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카페테라스
가스등의 진한 노란색과 밤하늘의 파란색은 차양과 카페 벽의 초록색으로 인해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를 묘사한 이 그림은 노랑과 파랑, 그리고 두 색의 혼합색인 녹색이 중심을 이루는 그림이다. 원근법의 구조를 따른 이 화면은 혼합색의 강렬한 대비를 더욱 강조하며, 그림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은 소실점 끝에 자리잡지 않고, 놀랍게도 앞으로 도출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카페는 예술가들의 집합 장소였고, 말의 잔치가 벌어지는 토론장이었으며, 압셍트 주를 마시는 주정꾼들의 타락과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카페가 본격적으로 묘사되며 회화의 주제로 자리잡은 것은 인상주의 시기에 들어와서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상적 삶의 공간들이 회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리며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밤의 정경이나 밤의 효과를 그 현장에서 그려내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밤 그 자체를 그리는 것, 이것이 현재 내가 갖는 흥미의 중심이다." 반 고흐의 밤의 풍경에 대한 열정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드렉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린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타는 듯한 정신의 낮을 향했던 반 고흐의 눈이, 마음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왜 그리는가?" 라는 문제는 바로 "왜 사는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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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유화 83.5 ×66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198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뭉크의 최초의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난 후, 베를린 화가 연합은 1892년 그를 초청해 베를린 전시회를 열고자 했다. 그 단체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화가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던 전례가 없었고, 모더니즘에 맞서는 어떠한 양식도 수용하지 않았었기에 그 초청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낙선자 전시회가 개최된 지 30년만에, 그리고 파리에서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지 20년 만에 빌헬름 2세가 통치하는 독일제국의 수도에서 보수적인 의무 미술 강령에 대하여 반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뭉크는 그 초대에 응하여 11월 초부터 빌헬름슈트라세에 있는 건축 회관에서 작품 55점을 전시했다. 그때까지 그의 작품을 경험하지 못했던 베를린 미술계에서는 곧바로 파문이 일었다. 보수적인 신문들을 거칠게 그를 비항했고, 며칠 뒤에 그 전시회는 막을 내리면서 뭉크는 '미술처럼 순수한 분야가 그러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은 잡지도 '실력 없는 화가가 아닌 현대적인 화가가 매장되었다'고 토로했다.
뭉크의 그림들은 '하수구 미술'이라는 황제의 교시에 제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뭉크는 사람들의 입에오르내리며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쾨른과 뒤셀도르크에서의 전시회에 이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서 12월 말부터 다시 한 번 똑같은 그림들을 전시했다.
뭉크는 1892년 무렵 독일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앞으로 뭉크가 창작할 「생명의 프리즈」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구체화되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아의 심리적인 몰락을 연구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프리즈」라는 명칭은 1900년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뭉크의 대작이며, 30년이 넘게 그가 집중했던 진행형의 작업이었다. 작품의 기본 주제는 1983년 초에 쓴 편지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그림들에 대한 연구들이 나를 몰두하게 한다"라는 문구 속에 나와 있다. 그 결과들인 초기 6점의 그림들은 1893년 베를린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절규>이다. 그림 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다리 위에 두 명의 남자가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전경에는 날카롭고도 강렬한 모습으로 관찰자에게 다가온 세 번째 형상이 서 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경직돼 있으며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모든 것을 꿰뚫는 외침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다. 이 인물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배경을 이루는 피오르드식 풍경은 하나의 '정신의 지대'로서 그 형상의 내면적 삶을 반영한다. 하늘은 핏빛으로 빨갛게 채색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교회의 탑과 같이 잔잔한 요소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절규>의 채색은 자연주의에 입각한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색채의 신빙성'을 고수하였다. 피처럼 붉은 빛의 저녁 하늘이 비치는 검푸른 물은 가을 기운이 나는 빛과 날씨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인물의 얼굴 표정과 자세처럼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그러지고 고조되어 있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종종 음파를 가시화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비교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죽은 자의 두개골에서 나오는 그 절규가 소리를 지녔는지, 외부로 향하는 극도의 내면적인 두려움이 그 절규의 소리를 멈추게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겨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 내부를 연구하고 시체를 해부했던 것처럼, 나는 영혼을 해부하려고 한다. 당시 시체 해부가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암호화하여 기술하여야만 했다. 오늘안 내가 해부하고자 하는 것은 해부를 거의 비도덕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적인 현상들이다."

@'절규'에서의 조형 요소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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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에 대해 처절한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별을 그리러 밖으로 나간다.'라고 반 고호는 동생 테오에게 말했다.

