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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주인공이 처하는 역경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마음이 쪼그라들다 말다 무너져내리다 말다, 이런 증상을 자주 겪으시나요? 대답이 예스라면 이 책을 권하지 않습니다. 힘들어요... 


이 책의 독자로 지내기가 정말 무진장 괴롭습니다. 도대체가 한순간도 마음이 편하게 넘어가는 챕터가 없어요. 어쩌면 있기도 할 텐데,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되고요. 왜냐하면 정말 이 주인공이, 그의 antagonist 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적국의 왕이 낮춰 부르는 호칭 boy king에 걸맞게 새파랗게 어린 소년이면서 벌이는 사건의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왕으로서 자국민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태도는 훌륭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서는 정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거든요. 암살자를 보낸 음모의 소굴에 직접 뛰어드는 건 기본이지요.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것은 종종 주변국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나라의 왕으로서 대단한 자질이지만 그 불굴의 의지는 타고난 반골 기질에서 비롯했기에 소년 왕을 보위하는 그의 친구들과 최측근들은 속이 타서 환장하는... 그런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더불어 책장을 넘기던 독자도 같이 괜히 애먼 책을 붙들고 앞뒤로 흔들수도 있어요. 아 제발, 좀 이러지 좀 말자. 응. 내가 숨이 넘어간다. 6학년인 작은 아이는 책을 읽다가 던져버리고 싶었대요. 그렇게 재미가 없었냐고 물어보니까 그게 아니고 화가 나서 속터질뻔 했다고... 


번역됐던 1권만 보신 분들이라면 2, 3권을 마저 읽으시길 권해요. 특히 2권이 제일 흥미진진했네요. 아이 말마따나 열도 좀 받고 이 주인공이 벌이는 사건사고때문에 엄청 쫄았다가, 한 챕터만 더 읽자. 한 챕터가 뭐 이렇게 짧아. 조금만 더 봐야지. 그러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말았거든요. 스포일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이상 언급할 수가 없는 사실이 좀 안타까워요. 특히 주인공의 성격 때문에 자주 발생하는 구타와 폭력과 통증의 묘사가... 너무 과하게 사실적인데다가 왜때문인지 같이 두드려 맞은 듯 온몸이 아파지는 부작용이 있어서 저처럼 한번에 몰아 읽는 것은 안 좋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이 괴로워요... 이렇게 시리즈 내내 폭력에 시달리고 음모와 배신에 휘말리는 복잡한 인생을 사는 주인공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박진감 넘치는 대신에 요상하게 심신이 피곤해지거든요.


이 시리즈(The Ascendance)의 4권은 올해 10월에 출간된다더군요. 오늘 3권을 다 읽고 보니 작가가 남긴 후기의 내용도 그렇고 원래는 트릴로지로 끝낼 예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어쩐지 4권이 억지로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 걱정도 생기네요. 사실 내용만 보면 3권에서 딱 매듭지어지는 느낌이 아주 강해서요. 어쨌거나 뭔가를 다 잊게 해 줄 정도로 빠져들 것이 필요할 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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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로 말하자면 하루 삼시세끼를 떡볶이로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도 떡볶이를 못 먹는 날들이... 대략 일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죠. 뭐 외국에 나와 있어도, 요즘 세상에 한인마트가 멀어봤자 뭐 얼마나 멀겠는가... 재료도 다 조달 가능할텐데, 못 먹을 이유가...? 할 수 있지만, 네 못 먹었습니다. 아예 못 먹은 건 아니구요, 그냥 좀 몹시 성에 차지 못하게 어쩌다 한 번 먹었달까. 재료 수급의 문제보다, 원래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라서 말입니다. 떡 혐오자와 살고 있거든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입맛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최고의 편협함과 쪼잔함을 겸비했달까. 아놔. 뭐 물론 크게 신경 안 쓰고 그냥 해 먹고 치워버리는 일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참... 다음 끼니까지... 그 궁시렁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엄청나게 긁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기거든요. 사실 좋은 점이 더 많은 분이신데 ㅋㅋ 적당히 흉봐야겠군요. 아무튼. 



이퍼브가 서비스를 종료하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잠시 멘붕이 왔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필요한 건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는 의지가 충만해지는 성격 덕분에 힘들게 뭐를 설치하고 깔고 구동시키고... 별 난리를 치고 결국 크레마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리고 기념삼아(??) 구입한 전자책 한 권. 글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좀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못 볼 정도는 아니더라고요. 

