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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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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좋아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아이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그림책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었던, 그 정도로. '그림책'을 검색 키워드로 넣어, 그림책 뿐만 아니라 그림책을 둘러싸고 나오는 많은 담화들을 모두 찾아 읽는(다기보다는 개중 끌리는 것만) 정도로.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들 중에서도 좋아하는 작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리고 최혜진은 그 중 단연 T.O.P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역시, 저자 본인이 그림책을 몹시 사랑하는 애독자로서 팬심을 그득 품고 그림책 작가들을 만나는 현장의 이야기이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설렘을 여전히 기억한다.

목차 페이지에 담겨 있는 작가들 이름 앞에 붙어있는 소제목. 한 작가의 세계를 압축해서 표현할 말을 찾는 데에는, (정말)글 잘 쓰는 분이지만 (정말이지)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건 다른 것을 배제한다는 뜻이니까. 공존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해도, 입체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작품 세계라고 해도 한 면에 빛을 비춘 순간 다른 특성은 잠시 그림자로 덮어둘 수밖에 없으니까. 여하간 한 사람의 작가가 대표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다른 가치를 모두 소외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저자가 선별한 소제목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개성 외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작가의 개성이라든가 지향점 같은 것을 더해가며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그림책 작가 입문서, 소개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성인이 된 후로) 그림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뜻밖에 그림책 한 권의 무게가 그닥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달을 수도 있다.

 

성실함만으로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2쪽

 

저자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이게 제일 궁금했지만 아마도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양질전화는 여기서도 통할 것이다. 인터뷰에 응해줬던, 창의력 넘치는 작품들의 창조주들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책이니까.

 

상상력과 창의력. 이 두 단어를 마주하면 가끔씩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박제 동물들이 생각난다. 분명 눈앞에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것에 대해 말하지만 고유의 영혼, 빛깔, 냄새 같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 무척 익숙한 말이지만, 그 진짜 뜻을 제대로 알고서 쓰는 건지 아닌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럴 땐 사전을 펼치면 의외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생각으로 그려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창의력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는 게 상상이고, 그 상상에 한 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실현해내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게 창의다. -40쪽 

 

책을 읽다말고 '심봤다'라고 전율하는 때가 몇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내 마음 나도 잘 몰라...'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던 대혼란 상태의 마음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해줄 수는 없다 싶은 문장들을 만날 때이고, 두 번째가 알긴 아는데 그 개념들 사이에 흐르는 차이의 폭을 몰랐던, 그 우둘투둘한 경계를 날카롭게 갈라줄 때다.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의 기쁨인 줄 알았던 이 현재 진행형의 경험이 절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클로드 퐁티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 외롭고 속상할 때 책이 위로가 되어주었나요?

- 어릴 땐 자신의 느낌과 행동에 어른들의 단어로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늘 책을 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고 책 속 세계에선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행위의 의미가 뭔지 몰랐어요. 그게 위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107쪽

 

섬세하고, 상처가 많았던 어린시절을 보냈던 클로드 퐁티는 이런 경험을 축적하고 재구성해서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어른이 됐다. 감동적인 성장이고, 외로웠을 그의 성장기에 뒤늦은 다독임을 보내고 싶어진다.

 

책으로 살아 숨쉬려면 독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독자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때론 이야기에 빠져들어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잃습니다. 환상 세계 혹은 상상 세계로 이동하는 거죠. 이 세상은 무한대입니다. 여기에 책의 사차원 속성 '시간'이 있습니다. 이렇듯 책은 고도의 창작물입니다. 영화, 연극, 회화... 모든 예술이 그 안에 있죠. 저는 글 혹은 그림을 이용해 책을 짓는 게 아닙니다. 글과 그림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책을 짓습니다. 독자 안에 있는 무언가를 톡톡 건드려서 꿈꾸게 만들려고 책을 만듭니다. 최근 한국에 소개된 <바람은 보이지 않아> 마지막 장에는 독자들이 책 옆구리를 잡고 엄지손가락을 페이지를 한 쪽씩 빠르게 밀어서 바람을 일으키게 만드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책의 마법이죠. 바람을 일으키는 유일한 매체니까요. -229쪽

 

 

안 에르보가 한 말은, 그녀가 만들었던 그림책들을 돌이켜보면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빈틈에 상상으로 공간을 불어넣어 의미를 만들어준다. 창의력의 의미 그대로.

