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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수업 시간,
스페인어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스페인어 문화권의 작가들을 소개할 때였다.
젊고 호탕하셨던 남자 선생님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수상했고, 여러 소설을 썼고, 그 중
'백년의 고독'이라는 책으로 상을 수상했다.. 라는 사소한 사실들을 나열하다가 "정말 제목만큼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평을 농담으로 끼워 넣으셨었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각인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과
같은 무겁디 무거운 제목의 소설을 쓰는 난해하고 어려운 작가였다. 좀 더 머리가 큰 후,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그의 이름을 들으며 그 중후함은 점점 지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의 소설, 특히 '백년의 고독'은 집어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한 달 전, 결국 그와 수줍게 만나기로 결심을 했다. 서점을 들어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읽고 둘 중 더 마음에 드는 책을 사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된 책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이다.
그들이 그를 죽이기로 한 날, 산띠아고 나사르는 주교가 타고 오는 배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렬했다. '그들', '한 날', '주교', '일어났다' 가 연달아 쾅 쾅 눈 앞에 떨어졌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인 지금
이 문장의 날카로움은 한 층 더 퍼렇다. 이 안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 담겨 있다. 왜 죽이려는 거지?
주교는 왜 왔지? 왜 그는 일어났지? 그리고 이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은 끊임없이 '왜'를 입 안에 머금은 채 이 비극적인
사건을 풀어 간다. 소설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우연들이 현실에서 일어나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가 펄쳐지고 그 우연들에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힘겹게 '왜'를 되뇌이게 된다.
우연이 모여 결국 필연을 확정짓는 그 잔인한 과정은, 끝내 칼부림에 내장이 꺼내지는 토끼 마냥 비까리오 형제에
의해 자신의 집 문 앞에서 난도질 당하는 산띠아고 나사르의 붉은 내장을 보고서 끝이 난다. 이미 그의 죽음이
예고되었음에도, 마지막 장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에게 비까리오 형제가 달려드는 장면은 최고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당황하는 산띠아고 나사르와 거친 비까리오 형제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들을 말리려 경고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그 소용돌이 안으로 빠져 들어가 함께 그 살인 장면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게 된다.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지만, 이미 아무도 운명이 결정지어진 가련한 나비를 구해낼 수 없다.
이 살인은 과연 비까리오 형제에게서만 일어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 살인에 무고할 수 있을까? 아니,
비까리오 형제는 정말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의 집 문에 살인이 예고된 쪽지를 밀어 넣은 것은
사실 그 형제가 아니었을까? 순간의 무관심, 순간의 두려움, 순간의 분노,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모여 결국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리고 물려 예고된 죽음을 향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떠민 것이다.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살인은 예고된 것일지도 모른다. 앙헬라 비까리오가
소박을 맞기 전 부터, 아랍인과 콜롬비아 토박인들 사이의 갈등,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여성의 정절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 남성 중심적인 문화, 공동체 의식의 끈끈함과 타인의 비극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뒤섞은 문화
등은 이미 한 사람의 죽음을 미리부터 결정지어 놓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번외처럼 등장한 앙헬라와 바야르도 산 로만의 재회는 그래서 조금 더 의미가 있다. 둘은 편견과 관습, 외부의
정념에 휘말리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감정과 판단에 따라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한다. 물론 그
재회가 로맨틱하다거나, 앞으로의 미래가 로맨틱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산띠아고 나사르의 죽음과
함께 과거의 자신도 죽여야 했던 그들이 이후 두 사람이 자신만의 판단과 감정을 따라 새롭게 태어난 것은
축복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아니 거의 전부 변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루하고 난해한 작가라는 이미지는 저 시퍼런 첫 문장에 의해 완전히 도려내졌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는 여기저기서
삶의 잔인함, 그리고 그 잔인함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관능적인 매력이 묻어나왔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니
찾아봐야 겠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들도. 수줍게 시작된 만남이었고 상당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참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