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로자문드 필처의 The Shell Seekers가 최애소설로 쭈욱 남아 있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 등극했다... 쟁쟁한 후보들이 많았지만 감수성 최고 예민한 시절에 제대로 꽂혔던 소설을 밀어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그나마 제일 가까이 갔던 소설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이었는데... 뒷심이 딸렸어... 그래서 그 대단한 책이 뭐냐면,



이거다!


각설하고.

이 책과의 만남을 주선했던 책은 이거였다(책이 주선한 책 치고 그렇게 나빴던 기억은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당신의 책더미를 3배 더 늘리는 게 목적이라고 공언하는 이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론 있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을)? 그림도 글 못지않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더욱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도 열심히 읽기야 하지만 어느 순간 책등과 표지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책이다. 그렇게 책 구경하다 글 읽다 문득 77페이지에 이르면, 책 사랑하는 1인으로 한번쯤 로망을 가져봤을 북클럽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옮기면 문득 시선을 끄는 노란색 책등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 정확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만남은 후에 돌이켜봐도 아무 개연성을 찾을 수 없기도 한데 이 경험이 딱 그랬다. 도대체 무슨 연관성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소재를 다룬 글을 읽다 문득 발견한, 아마도 주인공인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책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검색 시작. 


그리고 우리의 자랑할만한 검색엔진은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고맙게도 '직배송 중고'로 상태좋은 중고가 한 권 등록돼 있었다. 이럴 때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모든 상황이 그린라이트를 깜박이며 Go 사인을 열렬하게 보내고 있는데 차려놓은 밥상도 못 찾아먹는 바보가 될 순 없다. 그래서 굳이 먼 바다를 건너오게 해서 읽었다. 이 책도 따지고 보면 먼 바다를 건너 온 아이의 이야기가 주된 소재다.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왜 원서로 읽지 않았는가하면, 논픽션이라면 몰라도 문학 원전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없을 때도 많지만) 있는 건 그림책까지만이라서... 


나한테 되게 달라붙는 책이구나 또 실감한 건 책장을 열고 나서. 

책을 손에 들기 불과 한 시간 전에 바로 주인공 소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도시에 다녀온 참이었기 때문이지... 그 동네엔 한인타운도 있고 재팬타운도 있는데, 이 아이는 아마도 그곳에 살았었겠구나, 그러면서 완전히 실존인물로 착각하게 됐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각별했던 장소가 내게 물리적으로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발길 댈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 현실과 책 속 사건 사이의 거리감을 이렇게 순식간에 좁혀버린다. 


나오는 흔히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보다 훨씬 영민하고 섬세하다. 이런 캐릭터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읽었던 책이었어도 마지막장을 덮으면 거의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성능의 브레인 소유주이므로 한참을 더듬어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오래된 기억의 방에서 끄집어낸다. 여기에 등장했던 팔로마가 나오와 아주 비슷한 인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얘 이름도 까먹어서 책 정보를 뒤져 기억해낸 거지만. 훨씬 연상의 친구와 마음을 나눈다는 설정도 비슷한 듯. 


정확히는 마음을 나눴다기보다, 여기에서는 일방적으로 맡겨둔 느낌이 더 강하긴 하다.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또래 문화에 자기를 갈아넣지 않고 혼자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나오가 일방적으로 미움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사회가 갈수록 튀는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데, 10대들의 리그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겠다. 아무리 괴롭혀도 나오는 그대로 단단해 보였으므로, 아이들은 아예 나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갈 데까지 간 괴롭힘의 끄트머리에서도 이 아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어떤 관계, 어떤 힘, 어떤 마음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작품 속의 루스는 나오에게 무엇을 준 것일까. 


나오처럼 홀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아이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현실이 항상 소설처럼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세상이 지코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으면 블로그에다 할머니 얘기를 올렸겠죠.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그만뒀어요. 저기 사이버 공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생각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믿는 척하는 날 보니 슬퍼지더라고요. 사실은 아무도 관심이 없잖아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각자의 쓸쓸하고 하찮은 방에 앉아 쓸쓸하고 하찮은 페이지에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올리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글을 쓰고 올리느라 바빠서 아무도 읽지 않아요. 내 슬픈 감정에 그런 수백만의 사람들을 곱해보면 난 좀 가슴이 아파요. -41쪽


시간과 집중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한쪽 극단에서, 루스가 인터넷 검색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초집중하고 있었을 때 시간은 파도처럼 모이고 높아져 하루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반대편 극단에서, 집중이 느슨해지고 분열되면 시간은 마치 알갱이가 있는 것처럼, 매 순간이 정체된 물에 녹지 않고 퍼져 있는 입자처럼 느껴졌다. -131쪽