"반 고호가 'Nuit etoilee'에서 표현하는 것은 묵시록적인 회화이다. 이 그림은 무한한 공간의 신비와 우주의 가공스런 격동이 드러난다. 밤의 침묵속에 하늘은 괴물스런 생명으로 활기를 띄면서 잠든 대지위로 거대한 촉수를 펼친다. 성좌들에게 소용돌이치는 리듬을 각인시키면서. 이 환각을 일으키는 작품속에는 그러나 어떤 무질서도 없다. 반 고호는 아주 확실하게 구성의 균형을 잡으면서 그의 세계관의 주인이 되어 있다." - 마르뜨 로베르

생 레미에 옮겨온 고흐의 화면은 아를 시대에 비하여 한층 침참된 색채를 쓰고, 필치는 보다 다이나믹하게 되고 동적인 곡선의 자유로운 발전에 의한 일종의 묵시록적인 환상를 만들고 있다. 고흐가 몽상적이거나 환상적이란 것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는 그 표면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항상 현실에 밀착한 듯 했다. 그러나, 생 레미에서의 그의 작업은 본질적인 서정을 보인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으로 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이기도 하며, 그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성취가 마침내 생 레미 시대에 있어 몽상가로서의 고흐를 낳게 한다. 별들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모든 것이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대한 밤의 시는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와 닿는 것에 의한 서정성과 신비성을 나타내고 있다.

고흐의 그림은 후기로 갈수록 독특한 흔들림의 붓터치가 잘 보인다. 이른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세계를 만들어 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 신들린 붓터치의 절정을 이루는데,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고흐가 그 삶의 마지막 1년, 정신병과 싸우며 그린 작품이다.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고갱과 다투다가 자기 귀를 자른 고흐는 아를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간혹 발작을 일으켜 "나는 자신에게 과(課)해진 미치광이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며 1889년 5월 아를에서 가까운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는 그해의 7월과 12월에도 발작을 되풀이하였으며, 이 그림은 그 발작 사이에 그린 상 레미 시대의 작품이다.

고흐가 비저널이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는 거의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현실의 사물에 밀착하는 화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한 고흐도 본질적으로는 서정가(抒情家)이고, 뛰어난 비저널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을 상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였으며, 그의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 성숙함이 이윽고 상 레미 시대에 있어 비저널로서의 고흐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철창이 쳐진 정신병원의 창 너머로는 상 레미의 시가와 별이 깔린 하늘이 보인다. 별 하나하나는 심장의 동계(動悸)처럼 빛을 변화시키고 끝 모를 창궁(蒼穹)의 푸름은 그 중핵(中核)을 탐구하는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별들도 소용돌이치고 모두가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는 이 장대(壯大)한 밤의 시(詩)는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접촉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정성·신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신비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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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농민의 생활상을 그린 미술사조

밀레의 이삭줍기는 만종과 더불어 밀레의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이다.

작품감상 : 이 작품은 여름철의 노동과 노동에 의한 피로를 표현하고 있다.
세 여인의 일련의 정지된 듯한 동작을 모노톤 배경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듯 마치 성서의 한장면인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화롭고 안정된 구도와 갈색톤의 자연적인 색채속에서
부드러운 빨강, 파랑, 노랑의 대비는 고전적인 성화를 연상시킨다.

