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괜찮은 게 맞을까.

나는 종종 눈에 통증을 느끼는데, 지나치게 눈이 피곤하고 힘든데...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해보면 '실로 아무 문제 없으십니다'라는 이야기만 듣고 온다. 스크린을 보는 시간을 극도로 줄여서 하루에 한 시간을 채 볼까말까 싶은 생활을 한 달 남짓 지속해 보면 이게 또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 아야 정상인데, 맨날 애들이랑 집에서 (누군가는 집에 있는 학교 스케줄이란... ㅋ)부대끼다 보면 모니터로 통하는 문이라도 열고 바깥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하면 이건 뭐 정신병 걸리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된다. 

열 다섯인 첫째, 열 셋이 둘째가 번갈아 집에 있는데(아홉 살 막내는 매일 등교한다. 그나마. 만세)여기까지만 말하면 대부분 아 그래, 중2가 사람 미치게 하지 그러고 말을 받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희 집에선. 


우리 중2님은 중2가 맞나 싶게 평온하고 어른친화적이며 몹시 교과서적인(물론 어느날 손바닥 뒤집듯 증상이 발현될 수 있음은 알지만)태도와 사고방식으로 학교에서도 이름을 떨치는데, 이 2호께서 종종 중2병에 비견되고도 남음이 있는 발작적 신경증으로 집안을 종종 뒤집어 놓는다. 때이른 사춘기인가 싶기도 하고, 무슨 사춘기가 이러냐, 이건 미친개 시즌이지... 라고 씹다뱉듯 말했더니 기저귀 찬 시절부터 이 아이를 보아온 이웃 언니가 밖에서 착하게 잘 하느라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 거란다. 뭐래... 밖에서 백날 잘하고 제 부모한테 이따위로 하면 그게 잘 하는 거야? 라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막 웃으면서 나의 십대 시절을 반추해 보란다. 정색하고 말씀드리건대 저는 진심 저러지 않았거든요. 아이고 조상님, 이건 분명 바깥양반댁 핏줄일 겁니다. 라고 앓는 소리를 중얼거리니 이 입만 살아 나불대는 2호 왈, 자기는 쇼펜하우어의 염세론 실현버전이라고. 이 색기가 정말. 



꼭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여즉 그냥 내가 지금 견디고 있는 상황이 너무 힘에 부쳐서 거기에 심적인 부담감을 더 얹을 엄두가 안 난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두었다. 이제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 



그 옛날의 전화번호부처럼, 집집마다 꼭 하나씩 비치해두어야 하는 그런 책일 거다. 분명히. 내가 돈만 넘쳐흘렀어도 아는 집들에 한 권씩 다 사서 꽂아넣어줬을 거다. 지금은 그냥 작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열심히 차곡차곡 모으는 일밖에 하지 못하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https://ppseoul.com/mill



나는 책에서 위로와 공감을 찾는 주의지만, 책장 한 장의 무게가 천근 같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꼭 필요한 지침서가 아닐까.



나무가 좋다. 근교에 나무가 울창한 (도심치고는) 곳이 가까운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에 대해 쓰고 그린 거라면 뭐든지 좋다.



이런 기획물 취향 아닌데, 어쩐지 여기서는 내게 필요한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거? 여유, 절대적인 여유. 뭔가 아닌 행동과 태도와 말을 들었을 때도 격조있게 (하아...) 화내기 위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법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같이 있지 못해도, 서로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어도,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도 언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함께 기분좋은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을 듯한 그림책. 사실 지금 우리 막내에게 이런 방법론이 제일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람은 오롯이 혼자일 때 타인과 가장 진솔하게 만날 수 있다. 집단과 집단으로 만날 때 이데올로기가 부딪히고 개인의 인간됨과 존엄성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장 첨예한 대립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두 집단 간에 과연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하는 마음이 든다. 먼저 한 '사람'으로 다가서려 노력한 저자의 애씀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서라도 뽑아보고 싶어진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마음을 모으고 이야기를 건네며 한 시절을 건너오게 마련인가보다. 그게 전염병의 시대라고 해도. 



말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니 말을 풀이하는 책도 그래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책들이 굉장히 구경하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가뭄에 콩나듯이라도 이런 책들이 나와주면 반갑고 손잡아주고 싶고, 그런 기분이다. 