지코 할머니는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헤이와보케라고 말해요. 그걸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우리가 전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하고 부주의하다는 뜻이에요.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났고 평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일본은 평화로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좋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모두 전쟁과 과거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어요. -254쪽


사실은 내가 아는 게 꽤 많더라고요. 특히 영어는 더 그랬고. 하지만 답조차 쓰지 않은 게 태반이에요. 점수가 어찌나 낮던지 무슨 장난 같기도 하고 내게 지적 장애라도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도 난 뭐 그러거나 말거나 했어요. 이제 고등학교엔 갈 수 없겠구나, 그래서 우리 하루키 1번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배웠던 모든 것들을 배울 수 없겠구나 생각하면,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곧 죽을 사람이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또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끝까지 해보려는 노력엔 고결한 뭔가가 있어요. 지코 할머니의 슈퍼히어로 간노 스가코처럼요. 교수형에 처해지던 바로 그날까지도 계속 영어 공부를 했고 일기를 썼다고 하잖아요. -468쪽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당신은 알고 싶어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는 자기가 가진 슈퍼파워를 찾은 것 같았어요. 어쩌면 나도 내 슈퍼파워를 찾은 것도 같아요. 바로 당신에게 이 글을 쓰는 거요. -548쪽


자문자답.

쓰는 일이 출구가 될 수도 있겠다. 가능한 한 자세히, 옆에서 함께 지켜본 것처럼.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옆에서 무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듯 쓰고, 마음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휘몰아쳤던 감정들을 뿌리부터 하나씩 갈라놓아 찬찬히 펼쳐 쓰는 일이 나오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가질 수 있는 슈퍼파워가 될 수도 있다. 그냥, 말이 되든 안 되든 문장이 단정하건 소란스럽건, 일단은 쓰기 시작하면 정말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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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머무르는 곳에서는 이방인으로 지내는 쪽을 선택하는 쪽이었다. 대체로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런 편에 서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굳이 나서서 인연을 만들고 만남을 만드는 것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삶. 대신에 한 번 가까워진 사람들과는 오래 연을 맺는다, 는 것이 인생관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는데 이게 몇 번의 배신이랄지 뒤통수랄지 그런 것을 당하고 났더니 인간관계 다 부질없는 걸 뭘 굳이... 하는 냉소적인 성향을 나도 모르게 띠고 있었더라. 그냥, 연이 닿아서 가깝게 지내게 되면 그런 것이고, 또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멀어지게 되면 그 사람과의 인연이 다한 것이니까 그대로 놓아주면 될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이 사람하고는 내가 계속 일방적으로 연락하는 쪽이 되어도 괜찮으니까 쭉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은 십 년에 하나 나타날까말까한 것이 나이가 먹어갈수록, 새로운 사람 만날 일이 없으니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과거형은 아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긴 한다.


본의아니게 거주 환경이 일시적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당연히 외부에서 겉돌다 가는 쪽을 선택했더랬다. 굳이 안쪽에서 머무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기 싫었고, 계속 웃는 얼굴로 대화에 참여해 적절한 리액션을 보이는 게 힘들었다. 모국어로 얘기하고 있는 마당이래도 힘든 상황인데 영어로 해야하니 에너지가 더 고갈되고 뭐 그러니까.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와도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은, 사회성 제로의 나. ㅎㅎㅎ 


어떤 계기로 내가 둘러싼 껍질을 깨지 않으면 안 될 순간은 불시에 찾아오곤 한다. 사는 게 뭐 맨날 그렇듯이 말이다. 


그 날도 그랬다. 한국에서 같으면 말도 안 될 소리지만 여기서는 말이 되게도 학부모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기금 조성을 참 많이도 한다. 학부모 자원봉사도 거의 신청 안 했던 마당에 아이들을 위한 행사 기획에 (없더래도) 돈이라도 보태야 양심이 있지, 싶어서 내게는 적지 않았던 그 금액을 전달해야 했기에 학부모 부대표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이 지역의 인구는 인도인과 중국인이 태반인데, 아이의 반 담임도 인도인이고 반대표 부대표 엄마도 모두 인도인이다. 

