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을 만나면 아마도 측두엽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부위를 지긋하게 누르는 순간이 온다. 마치 거기를 누르면, 파워램프가 깜빡이면서 기억해내라_빨리좀기억해내라고.pdf 파일이라도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책들은 책 자체로 기억되고, 어떤 책들은 다른 책들과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책들로 기억된다.

나한테 이 책은 그런 책... 다시 말해 다른 어떤 책들에게 손을 뻗게 하는 책이었던가보다.
『살면서 가끔 괴로울 때 그 책을 다시 읽는데 그냥 나한테는 그런 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는 문장이다. 괴로울 때 다시 읽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 나한테는 뭘까.

아... 마지막 책이 잘 안 보이네. 오지은 씨의 「익숙한 새벽 세 시」인데.
어디서나 참 많이도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이 책이 열 여섯살의 나를 지금까지 독서가로 살게 한 책이면서, 힘들고 가라앉을 때마다 다시 읽게끔 하는 그냥 그런, 일 번 책이다. 페넬로프 킬링 부인에게는 세 남매가 있다. 대놓고 속물적이고, 조금 뻔뻔하고, 툭하면 자기연민에 빠지고 감정에만 충실하게 사느라 자식들로부터도 남편에게서도 그닥 존중받지 못하고 사는 중년의 맏딸 낸시, 항상 엄마의 편에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는 둘째 올리비아, 아버지를 꼭 닮아 삶의 겉쪽에 치중하고 사는 듯 보이는 막내 노엘. 어느 날 페넬로프는 자신의 삶 전체라고 해도 좋을 아버지의 유작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빚어진 가족간의 갈등과 페넬로프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된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에지간한 자기계발서나 행복전도서보다 낫다, 고 나는 생각한다. 치에코 씨와 사쿠 짱은 아이 없이 둘만 사는 부부다. 그들도 딱히 유별난 삶을 사는 건 아니어서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다투기도 하고 밥 먹으러 나가 처음 가 본 식당에서 메뉴를 성공적으로 고른 것으로 굉장히 기뻐하면서, 그렇게 우리와 비슷하게 소소하고 시시하게 (!) 산다.
그러나 치에코 씨에게는 대단한 재능이 있다. 소소시시한 일상에서 항상 뭔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거리를 찾아낸다. 내지는 뭉클해할만한 것을 찾아내고 아주 잠깐, 감동한다. 그러라고 가르쳐 주는 책을 보면 웬지 반감이 들지만, 치에코 씨가 행복해하고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같이 즐거워진다.
오지은 씨를 TV에서 봤을 때, 굉장히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활기찬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후에 이 에세이를 읽었을 때 그만큼 역으로 놀랐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지만, 이 사람의 그림자는 유난히 불투명하게 짙은 회색이고, 아주 두꺼웠겠구나...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덮어놓는 방법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덮어 가리는 쪽을 선택하겠지만 오지은 씨는 밝은 곳에서 직시하는 쪽을 골랐다. 이제는 바삭바삭하게 말라서 어쩌면 얇아졌을 수도, 투명해졌을수도 있겠다. 책을 덮고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다시 펼쳐보기에 제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