 

아이들이 제 책을 좋아하면 읽어주세요.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아무리 제 책이더라도 읽어주지 마세요. 그림책은 조금은 연약한 매체랍니다. 독자가 깊이 관여해서 읽지 않으면 강한 여운을 남기지 않거든요. 대신 능동적으로 즐겁게 읽으면 열정을 쏟은 만큼 보답해주는 매체입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땐 아이들과 함께 줄거리를 살짝 바꿔가며 읽으면 더 재미있어요. 서로가 이해한 내용에 맞춰 조금씩 각색해 보는 거죠. 아이들에게 질문해 보세요.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어느 부분이 제일 재미있는지. 분명 아이들은 어른이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으로 책에 대해 말해줄 거예요. 제 책을 향해 "난 이 책이 별로야. 이 생각에 반대야." 마음껏 말하셔도 좋아요. 능동적으로, 즐겁게. 중요한 건 이겁니다. -304쪽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는 그 당연한 권리, 그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읽히고 싶은 책을 골라 읽으라고 강요한다.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이건 폭거야...

이런 멋진 말을 한 사람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라는 이탈리아의 작가다.

 

 

창의적인 사람에 대한 낭만적인 편견을 걷고 보면 땀 냄새와 한숨, 수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그리 대단치 않은 작은 행위를 끈기 있게 반복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케빈 애슈턴이 <창조의 탄생>에서 쓴 이 문장을 믿고 싶어지며, 완벽함이 아닌 온전함으로 뭔가를 시작하고 싶어진다.

"훌륭한 글은 잘 편집한 서투른 글이다. 훌륭한 가설은 수많은 실험이 실패한 뒤에 남은 추측이다. 훌륭한 요리는 재료를 선택하고 자르고 껍질을 벗기고 껍데기를 까고 졸인 결과다." -167쪽

 

12쪽에서 저자가 던졌던 질문의 답은 사실 여기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쓰여 있다. 내가 한 오늘의 사소한 일은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계속하고 또 계속했을 때 뭔가가 된다는 건 역시 진리다. 믿을 것도 별로 없는 오늘날의 세상에 내가 기댈 수 있고, 아이들에게 이것 하나는 믿어도 좋다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위안이 된다.

 

최혜진 작가님, 꼬옥 계속해서 써 주세요. 작가님의 책을 기다리는 게 정말 큰 인생의 낙 중 하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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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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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 작정하고 잡은 책보다 전혀 아무런 계획없이 들었던 책들이 때로는 더 오래 머물다 가기도 한다. 사람처럼 책도, 연이 있어서 닿는 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책이 있는가보다 생각한다. 왜 때문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이 처음 신간목록에 있을 때부터 '경애하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줄만 알았다. 설마 사람 이름이었을 줄이야.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작가도 같은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러니, 껍데기만 흘깃 쳐다보고 '본 적 있어, 알아' 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세상 의미없는지... 그렇게 오해한 채 '들어본 적 있어'라고 할 뻔 했던 책을 손에 들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인 화재사고가, 실제 있었던 사고였다는 걸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같은 해의 씨랜드 사건은 기억하고 있는데, 왜 이건 몰랐을까.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도, <경애의 마음>이 베스트셀러로 오래 머무르는 만큼 이제는 이 사건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게 된 사람들도 많아졌겠지. 어떤 마음으로 작가는 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렇게 짜게 되었을까를, 경애의 마음에 앞서 작가의 마음을 궁금해했다.

 

경애는 외로움을 몸에 새긴 사람이다. 많은 일들이 경애를 발 딛고 선 현실에서 여러 번 내몰았다. 딱히 경애의 잘못이 없었음에도 그 일들은 경애의 마음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 반복적으로 '어디든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결국엔 도로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 가게 만드는' 일들로 경애는 자꾸 마음 속 상흔 사이로 방을 내고 그 안에 틀어박혀 많은 생각을 곱씹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끙끙 앓다가 문득 깨어 등이 땀으로 젖어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면서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던 날 자신에게 왔던 거대하고 차가운 그것, 슬픔에 안심하던 경애가 있었다. 그리고 때론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마음 따위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애가 있었다. 거기에 경애가 있었고 그리고 2002년 어떻게 길을 통과해야 그 호프집이 있던 골목을 보지 않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경애가 있었다.