여하간, 부대표 엄마는 방과후에 만나자고 했고 그렇게 처음 아이 반 엄마와 말을 텄다. 아이가 약간 내성적인데다 영어를 거의 못 해서 참 힘들어하는데, 니네 아들 얘기를 종종 했다. 만나서 반갑고 내가 학급 일을 많이 도울 상황이 못 돼서 이거라도 내야지 싶었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라는 등의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너,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묻는 거다. 응, 한 달 됐어. 대답하니 내 친구들 중에 한국 사람이 둘 있거든. 진짜 좋은 사람들이야. 정말 좋아. 너한테 꼭 소개시켜 줄게. 다음주 금요일에 만나서 애들 같이 놀릴 건데, 너도 올래? 꼭 와라. 네 아이도 모국어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만나면 훨씬 편안해질 거야. 

그녀의 적극성에 놀랍기도 하고 친절이 고마워서 그러마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올 준비를 하는데 그 사이에 문자가 왔다. 지금 그 엄마들 만났는데, 너 #&(**#@로 올 수 있어? 란다. 아, 이 적극성. 


그 인도인 엄마의 소개로 한국인 엄마 두 사람을 알게 됐는데, 그녀들도 하나같이 이 엄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이야기했다. 우리말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보고 있는 옆모습을 보고 잠깐 잡념 삼천포에 빠졌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그 라벨 밑에 포개져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컨텐츠가 그 좋음을 구성하고 있는 걸까? 내가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어느 정도의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시간과 감정이 쌓여야 하는 걸까. 내가 오래 알아 오기만 했으면, 쉽게 좋은 사람, 이라고 남에게 소개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만나고 시간과 마음을 쌓았던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굳이 남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사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나는 좋은 사람이고자 애썼는데 적당히 이용해 먹기 좋다며 우습게 보이고 있었다면 그건 뭐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선의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내면에 스스로도 조절이 안 되는 안 좋은 부분보다는 빛이 드는 곳이 훨씬 많을 거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베푸는 호의를 오지랍이라든가, 간섭이라든가 하는 말들로 흠집내려고 하는 것보다 순하게 받아들이고 고마워하는 사람인 쪽이 여러모로 좋다. 

남들이 뭐라건 호의를 베풀고 그건 그 순간 그대로 잊어버리는 쪽이 좀 더 편하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마음 편한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때론 상처받는 일도 있겠지만,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잊듯 또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엉뚱하게 깊이 파고들어갔던 잡념은 또 순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혼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어도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조금 외로웠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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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모임 - 책, 수다에서 토론까지
강원임 지음 / 이비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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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유난히 독서 동아리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제로 그런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요, 회원을 모집하는 공고글도 꽤 많이 보았고, 심지어 서점에서 이러저러한 책모임을 운영중인데 나와보지 않겠냐는 영업(!)도 받아 봤거든요. 아, 이건 좀 당황스럽긴 하더군요. 나잇값 못 하고 낯가림을 하는지라...

 

지금까지 읽었던 책모임 관련 책들은 이미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구체적인 운영과 실천 지침을 안내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딱 하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빼고.

어쨌거나 이 책은 첫 단추를 끼우는 방법부터 설명합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을 풀어서요. 운영 방식과, 책모임을 운영하면서 부딪힐 수 있는 위기와 해소법 등에 대해 스스로 부닥쳐가며 얻은 생생한 깨달음의 말들이어서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모임을 통해 자신이 겪은 변화들도 소개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풍경묘사가 많은 글을 힘들어한다. 낯선 어휘와 질리도록 섬세한 풍경묘사에 갑갑함을 느꼈다. 대체 왜 이리 길어! 소리 지르며 남은 쪽수를 괜히 들춰봤다. 「파이」,「빨간머리 앤」,「마담 보바리」등을 읽으며 나는 점점 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들이 더 이상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묘사에 담긴 주인공의 심리와 분위기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이젠 사실적 묘사 뒤에 숨겨진 작가의 주관적 시선을 발견하는 희열로 읽어 내려간다. 내가 우울한 날 바깥 풍경이 우울해 보이듯 어느 배경묘사 하나에도 작가가 신경 쓰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57쪽

 

묘사가 많은 글이 읽기 힘들었는데, 그 지루한 문장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죠.