뭣보다도 정말 재미있어서. 


여기서 재미라는 건 그냥 깔깔 웃고 물개박수 좀 치고, 아 재미있었다- 할 때의 그 재미와는 좀 다른 성분의 재미였고요. 그, 뭐지. 왜 음식을 소재로 한 책들은 굉장히 많은데, 그 책들(솔직히 기억에 남아있는) 대부분은 여러 음식들을 거론하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눈 앞에 수평적으로 쫙- 펼쳐진 거대한 만찬 테이블이 떠오르거든요. 그런데 제목에서 읽히다시피 이 책은 떡볶이를 갖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원래 연상을 굉장히 잘 하는 타입이라서, 이미지가 없어도 눈 앞에 그냥 막 그림을 그리면서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뭐가 떠올랐냐하면요. 


그... 책에서도 언급된 바 있고 떡볶이 좀 먹었다 하면 누구나 알 법한 연초록의 멜라민 접시가 산더미처럼 높게 쌓여져 있고, 이 책 표지에 그려진 순정만화틱한 캐릭터가... 열심히 그 멜라민 접시를 기어올라가면서 급기야는 제일 꼭대기의 접시에 그득히 쌓여있는 떡볶이 무더기에 의기양양하게 깃발을 꽂는... 그런, 어이는 없어도 좀 귀엽게 우스운 그림이 떠오르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또 어째서인지 그 캐릭터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요조씨라는 혼자만의 확신이... 그리고 떡볶이의 정상에 기어코 깃발을 꽂은 신요조님의 위풍당당한 포즈에서는 의심의 여지없는 고수의 향기가. 


웃기는 소리를 했지만 이런 엉뚱한 상상처럼 내용이 마냥 코믹하진 않습니다. 


특히 폐업을 염려한 저자의 문자에 답장을 보낸 박군네 사장님의 답문과 영스넥 주인 아주머니와의 인터뷰는, 마음이... 그냥 짠해져요. 타인의 염려를 고마워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남의 고통을 안다고, 불량스럽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아이들에게 괜스리 마음을 한 번 더 써 주는 그런 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요. 

역시 주연인 떡볶이는 곳곳에서 맛을 갈아입으며 제 기량을 뽐내고 있지만 그보다, 역시 떡볶이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여기서 등장한 달인들의 떡볶이를 꼭 맛보고 싶기도 하고요. 


도대체 떡볶이를 잘 만드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가요. 점심에 떡볶이를 해 먹어야 하려나. 남편이야 뭐라건 말건 (아니 왜 남편 회사는 계속 재택근무를 시키는 걸까요????!!!!!) 우리집에는 떡볶이 애호 인구가 절대 다수니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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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의 아이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1
낸시 파머 지음, 백영미 옮김 / 비룡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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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적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사실 리뷰가 뭐 별건가요. 그냥 무슨 책을 읽었는데 대강 이러저러한 내용이었으며, 어떤 인물들이 등장했고, 이런 인물은 있을 법하지만 저런 인물은 너무 작위적이고, 다 마음에 들었는데 요런 부분이 에러여서 실망했고 반면에 어떤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작가의 책은 다음에도 또 읽어볼 것이다, 아니다. 이런 골조로 쓰면 되지, 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늘 생각 같지가 않아서 일주일에 한 권만이라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써 두자, 싶었는데 그나마도 지키는 게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에휴, 계획만 거창한 인생. 


여하간! 그렇게 대충 모양새를 엉성하게 세워놓은 그대로 쓸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인상적이었던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이나까... 


어제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중학생 아이들이 놀자고 징징댈 리는 만무하지만, 초등2학년인 꼬마는 안 그래도 친구도 못 만나고 학교도 못 가고 갖고 놀 것도 별로 없고 심지어는 새 이야기책이 읽고 싶은데 책마저 없어서 입만 열면 엄마 놀자, 게임하자가 입에 붙어 있어서 10분도 책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 애 앞에다 넷플릭스를 켜 놓고 옥토푸스인지 옥토넛인지를 줄창 틀어주고 시리즈가 끝난 뒤에는 저리 가서 알아서 놀아! 를 외치며 파리 쫓듯 팔을 휘저어 밀어 내며 (아들 미안...) 읽었으니 페이지 터너라고 할 만 합니다. 