하지만 경애는 결국 어느 길로 가든 그 골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72쪽

 

이런 고민들로 상처를 기우면서 경애는 버틴다.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종류의 일들은 시간 속에서 삭히면 그럭저럭 견딜만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경애에게는, 말마따나 근근히 버텼던 경애를 담금질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견뎌낼 수 있는 일들만 찾아온다. 너무하기도 하지. E의 죽음 뒤로 경애는 어떻게든 시간을 헤쳐나와 성인이 되었고 연애도 했다. 남자친구였던 산주는, 한때 경애를 지지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E는 죽었잖아, 죽을 정도로 아팠다는 거잖아. 선배, 나는 그걸 떠올리면 무언가를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대체 내가 뭘 용서할 수 없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뭘 용서해야 하는 거야,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거야, 누가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경애를 산주가 안거나 끌어당기면 분명히 따뜻해졌다. 너무 선명하고 가까이 있던, 아주 세세하고 세밀하던, 그러니까 어느 크고 순한 개의 털이나 풀잎의 잔가시들을 만질 때 느껴지는 그 작고 촘촘한 살아 있음. -163쪽

 

이렇게 찰나지만 분명히 손에 잡히는, 확실한 온기가 주는 안정감이 이 외로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됐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산주라는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이 관계를 정리해 버린다. 상호 합의하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간관계라는 게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런 식은 안 되는 거 아닌가... 산주는 그냥, 본인 말마따나 우연히 경애의 인생에 걸어들어온 것처럼 가볍게 도로 퇴장해 버린다. 사실 그것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산주가 정말 나쁜 놈인 건, 퇴장했으면 끝이지 계속 경애의 무대에 허락도 없이 기웃대거나 심지어 난입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런 양해 없이 본인 기분 내키는대로... 가는 건 니 맘이지만 다시 (오는 것도 아니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건 니 맘대로 하면 안되잖아요.

 

적어도 경애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산주는 경애의 선배이기도 한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정확히 이야기했으니까. 그때 둘은 막 끓기 시작한 전골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윽고 경애가 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지, 라고 묻자 그렇게 되었어,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우연히 좋아한 것처럼 그런 일은 그렇게 벌어졌어, 라고.

...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 96쪽

 

경애가 얼마나 위태위태하게 외줄타기를 하면서 그 시기를 거쳐왔을지 생각도 안 하는 산주는 계속해서 경애의 인생에 들락댄다. 당신 역할은 끝났는데요. 그만 제 인생에서 나가주세요. 그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러면 경애가 경애가 아니게 되었을 테지.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그 때론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 마음을 붙든 채 하루하루를 뒤로 넘기는 경애에게 또 새로운 시련이 온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경애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애는 노트를 간직하다가, 공공연한 따돌림과 적대 속에 근근이 버티던 겨울, 소각장에 던져넣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라고 생각했다. -30쪽

 

그렇지만 마음을 내다버리고 싶다고 그게 버려지는 거면, 얼마나 세상 살기가 편하겠습니까. 경애는 때로는 방치하고, 외면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그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그 무엇까지 버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경애는 언제 어느때고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게 자기의 본분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주인을 닮아서, 경애의 마음도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을지언정 자기의 자리를 요지부동으로 지킨다. 경애뿐만일까, 누구든 마음 한 구석 어딘가는 유난히 질기고 단단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네, 빗자루라는 물건을 처음 본 사람처럼. 그냥 알아서 쓸라고 하자 위에서 아래로 쓸자니 먼지들이 나한테 오는 것 같고 아래에서 위로 쓸자니 도망가버릴 것 같고 그렇네요, 하고 망설이더군요. 마음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으니까, 박주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한번 써본 마음은 남죠. 안 써본 마음이 어렵습니다. 힘들겠지만 거기에 맞는 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공상수 팀장은 그 힘을 믿고 자책하지 말아요." -291쪽

 

아무도 몰라줄 것 같던 경애의 힘든 마음을 조선생은 알고 있다. 알아 준다. 예전에도 그렇게 힘들어봤기 때문에, 지금도 힘들겠지만 잘 견뎌낼 거라는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할 수 있다니. 물론 일상적인 구어체에서 나오기가 몹시몹시몹시 힘든 종류의 말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해준다는 것에서... 또 그 힘듬을 참아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조선생은 경애의 마음 바탕에 깔려있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게 비록 책 속의 인물이고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이 너무너무 낮다고 하더라도. 이 문장이 경애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문장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준비를 하고 있던 말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써 본 마음일 것이고, 그래서 또 여기에 맞는 마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겪어본 적 없는 마음이라면, 어렵더라도 배우면 되는 것이고.