 

한참 책을 읽을 때 모든 책에 만점을 주고 싶을 만큼 무조건적 수용이 컸다. 특히 비문학은 작가의 전문성과 지식에 압도당하곤 했다. 비판적으로 읽기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읽었다. 책을 점점 더 읽을수록 헷갈리기 시작했다. A라는 책을 읽고 가진 생각을 B라는 책에서 반박하자,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저자는 그저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하고, 비판적 사고 없이 읽다가 독서의 위험을 경험했다. -135쪽

 

그래서 저자는 스스로의 중심을 잡아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선택적 수용을 하려면 그 기준이 될 생각과 질문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말해요. 이 이유 뿐만 아니라 평이한 친목모임처럼 이야기의 머리가 엉뚱한 화제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발제와 토론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관련해 논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팁들도 남겨놓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빠질만한 '얼마나 많이 읽었나'의 덫에 빠졌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는 '아껴 읽는 마음'에 대해서 썼어요. 그것도 좋았지만,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거다' 생각했던 것은 취향은 근거가 아니라는 글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각자의 취향 고백만 한다면 책에 대한 얘기보다 자신의 호불호만 전달한 시간이 되고 만다. 내 취향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경험, 생각들을 조금 더 말해준다면 서로의 공감도 생기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126쪽

 

 

정말 그렇잖아요. 사실 취향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왜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덧붙여 설명한다면 훨씬 상대방의 말을 납득하기 쉬울 것 같아요. 밑도끝도없이 난 이건 아닌 것 같아, 저는 이게 완전 와닿던데요, 이런 것보다. 동의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거 알지, 그런 과제를 내주고 간 문장이긴 했습니다만 orz

 

4장에 이르면 같은 책을 읽고 회원들 각각의 생각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모두 갈래도 다르고 결도 다르구요. 톤이 다른 의견을 말할 때의 용기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나와 다른 의견을 듣는 법에 대해 한 번 더 고려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도 인용했던 C.S. 루이스를 재인용하자면 이렇고요.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민감함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막아주는 민감함이지, 자기가 툭하면 상처를 받는 민감함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165쪽

 

말하자면 태도죠. 말하는 법보다 듣는 법에 강세를 두어. 앞서도 말한 취향의 근거에서처럼, 다른 이의 말이 다소 동의하기 힘든 방향성을 갖고 있어도 그 근거를 들어주는 태도가 필요함을 읽습니다. 물론 그 태도는 늘 중립적이어야하죠.

 

거칠게 요약하면 책모임을 통한 모두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왜 달라지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책이구요.

문체라는 것에 인격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단정하게 무릎꿇고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참 이상한 것이, 분명 같은 소재에 대해서 쓰고 말해도 어떤 책은 꺾이지 않는 심지가 느껴지고 또 어떤 책은 낭창낭창하게 휘어지지만 부드럽게 쓸어주는 느낌을 줘요. 딱히 왜라고 설명은 못하겠지만 겸손하고 예의바른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예요. 부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다음 책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응원을 보내는 마음으로 리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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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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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허둥대며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수술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귀로만 전해듣고, 중환실에서 의식을 차려서 입원실로 다시 옮겼다는 소식을 받으며 안도하다가 아는 분이 십대 자녀들을 남기고 급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또 황망해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더군요. 제사는 늘 말이 많은 이슈지만 다 젖혀놓고 순수하게 노동량으로만 따졌을 때, 가톨릭 집안이라(저는 아닙니다만) 매우 간소한 편이라 과히 힘들지 않은 수준임에도 이번만큼은 힘들었어요.

진짜, 파충류의 뇌만 살아있는 상태였달까요. 뇌의 모든 접수처와 사무실에 불이 꺼지고 '생존권 보장!'을 내걸고 얘네들이 단체 농성에 들어간 와중에 기계적으로라도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황이란 게 진짜 힘들었어요. 커피 한 잔 놓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는 이 시간이 마치 기적같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면 오게 마련인 기적도 기적이라면야...

 

열흘 전쯤 『다가오는 말들』을 다 읽었어요.

저는 은유 작가님을 참 좋아합니다. 작가로서 그 분이 쓰시는 글들도 좋아하지만 인간적인 면모에 훨씬 호감을 느껴요. 관계의 거리를 세심하게 살피는 눈이 늘 살아 있어요. 자신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흔치 않은) 노력이 있는 글이어서 무릎꿇은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더 중요한 건 남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발판으로 딛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남을 아래에 두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자신을 유연하게 바꿔 나가는 게 이 작가님의 존경스러운 부분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이를 먹을수록 껍질을 입기는 쉬워도 벗기는 어려우니까요. 근데 그 어려운 걸 하더라구요. 이 분이.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도톰하게 들뜬 표지의 책을 더듬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갈피마다 내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책들의 이름과 작가를 쓴 카드가 촘촘히 꽂혀 있어서 부풀어오른 책. 그 카드를 하나씩 빼내어 제목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유난히 귀에 달라붙는 이름이 적힌 카드를 다시 모서리 맞추어 모아 따로 보관해두는 그런 장면이 순식간에 눈 앞에 떠오릅니다.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한 사람의 놀이 능력은 곧 교감 능력이자 변신 능력이고 사랑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37쪽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 방치하는지가 오늘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51쪽