나는 이런 책을 정말 좋아한다. 번역이라는 직업인의 세계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게끔 도와주지만, 그에 더하여 제대로, 바르게, 충실하게 읽는 일에 대해서 살펴 일러주는 책들. 이 책 한 권으로 꽤 밀도있는 지식을 두 분야에 걸쳐 얻을 수 있음이 목차에서부터 바로 읽힌다. 이런 게 남는 장사인 것. 



산다는 건 뭘까. 많은 작가들이 그만큼 많은 책들로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 좋은 삶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서 표현하는 좋은 삶에 대한 제가끔의 정의들을 모아 놓으면 정말 잘, 사는 방법이 뭔지 알게 되는 걸까? 



너무너무 불편해 보이는 책이다. 아. 늘 책을 읽을 때면 기꺼이 좋아서 당겨놓고 읽는 책이 읽고 불편하다 불편해, 문장에 체할 것 같네, 이러면서도 꾸역꾸역 집어삼키게 되는 책이 있는데 결국, 어디서 누군가 말했듯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키우고 인간으로서의 나를 확장시키는 것은 불편한 사실들을 다루는 책이다. 



여행의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내게도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여행의 습관이 있고 남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여행 방식은, 관광명소도 사진도 기념품도 아니고 그저 그 여행지에 녹아있는 오래 묵은 시간들과 공간이 엮은 문화와 역사를 자기 안에 살려내는 것인가보다. 좀처럼 쉽게 흉내낼 수 있는 방식이 아니어서 그냥 감탄만 하겠지만,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눈이 조금 괜찮아졌다고 유튜브에 빠져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보니 재미는 있는데 시간을 공중에 잿가루로 만들어 뿌리고 있는 느낌적 느낌이 과하게 강렬해진다. get back on trac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한 달 전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아는 모든 '지인'의 범주에 드는 읽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라고 느닷없이 권유를 했다. 고맙게도 내가 권하는 책을 꼬박 읽고 감상을 전해주는 이가 하나 있는데, 이렇게 물었다. 


"물론 괜찮긴 했는데, 어떤 점에서 이걸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는지 진짜 궁금했거든. 왜 좋았어?" 


이 질문에 어떤 명쾌한 대답을 주진 못했다. 애시당초 무 자르듯 한두 마디로 재단할 수 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일 수 있을까? 다만 내게,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소설도 이만큼의 결과 깊이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훌륭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소설이다. 어떤 인물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선하지 않다. 세상을 나눠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미혼모이면서 예술가인(포토콜라주를 주로 작업하는 듯한) 미아가 10대 딸을 데리고 리처드슨 부인의 세입자로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은, 지루할 정도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극도로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미아 모녀를 규정짓는다. 엘리너 리처드슨은 자신을 '베푸는 자', 미아를 '수혜자'로 정의한다. 미아는 엘리너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지만, 모르는 척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아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정의, 믿음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미아의 정신적 척추를 위협하는 제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까짓 자선가 놀음, 맞춰주면 그만이지. 아마도 그게 미아의 본심일 것이다. 엘리너는 자신이 있는 자로서 너그럽게 처신했다는 허영심에 충분히 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위선적인 평온이 흐르는 이 거리의 풍경은 그럭저럭 유지됐을 거다.


미아의 딸은 자신의 모녀가정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적 풍요로 채워진 리처드슨 가에 매혹되고 리처드슨 가의 아이들은 비자본주의적 풍요를 누리는 미아와 펄의 집에 흐르는 분위기에 매료된다. 그러나 초반의 이 화기애애한 풍경이 흐르는 동안에도 읽는 이들은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가 군데군데 흩뿌려지고 있는 것이 행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쯤 가면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기가 쉽지 않다.


이제 티딕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한 아주 미미한 불씨지만, 모두가 여기에 기름을 끼얹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속도를 내어 갈등의 봉우리로 달린다.

엘리너의 친구 부부가 버려진 중국인 아기를 입양하려는 절차를 시작하면서, 미아는 우연한 기회에 그 아기가 자신의 중국인 동료가 되찾고 싶어하는, 그녀의 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아의 개인적 신념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미아에게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못할 자신이 믿는 정의가 있다. 그 믿음을 위협하는 이는 누구라도 미아의 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기를 입양하려 하는 친구의 편에 선 엘리너와 아기를 엄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는 미아는 적이 되어 마주보지 않을 수 없다. 