 

좋은 소설, 고마웠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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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리북새통은 이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 석. 하면 뭐에 홀린 듯 최강자 포스의 아우라를 감지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세대였단 말이다, 나는...

 

무작정 무한증식하기만 하고 도무지 진정할 기세를 보이지 않는 책꽂이를 단숨에 갈아엎을 절대비법이 들어있을 거야, 이 안엔. 분명히, 반드시, 필히. 그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믿었지만 원래 근거없는 믿음이란 풍선 바람 빠지듯 흩어져 버리는 법...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내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삐들삐들한 멸치 한 마리로도 육수 비슷한 거라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활용할 수 있는 팁들은 최대한 비틀어 짰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일단 곤도 마리에 스타일로 책꽂이에 있는 책이란 책은 전부 꺼내어 바닥에 쌓았다.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빠른 속도로 탑을 쌓아가는 것을 보며 잠깐 뿌듯해 하고, 그리고 미치도록 후회한다. 우리 집엔 지극히 이성적인 성인 두 명만 거주하는 게 아니라, 꼬마공룡 세 마리가 같이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청소, 신년맞이 대 정돈의 날 따위의 겉멋들린 타이틀에 홀려 완전 망각하고 있던 것을.

 

그렇다고 이왕지사 책꽂이를 텅텅 비워놨는데, 급하게 도로 무질서하게 꽂을 수는 없으니까 몇 박 몇일이 될 지 모르는 모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떻게든 되겠지. 대책은 없을지언정 내가 무한긍정주의자라는 사실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

탑돌이를 하다 보니 대충의 클러스터가 보인다. 아, 이렇게 저렇게 요롷게 조롷게 나눠서 꽂으면 되겠구나.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치니 한결 가뿐하다. 육체노동은 고스란히 남아있을지언정 ㅠㅠ

 

그리하여,

토탈 3박 4일간 허리디스크를 염려하며 느릿느릿 작업을 진행시킨 결과, 머릿속의 이상적인 모습에 일치하진 못해도 상당히 근접하지 않았나 싶은 이런 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사진 첨부하기가 힘들어서 -_-; 이쯤에서 스탑걸기

올해는 책을 더 사지 말고 여기서 다 못 읽은 책이나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 재독하기... 를 목표로 삼긴 개뿔

옆에 다이어리 펼쳐 놓고 내일 카드 그을 책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연초부터 너무 자아를 압박하면서 살 필요가 있나 싶은 이 느낌적 느낌이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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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의 요리 - 요리사 이연복의 내공 있는 인생 이야기
이연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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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파스테르나크가 말했다지.

 

'이번 생은 망했어, 다음을 기약하자'는 자조적인 블랙유머의 기면증에 취해 있는 시대에 어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망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갖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진 사람의 특권일 수도 있다. 정말 힘든 사람은 숨 쉬는 것도 가쁠지도 모르니까.

 

신간목록에 떴을 때에도 목차조차 살펴보지 않았던 책이다. 열심히 쓰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굳이 찾아 읽을 책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TV도 시간이 아까워서 못 보는 사람이라, 가능하면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고 싶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매체도 내용도 묵직한 것을 늘 선호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떤 종류의 연이 아니었으면 전혀 만날 일이 없었을 책이다.

 

함께 요리하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요리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구절구절 꺼내놓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살면서 어떻게 고마운 사람들만 있을까. 하지만 고마운 사람만 기억하는 게 몸에 좋다. 나쁜 음식을 먹었다면 다시는 안 먹으면 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좋은 음식을 대접해 준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책이든, 그 책에 대한 인상을 가름하는 건, 내가 평론가가 아닌 까닭에 지극히 사소하다. 이를테면 책 표지(표지 평론가도 아니다... ㅎㅎㅎ), 출판사, 오탈자의 갯수, 심지어 본문의 가독성 같은 것이다. 당연히 문장도 들어간다. 이 책에서는 밑줄 그은 저 문장이었다. 저 문장 하나로 인해 나는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인생에서 크게, 오랫동안 기억할수록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연륜이 빛나는 가르침이 아닌가. 굳이 나한테 해를 끼친 사람을 두고두고 기억해주는 수고를 내 스스로에게 끼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동급생들을 주동해 짧은 시간이나마 내게 왕따의 경험을 안겼던 ㄱㄴ을 지금도 간혹 떠올리고 있다는 경험으로부터 처절하게(!) 깨우침받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출발점부터가 다르니까.