 

복종은 습관이다. 성찰없는 순종이 몸에 배면 자기의 좋음과 싫음의 감각은 퇴화한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시급한 건 '자기 돌봄'이다. 수능 고득점의 초석을 다지는 독서와 논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는 법을 들여다볼 기회와 자기 억압을 털어놓을 계기가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는 책과 글쓰기였는데 내 아이에게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289쪽

 

역시 책은 참 좋습니다. 서툴러도 책에 대해 말하기도 좋아요. 좋은 것을 좋다고밖에 말할 수 밖에 없을 때의 이 답답증이란.

 

속에 생각과 말이 쌓이면 어느 순간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내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쓰게 돼요. 잘 써지지 않는 말들을 그러모아 레고하듯 이리 끼우고 저리 끼우면서 정체불명의 형상이긴 해도 뭔가 나름 균형을 잡고 버티고 선 것을 만든 대여섯 살 어린아이처럼 물개박수치며 이만 퇴장하려구요. 그리고... 치과엘 가야 해요. 진짜 가기 싫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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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보폭 - 구체적인 삶을 강요받는 사람들을 위한 추상적으로 사는 법
모리 히로시 지음, 박재현 옮김 / 마인드빌딩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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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논문을 쓸 때였습니다. 도무지 늘어날 것 같아 뵈지 않는 요지의 논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서 늘려놨는데, 그걸 또 한 페이지 가량으로 줄여야 하는 시지프스적 노동에 어처구니없어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요약문 앞에는 왠지 있어보이는 타이틀이 붙게 돼 있습니다. Abstract. 그 때 abstract이 팔 벌려 안아들이는 의미의 친족들이 이렇게나 계보가 복잡했구나, 처음 알았습니다.

 

모리 히로시라는 작가는 『작가의 수지』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어요. 그 적나라한 제목에 홀리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 사람이 글로 꽤나 수지를 맞았던 인물이라는 걸 알고는 더더욱. 소설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습니다만.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함부로 추천하기 힘든 책이라는 점입니다. 간결하고 구체적(bold again)인 글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절대 비추예요. 시종일관 축축한 새벽안개길을 헤매는 기분이니까요. 안개가 보통 그렇듯 어쩌다 반짝 선명한 길잡이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시야가 다시 부예져서 말이죠. 이 애매함을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는 읽기 근지구력을 갖춘, 그리고 새로운 발상법을 배우고 싶은 의욕충만한 분꼐 한정하여 권해도 될까 말까조차 망설여지고요. 추상성과 추상화 능력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책답게 문장도 지극히 추상 일변도입니다(쓰면서도 슬슬 ㅊㅅ에 멀미가...). 가끔은 어쩌라고! 주먹을 내리치고 싶을 정도?

여기에서 무엇을 추상해서 나만의 행동강령으로 구체화할 것인지를 전적으로 독자 몫으로 떠넘기는 불친절한 책이지만, 사고의 혁신을 도모하는... 아, 거창해진다.

여하간, 뭔가 식상함을 털고 새로운 통찰을 얻고 싶다면 그 정도의 수고와 노력쯤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은근히 독려하는 책이기도 한 것이죠.

제 경우에는,

 

'왠지 이런 게 좋다'는 기분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자신도 '어떤 좋은' 것을 만들고 싶어진다. 따라서 창작을 하려는 욕구의 밑바닥에는 대상을 추상적으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중략) 그래도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생각의 보폭은 넓어져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구체적으로 앞으로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건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처음에는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행위를 우리는 '창조한다'고 말한다. -134쪽

 

이 대목이 흡사 동앗줄 같았거든요. 늘 '난 뭘 좀 하고 싶은데' 말만 주워섬기고, 그러면서 딱히 뭘 구체적으로 열심히 하지는 않는. 그런데 그 무쓸모의 집합체나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무형의 물컹거리는 무엇이 의미가 있다고 누가 말해주는데 그게 얼마나 고맙겠어요. 진실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잠깐 미뤄두더라도.

 

저자는 '생각의 정원'이라는 아이디어가 자신이 이 책을 쓰면서 걷어올린 가장 가치있는 발상이라고까지 단언하더군요. 저는 인용했던 부분이 개인적 가치를 느낀 단락이었고요. 그게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누군가를 문장을 통해 만나, 지금껏 어두웠던 머릿속 혹은 마음속 어딘가에 반짝, 불이 밝혀질 때의 그 경이로움 때문에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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