은 소중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회복을 돕기 위해 시간을 들일 정도로 당신에게 마음 쓰고 있습니다." 웃음과 마찬가지다. 통조림 속에 박제된 수프의 의미는 다르다. -342쪽


누구나 다 알지만 선뜻 가까운 '남'을 위해 기꺼이 요리해주기가 쉽지 않은 시대여서 그런가, 이 집 식구들 먹이는 것도 고달픈데 뭘 남의집까지 살펴... 싶기도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이웃들을 위해 원래도 큰 손 더 넉넉하게 써서 뭔가를 만들어 나누는 일은 기분이 썩 좋다. 고마워해주고 맛있다 해 주면 더 좋고. 다행히 내겐 친언니같은 인심 좋은 이웃 언니가 있어서 곧잘 된장이라든가 김치라든가 이런 걸 얻어먹기도 하고 나는 대신 간식거리를 만들어 나누는 식으로 되갚기도 하는데 이런 나눔의 식문화가 많이 사라진 건 좀 아쉽다. 나만 아쉬운 것 같기도. 


예측가능한 결말이지만 캐슬린 플린의 수제자들은 다행히도 모두 그럭저럭 끼니 연명을 위한 생존 부엌일의 레벨을 넘어서서 제법 요리를 즐기고 손님 초대도 그럴듯하게 해낼 정도로 레벨업을 한다. 뿌듯하시겠지만 왜 나는 여전히 그 비용이 걱정되는 것인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끝까지 기억나는 것 두 가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생산적이거나 건설적인 활동이 있을 때 인간은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할 수 있다는 거. 

요리 교실을 열었던 장소가 에어컨이 없어 너무 더운 나머지 스탭들이 종종 워크인 냉장고에 틀어박혔다가 나오곤 했다는 거... 이거 너무 신박하지 않습니까? 일반 가정에는 택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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