줄거리는 이래요.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는 아니지만 마치 엄마처럼 자기를 사랑해주는 어떤 아줌마와 함께 살아요. 그녀는 아이에게 절대로 남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되고, 집 밖에 나가서도 안 된다고 다짐을 둡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아이는 집을 벗어나서 바깥사람들을 만나고, 영문도 모르면서 뜻밖에도 어느 저택의 아주 구석방에 감금되고 맙니다. 짐승이라 불리며 짐승같은 취급을 몇 달간 받으며 실어증까지 걸린 채 감금 생활을 이어가던 아이에게 엄마와도 같았던 아줌마가 다시 나타나며 너를 구해주마 약속합니다. 그러면서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너를 구할 수 없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며칠 뒤 아줌마의 호언장담대로 아이는 짐승우리 같던 그 곳에서 구해지고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첫눈에 호감이 가며 절로 애정이 샘솟는 친절한 노인을 만납니다. 자기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친절하고 살가운 노인을, 아이를 구박하고 때로는 증오하는 태도로 대하던 저택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죠. 노인은 아이의 아줌마, 셀리아가 부르는 애칭 '미 비다(나의 생명)'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하며 본인도 아이를 그렇게 부르며 아껴주고 위해줍니다. 훌륭한 교육도 시켜주며, 맛있는 음식도 먹게 해 주고, 아이에게 저택의 사람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경호원도 붙여줍니다.


아이는 점차 노인이 왕과 같은 위세를 가지고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뒤에서는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을 눈치챕니다. 마치 자기에게 하는 것처럼. 아이도 노인의 옆에서는 노인과 같은 입장이 되지만 돌아서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그리고 그 이유는 순식간에 드러납니다. 주인공 아이는 이미 140세가 넘은 노인의 클론으로서, 청소년이 되면 그에게 치명적인 장기를 내어주고 생을 거두어야 하는 운명이니까요(책 뒤표지에 이미 나와있는 내용이고요...).


여기까지가 전반부의 내용이죠. 정말, 순식간에 사람을 끌어오는 매력이 있어요. 문장이 쉽고 깔끔하고, 거창한 수식이나 비유법은 최소한으로 절제돼 있어서 외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건 읽는 쪽입니다. 그런데... 클라이막스까지는 너무 좋은데 이야기의 매듭이 너무 약한 점은 조금 아쉬워요. 바람 빵빵하게 잘 불어놓은 풍선이, 어느 순간 퍽 터져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맥없이 바람이 빠져버린 기분이랄까요. 아니면 이건 뭐지 싶은 기분인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는 물론 작가 마음인데 비범한 이야기가 평범한 요정 대모가 나타나는 페어리테일처럼 끝나서 아주 조금 속상합니다. 


캐릭터는 되게 매력있어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주인공은 그럼에도 자신을 세상에 있게끔 만들었던 악인 마약왕 노인에게 대한 일말의 애정을 갖고 있죠. 왜곡되고 비윤리적인 마약왕 노인은 눈 앞에 살아있는 자신의 유년이라 여기고 왜곡된 애정을 베풀었던 클론들을 희생시켜가며 불멸을 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불멸을 탐한 것이 아니라 소멸을 피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마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 애는 용서해 줄 거야. 마리아는 착한 아이니까."

셀리아는 말했다.

"난 사과했어."

마트는 간신히 말했다.

"그런데 그 애가 그걸 안 받아 줬구나. 그래, 그런 일도 가끔 있지. 우리는 가끔은 진심을 보여 주기 위해 무릎 꿇고 엎드려야 할 때가 있단다." - 245쪽


자신은 멍청한 짐승이고 그래서 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애는 용서해 즐 것이다. 하지만 탬 린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을 기대했다. 마트는 깨달았다. 인간이란 용서하기가 훨씬 힘든 존재라는 걸.

- 273~274쪽


그리고 톤톰은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는데, 마트가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톤톰이 파수꾼들의 방 청소와 설거지를 도맡아하기 때문이었다. 마트는 파수꾼들이 톤톰의 출입을 허락한 것은 톤톰이 우둔해서 눈에 보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걸 간파했다.