미아와 엘리너가 빚는 갈등의 원인은 밝혀보면 극히 단순하다. 내가 옳다는 믿음. 그런데 그 믿음의 근거는 뭐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절대적 정의라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행위가 불러 일으키는 문제들이 점점 커지는데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감정이 생각의 구역을 침범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정신 승리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다.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비구름처럼 감정이 증폭되면 대개 감정은 부정적으로 발산된다. 이성적 시스템은 통제구역을 통솔할 능력을 상실하기 일보직전에 놓인다. 이쯤 오면 스파이더맨의 그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하고 싶어진다. Great power always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강력한 믿음에는 강력한 회의가 필요하다. 


정리.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어디에도 취하지 않고 명료한 사고를 유지하기를 요구하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그게 내가 많은 책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했던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을 만나면 아마도 측두엽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부위를 지긋하게 누르는 순간이 온다. 마치 거기를 누르면, 파워램프가 깜빡이면서 기억해내라_빨리좀기억해내라고.pdf 파일이라도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책들은 책 자체로 기억되고, 어떤 책들은 다른 책들과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책들로 기억된다. 



나한테 이 책은 그런 책... 다시 말해 다른 어떤 책들에게 손을 뻗게 하는 책이었던가보다. 

『살면서 가끔 괴로울 때 그 책을 다시 읽는데 그냥 나한테는 그런 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는 문장이다. 괴로울 때 다시 읽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 나한테는 뭘까. 



아... 마지막 책이 잘 안 보이네. 오지은 씨의 「익숙한 새벽 세 시」인데.



어디서나 참 많이도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이 책이 열 여섯살의 나를 지금까지 독서가로 살게 한 책이면서, 힘들고 가라앉을 때마다 다시 읽게끔 하는 그냥 그런, 일 번 책이다. 페넬로프 킬링 부인에게는 세 남매가 있다. 대놓고 속물적이고, 조금 뻔뻔하고, 툭하면 자기연민에 빠지고 감정에만 충실하게 사느라 자식들로부터도 남편에게서도 그닥 존중받지 못하고 사는 중년의 맏딸 낸시, 항상 엄마의 편에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는 둘째 올리비아, 아버지를 꼭 닮아 삶의 겉쪽에 치중하고 사는 듯 보이는 막내 노엘. 어느 날 페넬로프는 자신의 삶 전체라고 해도 좋을 아버지의 유작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빚어진 가족간의 갈등과 페넬로프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된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에지간한 자기계발서나 행복전도서보다 낫다, 고 나는 생각한다. 치에코 씨와 사쿠 짱은 아이 없이 둘만 사는 부부다. 그들도 딱히 유별난 삶을 사는 건 아니어서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다투기도 하고 밥 먹으러 나가 처음 가 본 식당에서 메뉴를 성공적으로 고른 것으로 굉장히 기뻐하면서, 그렇게 우리와 비슷하게 소소하고 시시하게 (!) 산다. 

그러나 치에코 씨에게는 대단한 재능이 있다. 소소시시한 일상에서 항상 뭔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거리를 찾아낸다. 내지는 뭉클해할만한 것을 찾아내고 아주 잠깐, 감동한다. 그러라고 가르쳐 주는 책을 보면 웬지 반감이 들지만, 치에코 씨가 행복해하고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같이 즐거워진다. 



오지은 씨를 TV에서 봤을 때, 굉장히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활기찬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후에 이 에세이를 읽었을 때 그만큼 역으로 놀랐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지만, 이 사람의 그림자는 유난히 불투명하게 짙은 회색이고, 아주 두꺼웠겠구나...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덮어놓는 방법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덮어 가리는 쪽을 선택하겠지만 오지은 씨는 밝은 곳에서 직시하는 쪽을 골랐다. 이제는 바삭바삭하게 말라서 어쩌면 얇아졌을 수도, 투명해졌을수도 있겠다. 책을 덮고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다시 펼쳐보기에 제일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은 괴상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 땐 그랬다.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끈적끈적하게 기분나쁜 괴이한 이야기보다는 적당히 서늘하고, 신나고, 조금 섬뜩하지만 마음이 풀리는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책일 것 같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섣부르게 위로하는 말보다 나의 솔직한 이야기를 끌러놓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어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풀어놓은 아픔을 한 걸음 물러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면 객관적인 거리감때문에 조금은 가벼워질 것이다.  누군가는 우연히 그것을 지나쳐보다가 아, 하고 잠깐 멈춰설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 