해가 넘어간다.
또 한해의 가을 햇살도 엷은 미소를 남기고 황혼의 낙조 속으로 묻히고 있다. 해 넘어 가는 가을 들녘에 옹기종기 쌍아 올린 추수 볏단이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달려온 한해 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밀레의 '만종'(晩鐘)과 '이삭줍는 여인들'(The Gleaners)의 그림이 한마디 메시지로 아직도 식지 않는 여름 열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 밀레의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천하 통일이 끝나고 저 유명한 불란서 혁명의 혼란의 격랑이 지난 나폴레옹 3세 끝없는 영토 확장에 세계를 침략하 고 있던 때다. 밀레는 돌아가는 세상판에 휘몰리지 않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혼의 저녁 들판에 종탑에서 들려오는 기도의 시간에 맞추어 부부가 겸손히 두손을 모으고 조 물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그림이다. 혼란의 와중에 평화로운 질서를 오히려 잃지 않는 모습이다. '이삭줍는 세 여인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땅에 떨어진 곡식을, 추수를 끝내고 눈이 덮이기 전 그래도 남아 있을 이삭을 줍는다. 풍요 속에 검약을 절제하는 모습이다.
광할한 미국대륙에 어쩌면 내 동댕이치듯 아니면 쫒겨온 듯,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땅 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한국인이 너무 열심히 살고 있어 우리는 때로는 '동양의 유대인'이라는 이상한 별명도 얻고 산다. 이민의 성취의 꿈을 '아메리칸 드림'으 로 이룬 사람도 있고, 아직도 팔을 걷어 부치고 발 붇힐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만종의 기도와 이삭줍는 계절에 우리는 한번쯤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와 나 자신의 모습과 정상적인 일상의 건강을 다시 점검해 보는 시간이면 좋겠다.
꿈의 성취 이전에 먼저 우 리들 하나 하나, 자신의 소중함을 확인해 보는 계절이면 좋겠다. 단풍이 드는 것도 자기 보존을 위한 수분 조절에서 오는 것이고 겨울 잔디는 뿌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 더 이상 잎을 내지 않 는다. 나무마다 다시 필 잎과 꽃망울에 스스로 각질로 싸매고 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할 때다.
자신을 아끼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용납하는 여유를 찾을 시간이 아쉽다. 천하에 하나밖 에 없는 나,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든지 빼앗겨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 아도 이기주의 세태에 자신만을 위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참으로 보는 사람, 자신의 소중함을 참으로 아는 사람, 자신을 참으로 아낄 줄 아는 사람은 이기적일 수가 없다. 너무 성취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만종(晩鐘)의 기도로 우리들 삶의 이삭을 줍자.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영주가 자신의 노예에게 상을 주기 위해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내일 아침해가 뜰 때부 터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이 밟고 가는 땅은 모두 그대들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두 노예는 다음 날 해 뜨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땅을 밟고 뛰기 시작했다. 한 노예는 한나절을 뛰니 숨이 차서 자신의 평생 해 먹어도 남을 정도의 땅만 밟고 멈췄다. 그러나 다른 노예 한 사람은 한치라도 더 밟고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몇 번이나 기절하고 죽을 힘을 다해 해가 땅에 떨어 질 때까지 뛰었다. 그리고 달렸다. 그의 체력의 한계를 이미 벗어난 탈진 한 상태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해가 지고 영주가 나타나 그들이 밟은 땅을 약속대로 주려고 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몫을 밟은 노예에게 그가 밟은 땅을 주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뛰고 또 달 린 노예에게 그 광활하게 밟은 땅을 주려고 했다. 욕심껒 달린 쓰러진 그 노예를 깨웠다. 그러 나 그는 그 자리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그 영주는 혀를 차며, "허허 자신이 묻힐 다섯치 땅이면 될 것을 너무 무리를 했구먼..."
너무 자신을 잊고 제정신을 잊고 제 궤도를 벗어나 무작정 달리고만 있는 우리들의 삶은 아닐 것인가?
며칠전 우리 가까운 뉴져지 섬머빌에 사는 72세의 엘러너 보이여 할머니는 우연히 사둔 복권이 당첨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피붙이 하나 없이 아직도 68년형 고물차를 몰고 다니는 가난한 생 활이었다. 그의 복권 당첨 액은 1천1백80만 달러 였다. 그 할머니는 금액 전액을 성당, 마을 소 방서, 인명구조대 등 자원 봉사 단체에 몽땅 기부해 버렸다. 10여년전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 조 기 은퇴한 후 어머니와 동네 노인들, 병약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했다. 평소 이런 헌신과 희생 적인 생활이 몸에 베어 있는 삶이었다. 당첨 소식을 듣는 지난 10일, 고장난 차를 수리점에 맡 기고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고 기금위탁을 위해 성당으로 달려갔다. 새차 한 대라도 마련하라 는 주위의 권고도 마다하고, "내 인생은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다." 는 말 한마디 였다.
이 시대의 천사 같은 할머니다.
평소의 삶이 그랬듯이 "내 인생이 거액의 횡재 돈 때문에 달라질 것이 없다."는 그런 삶이 우리 들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복권 당첨의 행운의 날과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달라질 것이 없는 삶의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건실하게 이어 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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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키스
세기말(19세기)에 활동한 클림트는 계몽주의식 이성이 흔들리면서 종말론적 퇴폐와 새
로운 시대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시대에, 그 혼돈의 시대에 에로티시즘을 손에 쥔다.

이같은 시도를 저자는 "이성과 과학이 남성의 것이었다면, 이 혼돈은 분명히 여성의 것임을 클림트는 직감했다"고 간파한다.

[키스]는 그의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그림이다. 한쌍의 연인이 온갖 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밀착해 키스하는 그림이다.

복잡한 철학도, 은유와 같은 상징성도 없는, 단순히 두 남녀가 일체가 되어순수 하고
즐겁고 육감적인 키스를 하는 황홀한 장면이다. 연인들은 히피족처럼 그들의 머리를
꽃츠로 장식했다. 남자는 직사각형 무늬의 커튼 같은 옷을 입고 이있으며, 여자는 나이테 같은 무수한 원형에 짙은 붉은 색이나 검정색이 가운데 찍힌 장식 패턴과 화려한 팔레트 색으로 수놓은 금색 옷을 입고있다.

시선은 남녀의 키스보다는 연인들의 의상의 화려한 장식에 더 끌린다. 클림트는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해 장식 패턴의 한계성에 부딪히고 말았다. 내용을 형식으로 이끌고 현대 표현주의 미술에 기여하는 일은 그의 제자 에곤 쉴레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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