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예전에 읽었을 때는 너무너무 마음에 든 작가였었다. 그 작가가 세상을 보고자 하는 시선이 내가 미처 몰랐던 눈높이여서 새로웠고, 내가 생각보다 훨씬 편협한 사람임을 일깨워주는 손길이어서 무안한 반면 다행스러운 기분을 갖게 했다. 그래서 그의 또다른 책들을 여기서 발견했을 때 정말 반가워서 정말 너무 반가워서 얼른 대출대를 거쳐 집으로 들고 왔던 거였다. 아 그런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당혹스러운 마음은.

<너무 한낮의 연애>는 좋았다. 무엇인가에 대해 좋다는 표현을 쓸 때마다 가장 고민스러운 것이 그러니까 그것이 어떻게 얼마나 좋냐는건데, 를 어찌하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것보다, 향수 같기도 한 핸드워시거품을 손에 묻혀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얼어있는 손을 녹여가며 한기를 빼고 향기를 입히는 걸 훨씬 좋다고 느끼는 종류의 사람인데 이렇게 어떤 현상에 대처하는 방식의 좋음이 사람마다 다 다를진대 그것의 좋음을 어떻게 동일한 수위로 받아들일지 아닐지를 (감히) 추측하면서 나와 같은 좋음의 온도를 느껴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친한 관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더라도 "이거 좋지 않아요?" 하고 묻는 건, 정말이지 용감무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절반의 나를, 어쩌면 통째로 다일지도 모를 나를 드러내놓는거나 마찬가지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모를 공간에서는 할 수 있는 거다(완전히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ㅎㅎ).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리지르는 후련함.


아무튼,

그런 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뭉뚱그려서 대강 말을 만들어보자. 내가 좋음이라는 감정을 발견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럴 때다. 좀 대략 난감하게 애매한 것들, 그냥저냥 나도 다른 사람들도 원래 그게 그러려니, 내지는 굳이 그걸 그렇게 구획을 나누어 정확하게 감별을 해야 하나 하는 게으름+귀찮음의 감정으로 대충 한데 버무려 밀쳐두었던 것들을 누군가 깔끔하게 분류하거나 필요없는 부분을 도려내어 나누어놓고 라벨링을 해 놓은 것을 봤을 때. 짙은 그림자 안에 묻혀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을 조심스레 끄집어내 먼지도 털고 모양도 바로잡아 양지바른 담벽에 기대어 앉혀놓은 것을 봤을 때, 즉 솜씨좋은 손길로 잘 다듬어놓은 '존재하는 줄 몰랐던' 삶의, 감정의 디테일한 면들을 발견했을 때 와 이거 진짜 좋구나, 이런 마음이 절로 울렁거리며 일어난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김금희라는 작가가 좋았다. 과거형으로 써서 마치 지금은 별로라는 것 같아 뵈긴 한데 그런 건 아니고...


필용이 알기로 모든 관계는 받아치는 맛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관계의 활력을 만들어낸다. 저렇게 말없이, 모든 것에 초연한 채 수용만 하는 여자친구는 구체관절인형과 뭐가 다른가. <너무 한낮의 연애>, 21쪽

그러니까 안 되었다. 필용이 양희를 볼 수는 있어도 양희가 필용을 봐서는 안 되었다. 시선은 일방이어야 하지 교환되면 안 되었다. 교환되면 무언가가 남으니까 남은 자리에는 뭔가가 생기니까, 자라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무게감을 지니고 실제가 되니까. <너무 한낮의 연애>, 28쪽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너무 한낮의 연애>, 42쪽

무슨 일을 주기적으로 하는 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급식시간에는 늘 선글라스를 낀다. 수업시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엎드렸다 일어났다 한다. 엄마도 주기의 주요성을 알았다면 지금보다는 덜 불행했을 텐데. 수입은 일정한 주기로 들어와야 한다. 부모는 일정 시간 집에 머물러야 한다. 삶에는 파도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밀려나가야 한다. <반월>, 106쪽

이런 것들이다. 보고서도 그냥 지나쳤던 무심함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많은 것들이 드러나는 문장을 읽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다.  도대체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들과 얘기하다말고 간혹 sorry, I just can't think of the proper English word for what I have in my mind... 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영어로 딱 맞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겠어 정도가 아니라, 그게 뭔지는 아는데 맞아떨어지는 단어를 말할 수가 없어일까.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고. 추상화를 가르치는 많은 책들을 보다 보면 여러 겹의 색을 입혀놓은 바탕에서 특정한, 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carve in 하면서 계속 캔버스를 메꿔나가라, 라는 요지의 문장을 조금씩 다르게 패러프레이징한 가르침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나마 그게 적절한 표현법 같다. 널브러져 있던 흐리멍덩한 개념적 물체 하나를 한 사람의 작가가 붙들고 깎고 다듬어 어떤 관념을, 순간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 지점에서 읽는 사람은 무슨 리액션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횡설수설 떠들다보니 나조차도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헤매보지 않은 것보다는 헤매보기라도 한 것은 일종의 무용담이라도 될 수 있으니까, 허리에 손, 으쓱. ㅋ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역시 <고기>다. 너무너무 있을 법하고, 그래서 더 감정이입이 잘 되고, 그 뒤 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치게 하는 종류의 이야기. 큰아이는 자기는 세상에서 열린 결말을 가진 이야기가 제일 싫다는 말을 언젠가 했었다. 이게 뭐냐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지 속시원하게 끝을 내줘야 되는 거 아니냐, 왜 이야기를 제대로 완성도있게 잘 마무리짓는 역할을 읽는 사람한테 (엄마, 이거 게으른 거 아냐? 직무유기가 이거 아냐? 라고까지 ㅎㅎㅎ) 떠넘기냐고!!! 화를 냈더랬다. 이 열변을 토한 아이가, 꼴랑 열 네살밖에 안 되었으니 귀엽게 웃고 넘어가기로 하고. 
아마 얘가 이걸 읽었으면 그렇게 화를 냈겠지. 열린 결말은 그 열려있는 문으로 독자를 결국 끌고 들어와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는, 그런 국어시간 같은 설명으로는 설득이 안 되는 때... 라서, 아마도? 여하간, 이 짧은 단편은 정말이지 모든 사람들이 다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면서, 확신과 의심이 번갈아 왔다갔다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짧고 재미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고. 
어제저녁 식탁에서였나, 큰아이가 도대체 문학의 쓸모를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말 끝에 남들이 보면 지성인의 스펙을 다 갖춘 남편이 그러게, 사실 아빠도 문학이 왜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어... 말을 받는 것을 보고 생각했는데, 이건 심히 전근대적인 문학 교과서 탓이 큰 것 같다. 사실 요즘 문학 교과서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세대 문학 교과서만 생각해 보면 왠지 두 주먹이 불끈 쥐어져... 
요즘 작가들의 글을, 아이들이 읽게 해 주세요 제발. 아무리 고전이 훌륭하다지만 고전만 배워서 어떡합니까 요즘 글이 어떻게 씌어지는지 요즘 소설에서 에세이에서 다뤄지는 글감이 뭔지 세상의 관심사가 어디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아이들이 그걸 알아야죠... 

사실,
이걸 처음 끄적거리기 시작했을 땐 나는 김금희 작가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의 사랑, 매기>는 어디를 좋아해야 하는건지... 무엇을 쓰고 싶었던 것인지 잘 찾아내지를 못하겠다, 이런 것을 쓰려고 했는데, 영 엉뚱한 데로 튀어버렸다. 아, 이게 어디 제출해야 되고, 평가받아야 하는 쓰기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마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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