하지만 셀리아가 자주 말했다시피, 어떤 사람들은 둔해서 생각이 느릴지는 몰라도 일단 생각을 시작하면 아주 철저하게 파고든다. 마트는 톤톰의 말에 귀 기울이는 동안, 톤톰이 멍청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톤톰은 파수꾼들의 행동거지에 대한 관찰과 공장의 기계류에 대한 이해에서는 지적인 정신이 느껴졌다. 톤톰은 단지 자신의 의견을 갖는 데 신중할 뿐이었다. - 589~5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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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피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9
메리 E. 피어슨 지음, 황소연 옮김 / 비룡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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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어떤 독서가이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있는 어떤 엄마가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좋은 책은, 그 책이 어떤 책이건 간에 나이에 상관없이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것도 쉽게 그러하다, 아니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요. 

YA- young adult,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청소년 소설'이라는 범주로 묶고 있는 듯한데,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소설은 막상 제가 그 연령대였던 시절에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아예 그런 이름이 없었던 것도 같고요. 즉 청소년 소설이라는 걸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나서 제대로 읽어보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본의 아니게 약간 '......'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닐 거예요.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분의 말마따나, 좋은 이야기는 그것이 누가 읽었으면 좋겠다라고 상정하고 쓴 작가의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든 호소하는 바가 있더군요.


이 책에는 서스펜스가 조금, 아주 약한... 소금간 정도의 서스펜스가 들어 있습니다. 딱 아이들이 감당하기 적절한 수준으로요.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청소년' 얘기지, 현실의 청소년 감각으로는 서스펜스라고 부르기도 유치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야기는 어떤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뒤 일 년 반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소녀가 주변 세계를 탐색하고 재인식해 나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시작됩니다.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주인공 제나는, 도대체 왜 어떤 것들은 이토록 생소한지, 그리고 왜 갑자기 어느 순간에는 기억이 물밀듯 차 올라오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천천히 다시 세상에 적응해 나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의문이 쏟아집니다. 왜, 왜 저것은 저렇지? 이건 이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듯한,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환청 같기도 하고 절규 같기도 한 이것은 뭐지? 제나는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다 기억해내지 못했는데. 간헐적으로, 그러나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억은 제나를 더 어지럽게 만듭니다. 제나는 지그소 퍼즐처럼 흩어져버린 기억의 파편들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반응'들로 자꾸 자신을 괴롭히는 뭔가를 유추해 나갑니다. 


청소년 소설이니까 그 과정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충격적입니다. 사랑을 옳고 그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평가의 잣대는 뭘까요.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면 그건 어느 지점부터인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식은 부모의 사랑에 응답할 의무가 있을까요. 부모는 자식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걸까요. 


결정적 스포일러가... ▼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이 기거하는 곳은 어디이고, 마음이 사라진다면 생명은 의미가 없는 걸까요? 신체와 정신이 정체성의 지분을 똑같이 나누어 갖는 걸까요?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실리지는 않을까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꼭 선택해야만 한다면, 현재의 '나'를 더 많이 점유하고 있는 것은 정신일까요, 신체일까요.


사랑과 집착의 경계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행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백업을 없애려는 제나와 제나를 지원하는 릴리, 백업을 보존하려는 제나의 부모. 어느 쪽이 인간적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본이 아니지만 고유해지고자 하는 제나의 욕망. 그건 인간적일까요? 제나는 인간일까요? 


'나'는 '나'의 영역을 어디까지 손대고자 하는 타인(부모 포함)의 욕망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가 제가 떠올린 의문입니다. 아마 퍼낼 수 있는 질문은 더 많을 거예요. 


이 책은 정체성과 고유성, 개별성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것도 쉽게 대답할 수 없어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책입니다. 

 