 

삶은 한 번 뿐이다. 남들이 우러러보건 낮추어보건 상관없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고, 가고 싶은 길을 가면 된다. 남한테 상처는 주지 말고, 그냥저냥 우직하게 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꽤 높이 올라갔을 거다. 훨씬 더 먼저 그 길들을 걷기 시작한 사람들보다야 늦될지 몰라도, 여기가 빠르겠다 저기가 높겠다, 이리로 가면 먼저 간 사람들 추월할 수 있겠다, 저리로 가면 뒤에 오는 누구한테 따라잡히겠다, 여기가 쉽겠다 여기로 가다 안 되면 이쪽 샛길로 빠져 가자, 이렇게 갖은 잔머리를 다 굴리느라 출발도 못 하고 있는 사람보다야 훨씬 많이, 멀리 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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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을 쓰고 나서 이렇게 길게 엔터를 누르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가 독감에 걸려버렸는데, 만 8세씩이나 된 아이가 이렇게까지 열이 나고 하루종일 기운없이 누워만 있을수도 있나 싶게 심하게 앓았다. 사흘을 꼬박, 해열제를 먹고도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는 나흘째를 지나면서 열이 조금씩 가라앉을 기미가 보였다. 아이가 아프던 며칠간 아이만큼 자주 들여다봤던 건 부엌 창가 밑에 자리한 작은 나무상자다.

 

 

 

단단한 나무로 짠 뒤에, 차분한 색감의 무늬종이로 덮은 상자속에는 4*6인치 크기의 카드 한 뭉치가 들어있다. 당연히 상자는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니고, 제작비 제외하고 배송료만 무려 50달러 가까이 지불하고 구입했던 미제 핸드메이드다(엣시따위 끊어버려야 한 달 가계가 평안해진다). 경제적 불행 중 다행으로 카드는 한 장씩 손수 만들고 있다... 좋아해야 하는건지, 조금 헷갈리네.

카드 한 장 한 장마다 내가 가장 즐겨 만드는 요리들의 재료와 조리법이 적혀 있기도 하고, 세 아이들이 각각 아플 때 그나마 잘 먹는 음식들이나 먹여도 큰 탈이 없는 음식들의 목록이 나열돼 있기도 하다.

 

 

 

이런 것을 레시피 카드라고 부른단다. 정말이지 어딘가 가정적이고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한몸에 다 퐉- 끌어안고 있는 듯한 단어다.
처음 이 카드에 대해 알게 된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그리고 레시피 카드를 만들고 모은다고 안해도 될 버라이어티한 쇼핑을 하게 된 것도 다 이 책 덕분이지... orz

 

나에게 처음으로 손수 적은 레시피를 건네준 사람은 나의 친구 케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레시피를 전해주는 문화에 익숙지 않던 나에게 그녀가 자신의 레시피 박스를 열어 체리 크런치 레시피를 적어주었을 때, 나는 큰 보물을 손에 쥔 것처럼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다.(...)케이는 우연히 잡지에서 이 레시피를 발견하고 만들어 본 후 너무 맛있어서 자신의 레시피 박스에 소중히 간직해왔고, 그것을 내게 전해준 것이었다.
케이가 나에게 자신의 소중한 레시피를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그 후 나 역시 레시피를 나누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다. 

 

내가 레시피 박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또한 아줌마를 통해서였다. 처음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 잔뜩 긴장해 있던 나에게 직접 준비한 요리와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레시피를 적어주셨다. 레시피를 적어주고 전해주는 것이 생소했던 나에게 그날의 경험은 굉장히 신선했다. 60대 초반인 델라 아줌마의 레시피 박스는 가족 대대로 물려받은 가족 레시피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줌마가 하나하나 직접 모아온 레시피까지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한다.

 

처음에 이 책을 열어봤을 땐 사전 저리가라 싶은 글자 크기에, 빽빽한 행자간에, 이게 무슨 요리책이냐 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면 그 첫인상이 좀 누그러지기는 한다.