네 저는 이런 제목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긴 뭐가. 누구 마음대로. 제발 이런 제목 안 붙이시면 안 돼요? 그러나 이런 타이틀에 혹하는 어린이(is 13 going on 14)가 한 분 계신다. 제목은 영 별로여도 내용이 재미있고 쏠쏠한 경우가 많긴 하더라.



작가 프로필을 보다가 포복절도. 호러소설 창작그룹 괴이학회... 이름 진짜 창의적이다. 답답해 죽겠는 이런 시절에 이런 액션 소설 한 권쯤 읽고 싶다. 요즘 루이즈 페니 열심히 읽고 있는데, 재미가 있기는 진짜 있는데 마음이 자꾸 무거워져.



아, 다 읽고 나면 진짜 뭔가 속에 확 가라앉아서 지독한 체기마냥 한동안 묵묵할 것만 같은데... 그런 필이 확 오는데, 그런데 왠지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스멜. 사회파 미스터리는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늘 생기는데 읽기는 힘들고 읽고 나서는 더 힘들고. 어째야 하나.



어쩐지 있으려나 서점을 연상시키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여기는 있으려나 서점 같은 서점일 것만 같네. 서점 이야기는 에세이여도 좋아하고 소설이어도 좋아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서점 책이 나왔으면 읽어야 하는... 읽고 싶어지는...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제 같은 거다. 그런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처음 들어본 서점이지만(소식이 늦다) 지금까지 들어본 국내 서점 중에 제일 관심이 간다.



이 명사가 설마 그 noun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멋대로 오해해 놓고 한 방 먹은 기분. 어쨌거나 명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문장이 어디 있고 스토리가 어디 있겠나, 명사가 차지하는 자리는 대개가 정해져 있으니 다른 손님들도 어울렁 더울렁 들어와 앉아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지. 그러고보면 명사 하나를 두고 이야기 손님을 초대하면 얼마나 많은 얘깃거리들이 쏟아져 나올지 가늠도 안 된다. 이 분에게 의미가 있던 명사들이 무엇이었을까가 궁금해진다. 



나는 이름붙인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몹시 부럽다. 제일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여하간 세 번째나 네 번째쯤 부럽다. 가끔 생각해 보는데, 내가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곳이 책으로 가득할지, 스케치북과 연필과 물감으로 가득할지, 원단과 재봉틀과 실뭉치로 가득할지, 그 모두로 복닥거릴지는 여전히 상상이 잘 안 된다는 결론만 난다. 이토록 정신 사나운 취미부자가 또 있을까 몰라. 여하간, 여러 면에서 워너비의 삶을 사셔서, 그냥 부럽다는 거. 



천문학에 관심이 급증한 우리 중2가 아주 좋아하겠다. 얘가 뭔가 물어보면 이제는 내가 동공지진의 강도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 OTL



으악. 난 내가 이런 책 절대 못 읽어낼 걸 안다. 그렇지만 있어빌리티는 장난이 아니구나... 아니 뭐 꼭 그래서가 아니라, 정말 이 단어 하나 가지고 이런 책을 써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굉장한 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부모들이 준비하는 것이 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물어보기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고 솔직한 답을 듣기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담론은 불확실성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라서 각자도생밖에 길이 없는가... 싶기도 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다만 어떤 학계나 집단의 대표보다 이런 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다보면 공통적으로 묶이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여하간, 부지런히 읽고, 부지런히 고민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싶다는 거. 