펼친 부분 접기 ▲


많은, 정말 많은 말할 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들어 있어요. 중학생 이상의 아이에게라면 꼭 추천하고 싶고요. 자아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할 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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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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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재미있게 읽었으나 굳이 리뷰를 쓸 생각이 안 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무슨 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굳이 여기에 보태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딱히 밝혀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읽기만 해서 그렇기도 하고, 뭐 그런 이유들이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선뜻 리뷰를쓸 마음이 안 생겼던 것도 그래서이기도 하고요. 이 책도 그렇게 묻어두고 싶었는데 마침 이야기할 적절한 계기가 생겨서 몇 줄 써두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요새 뉴스마다 난리였죠. 코로나 바이러스와 선거 얘기를 젖혀두고 가장 뜨거웠던 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착취 동영상을 상품화해서 이윤을 챙긴 범죄자에 관한 소식이 매일같이 포털 메인을 열었습니다. 음... 이런 류의 인간들이 어떻게 어린 여학생들을 끌어들이는지를 본의 아니게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비슷한 인간들일 거예요. 첫째 딸이 굉장히 대담한 반면에 둘째 딸이 필요 이상으로 심약하고 겁이 많은 성향입니다. 첫째 아이는 의심도 많아서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나 도착한 메시지는 상대도 하지 않는데, 둘째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일년 전쯤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아이가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이는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왜 남의 전화에 멋대로 전화를 걸어놓고 받을라치면 끊고, 또 끊고, 누구시냐고 묻는 문자는 다 씹어버리느냐? 목소리 보니 어린 여학생 같은데, 이러는 거 나쁜 짓인거 몰라요?" 라고 대뜸 호령을 했어요. 당연히 아이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다만,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이를 야단치고 을러대기 시작하니까 겁이 많은 아이는 내가 실수로라도 그랬나? 하고 겁에 질리더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 아빠가 화가 나서 전화를 뺏어 끊어 버렸습니다. 보호자가 옆에 있는 줄 몰랐겠지만, 이 작자는 다시 전화를 걸더니, 남편이 받은 줄도 모르고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는 겁니다. "너, 함부로 남의 전화에 막 장난 전화 걸고, 끊고, 내가 경찰에 신고한다" 라고요. 아이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아빠가 응대하니까 횡설수설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리고 욕으로 범벅을 한 문자를 몇 통을 보내더니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더라고요. 그 사건이 있고 바로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아이 핸드폰도 해지하고 뭐 그랬습니다만, 요즘의 뉴스를 보다 보니 그 사건이 기억이 났어요. 패닉하기 쉬운 성향의 아이들이 이런 인간들의 같잖은 수법에 걸려 들어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거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가리겠습니다 ▼

여하간,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인간들도 쓰레기지만요. 이런 걸 컨텐츠라고 소비하는 인간들도 못잖게 쓰레기인데 왜 그들은 물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한둘이 아닐 겁니다. 청원인수가 그 사실을 증명하죠. 그리고 또 어떤 어르신이 그러셨다면서요. 누가 무슨 청원을 한다고 그걸 어떻게 다 법으로 만드냐고 했다던가? (사실 확인은 안 했습니다)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듣는 순간 자동으로 이 책이 떠오르더란 말이죠.

아, 왜요. 켕기는 게 있으신가. 


물론 법이라는 게 전체 국민의 몇 퍼센트가 원한다고 그렇게 뚝딱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청원이라는 게 어떤 정서에서 자라 올라온 건지 조금이라도 감안할 수 있는 공감력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거죠. 그러니까 찔리는 거 있으세요? 라는 비아냥이 메아리치는 것도 인지상정인 겁니다. 힘 있는 사람, 그들이 켕기는 짓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을 감추고 싶어할 때, 우리는 어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정말 스케일이 큽니다.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의문이죠. 저들은 왜? 그런데,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기 때문에 소설의 끄트머리는... 이해는 하지만 정말 속상하게 해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은연중에 내리누르는 압박감으로 인한 비자발적인 동의로 DNA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상적인(?) 잠재적인 범죄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이 구축된 사회가 배경입니다. 주인공은 그 시스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며 시스템을 맹신하죠. 이 시스템이야말로 범죄율이 0%에 가깝게 내려가도록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해 줄 핵심적인 인프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맹목적인 믿음이 삶을 배신합니다. 주인공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어떤 설계가 이제 자신을 죄어오는 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시스템의 가장 내밀한 설계자이며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던 피해자들. 그들이 공표하려고 했던 데이터의 비밀은 무엇이며 왜 시스템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주인공은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을까요.


이것이 이 책의 제일 주요한 미스터리이고 이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혈압이 급상승하면서 스리슬쩍 묻혀버린 어떤무슨어떤 사건들과 또 어떤어떤 분들이 막 생각나는 건... 보너스로 따라오는 빡침입니다. ㅎㅎㅎ 아무튼, 재미있고 시의적절하며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인 것은 분명해요.  

도로 접을까요 ▲


한마디로 통제가능한 사회란 건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거고, 데이터는 평등하게 열람되어야 하며, 그렇다고 또 살아 움직이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유기체를 데이터화하려는 시도도... 그게 빅데이터건 뭐건, 좀 적당히들 해 두어야 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하는 책입니다. 제목이 되게 애매하게 단호한 느낌이네,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스포일러네...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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