그냥, 알려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거다.자기가 취미로 베이킹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지, 얼마나 맛있는 레시피를 많이 찾았는지, 이 좋은 걸 나 혼자 알면 아까우니까, 많이많이 가르쳐줘야지, 기타 등등등. 다만 그걸 한꺼번에 다 풀어내려다보니 과했을 뿐... ㅎㅎ 솔직히 이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만들어 보기가 편안하지는 않지만, 들어있는 레시피로만 봤을 때는 다른 어떤 베이킹 서적보다도 다양하고 생경한 것이 많아서 보고 실습해보는 재미가 있다.

 

레시피 카드는 단순히 요리법을 적어두고 찾아보는 데만 그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요리법이야 뭐 자꾸 하다보면, 자주 만드는 건 저절로 외워지고 손이 기억하니까 굳이 별도의 카드를 마련해 적어 보관할 필요가 있나 했는데, 있더라. 음식이 대개의 경우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가 만들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몸살이 날 수도 있으니까. 아주아주 먼 훗날에, 아마도. 

 

 

아쓰타는 '생활 레시피'라고 쓰여진 그 책자를 집어들었다. 작은 도화지 카드의 오른쪽 위에 구멍을 뚫어서 고리가 끼워져 있다. 학생들의 단어 카드를 확대한 형식이었다.
살며시 카드를 넘겨보았다. 카드는 요리, 청소, 세탁, 미용, 기타의 항목으로 나뉘어서 '히나마쓰리 레시피', '생일 레시피'같은 제목 밑에 요리법 등이 일러스트로 설명되어 있었다.
"오토미 선생님, 세탁과 청소 요령, 요리 레시피 같은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줄 때마다 이 카드를 줬어요. 제대로 깨끗하게 컬러 복사한 걸로요."

 

카레우동, 하고 미카가 중얼거렸다.
"선생님 카레우동 맛있었는데, 튀김이 들어가서."
튀김..., 하고 조카딸이 말했다.
"그 튀김을 씹으면 카레 맛 나는 즙이 나왔잖아. 그 즙은 어떻게 만드셨을까?"
레시피가 있어, 라고 조카와 유리코가 동시에 말했다. 잔잔한 웃음꽃이 퍼졌다.

 

 

 

 

 우리 작은 올케는 결혼하자마자 집들이 때 새우젓 두부찌개를 올렸대요. 동생이 좋아하니까 시어머니께 배워서 한 건데 이 찌개를 한 술 뜨던 동생의 직장 상사,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하더래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새우젓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서 아내에게 해 달라고 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흉내조차 내지 못했대요. 그래서 다시는 먹어볼 수 없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먹게 됐다며, 재료와 먹는 법을 메모해 갔다는 것 아닙니까?

 

요리책 보다가 눈물나는 일은 참 드물 것 같은데, 이 대목은 코끝이 찡해진다. 돌아가신 엄마가 해 주시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은데 두 번 다시 먹 수 없게 됐을 때의 기분 완전 잘 알 것 같다... 엄마가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엄마의 맛이 그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게 여러 해 동안 포기하고 살던 맛을 누군가가 다시 살려내준다면, 그게 누구든 등 뒤에서 후광까지 보일지도 모를 일.

 

49일의 레시피에서는 돌아가신 새엄마를 추억하는 주인공과 가족,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별 관계도 없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움을 나눈다. 그녀가 만들어주거나 요리법을 가르쳐주었던 음식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추억의 동아리 안에서 사람들은 치유받고 또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칭찬받은 쉬운요리, 는 제목에서 읽히듯 그야말로 (비교적)쉬운 요리들을 만드는 법이 실린 실용서다. 그런데 이런 몇 개 안 되는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간혹 마음을 툭 건드리고 간다.

 

실용적인 목적과 그리고 그 밖의 플러스 알파적인 목표 때문에 나도 레시피 카드를 쓴다. 한두 번 만들어 본 것으로는 카드를 쓰지 않는다. 못 해도 열 번은 넘게 만들어 본 것들, 그중에서도 가족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 일반적으로 알려진 레시피에서 조금씩 변형해서 우리 집에서가 아니면 먹어볼 수 없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적어본다. 이미 기본적으로 부엌일에 대해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쓰고 있는 카드여서 다소 불친절하고 글씨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고 예쁜 것도 아니지만, 나중에는 이것도 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남겨주는 선물이 되겠지. 새벽에 써서 그런가 엄청 센티멘털해지네. 낮에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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