컨셉트가 좋은 책들이 눈에 띄면 기분이 되게 좋아진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을 조금 알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밤은 누구나 수다쟁이로 만드는 시간인가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걸 선호하는 어른이는 잘 모르...(퍽) 어쩌면, 유희경 시인은 원고를 넘긴 뒤 무심결에 다시 펼쳐보고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만요! 를 외친 순간이 혹시 호옥시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와 별도로 이 소설의 퍼스널리티는 뭘까? 라는 생각을 불현듯 할 때가 있다. 작가도 분명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썼을 것이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은 어떤 주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 양 어떤 성격을 띠는 게 아닌가 가아끔 생각한다. 그럼 이런 책의 퍼스널리티는 뭘까. 사람으로 치면 어떤 나이대의,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복장을 하고 주로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스스로도 이상하지만, 왠지 이 책의 표지만 보고 나는 사립탐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물론 아직 읽어본 건 아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동진 작가의 글에서였나 김중혁 작가의 글에서였나.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사람의 글에서였나. 이런 문장을 (당연히 똑같지 않다) 본 적이 있다. 제목을 달고 글을 한 편 완성하고 나면(읽을 만한 글이건 아니건 간에) 처음 붙여놓은 제목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글이 되어 있다고. 나도 제목을 일단 붙여놓고 키보드를 오가고 있는데, 분명 최후의 엔터를 누르고 난 뒤에는 다시 곰곰히 제목 칸의 공간에 대고 마우스를 클릭한 뒤 백스페이스를 지긋이 누르고 있을 것이다. 매번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걸 안다. 


갑자기 이런 내용을 적은 이유는 단순히 오늘 있었던 작은 일 때문이다. 막내가 일기 숙제를 받아 왔다. 이 아이는 제대로 일기를 써 본 적이 없다. 머릿속에 일기라는 개념이 아주 애매하게 뭉실뭉실하게 몰캉거리면서, 덩어리지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하냐고 울상을 지은 채 짜증을 부렸으니까. 그 짜증은 나는 모른다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전형적인 일기를 대단히 혐오하는 사람이므로, 그냥 오늘 네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이든 기분이든, 아니면 사람이건 사건이건 그 무엇 하나를 붙잡아서 쓰면 된다고만 알려 주었다. 아이는 본인이 갖고 있는 애매한 정의 못지않게 모호한 엄마의 설명을 굉장히 고민해서, 제나름의 일기를 써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나도 여전히 그러하니, 아이인들 말해 무엇할까.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는 심각했다. 제목을 먼저 단 탓이다. 그런데 그 불일치를 탓하는 게 옳을까? 제목과 내용이 불화하고 있을지언정, 그 내용을 끌어낸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제목인데.


나는 일기 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고역인 국민학생 시절을 지낸 경험으로 미루어, 아홉 살 어린이가 한 장의 일기 페이지를 꼭꼭 메워 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주 잘 안다. 엉뚱한 내용을 끌어낸 그 제목을 지우라고 하고 싶지 않다. 어쨌거나 쓰기의 불씨를 당겨 준, 고마운 제목이 아닌가.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할까? 이것을 고치라고 해야 할까, 그냥 두라고 해야 할까? 내 나름의 교육 철학은 내버려두라고 외친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숙련된 이차적 자아는 갈등한다. 

이 갈등에서 비롯한 불편하고 긴 침묵은 아이에게 '내가 잘못한 게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아이는 다시 쓰겠다고 노트를 빼앗아가려 하고, 그 순간 작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단언하다. 잘 썼다, 이 이상 잘 쓸 수는 없다. 아이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짐짓 목소리를 한 톤 깔고 덧붙인다. 일기는, 누가 잘 썼다 못 썼다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선생님은 뭐라 안 하실 거야. 엄마의 목소리에서 평온을 찾은 아이는 진짜? 그러고 웃는다. 애는 애다. 제 엄마 말 머리와 꼬리가 휘딱 뒤집혀 붙은 꼬라지를 전혀 눈치 못 챈다. 이제 나는 자책한다. 이 머저리야,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해. 


그리고 대강 오늘의 사건일지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또 갈등한다. 아, 솔직할까 말까. 한 번 더 앞뒤 안 맞는 맺음을 할까말까. 딱 한 번만 고치지 않고 그냥 두어본다. 제목은 저렇게 달고 시작했다. 그리고, 본문에서 증명했다시피 제목과 아무 상관없는 글이 되었다. 그런데 은근히 재미있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