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버스로 통학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87번임에도 불구하고 학원에 다닌 지 얼마 안된 시점이어서 인지 78번을 타고 말았다. 분명히 87번임을 확인했는데도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는가 보다싶었다. 다행히 87번과 78번의 갈림길에서 나의 실수를 알아내고 벨을 눌렀다. 쓴웃음을 지으며 87번의 정류장까지 뚜벅뚜벅 걸어갔었다. 잘못된 길인지를 알면서도 그 버스에 몸을 맡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 졸지 않은 것을 감사할 따름이었다.

난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몹시 지치고, 일주일이 하루처럼 휑하니 가버린다. 생각을 파랗게 할 여유도 없이 집에 오면 어물어물 흘러내려 몸을 누이고 만다.

그렇다. 난 지금 잘못 탄 버스에서 내려 갈림길에 있는 정류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십 년 가까이 꿈꿔오던 나의 꿈을 버리고 나의 꿈은 이상(꿈의 현실화)이 되지 못한 체,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버려진 꿈이 잘못 탄 버스라 생각하고 새로운 꿈이 내가 애당초 타야할 올바른 버스이기를 바란다. 과거의 미련은 쓴웃음과 함께 얼굴에서 지워버리고 살다보면 혼돈하여 잘못된 버스를 타고 가다 올바른 버스로 옮겨 타듯 내 꿈을 옮겨 싣는다.

내가 가야 할 길과 더 멀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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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6-0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파란운동화 2004-06-03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

쁘띠아 2004-06-05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 난 지금 잘못 탄 버스에서 내려 갈림길에 있는 정류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저도 지금 버스 갈아타는중입니다.... 또다시 잘못탄 버스를 탄다고 해도...
 


친구가 나의 사진을 손 봐서 메일로 보내 왔었다. 바빠서 답장을 안 했더니, 고약하다며 친구가 전화를 걸어 핀잔을 주었다. 나는 더 큰 목소리로 잘생긴 외모를 망쳐놨다며 초상권 침해에 명예훼손이라고 이렇게 엉망으로 할거면 아예 손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렸다. (ㅎ ㅎ)  오랫동안 알아 온 너무나 막역한 사이라 친구도 살짝 꼬리를 내리고, 처음 작업한 첫 작품이라고 했다. 약 봉투를 제작해서 약국에 납품하는 아담한 인쇄소를 경영하는 친구는 직업상 일러스트와 포토 샵을 한참 배우고 있다고 했다. 더 능숙해지면 더욱 더 멋지게 꾸며서 보낼꺼라는 친구의 약속도 있었다. 항상 밝고 너털웃음이 멋진 친구가 솜씨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기를 바란다.

그런데, 성민아! 입가에 흰 점과 목도리의 노란 점은 뭐꼬? 작업하다 물감을 떨어트린 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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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4-05-04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라온 사진 잘봤습니다...허나....좀 심했네요...제가봐도....아무리 습작이라지만..... 정말 연습많이 해야겠네요~~ ^^*

파란운동화 2004-05-0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내 친구가 들으면 화 나겠다. ^^ 하지만 나도 쁘띠아 말에 공감...
하지만 혼자서 인쇄하고(친구 모친이 조금 도와주시지만) 납품하고... 몸이 열개하도 모자라는 친구다. 또 술을 엄청 좋아하는데 언제 공부를 하는지...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하다.
그래서, 내가 반패죽이려다 살려줬지.ㅋㅋ

파란운동화 2004-05-0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친구에게 이 말도 덧붙였었다.
딴 사진으로 공부하면 쉽게 실증이 날테니, 잘 생긴 내 사진으로 연습하라고...
그랬더니 친구가 크게 감동을 받고 "알았다"했다.
내 친구, 좋은 놈 맞제?

쁘띠아 2004-05-0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좋은 분맞죠!!
그친구분도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여명 2005-03-1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쁘띠아님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는군요 강압에....
정말 힘들었는데....죽는다기에...
세상이 바로서야...제같이 힘없는 이가 살아갈수 있는 세상이오길....ㅋㅋ
 

97년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아주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난에 대해서 틈틈이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댁에서 기르는 난을 위해 자동 개폐되는 창문을 설치하신 이야기, 선생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사모님이 관리를 잘못하셔서 난이 절반 가까이 죽어서 많이 다퉜다는 이야기 등... 내가 너무도 존경하는 분이 난을 사랑하시니, 나도 모르게 난을 동경하게 되었다.

독서실의 총무로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아주머니 한 분이 화분을 여러 개 들고 들어 오셨다. 이름은 은행 난인데, 아주머니는 시골에 내려 갈 기차 시간이 되어서, 싸게 몽땅 팔 테니 사라고 하셨다. 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던 중에 이런 일을 당하니, 나는 천우신조가 아닐까하며, 난을 사야겠다는 쪽으로 절반이상 기울어지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이 난은 귀해서 하나당 만 원은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정말 신기하게도 낚시줄같은 줄기에 크기는 매우 작지만, 은행잎과 똑같이 생긴 잎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더 혼미하게 만든 것은 화분의 밑바닥부터 잎이 나기 시작한 것은 여자난, 갈대처럼 뻗어 올라가서 잎이 난 것은 남자난 이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난도 이처럼 남자, 여자 짝이 있는데, 나는 왜 짝이 없을까? 하며 짝을 지어 쌍으로 사야 난이 외롭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격이 부담이었다. 나는 그때 한 끼에 천 오백 원하는 식사를 했는데, 하나에 만 원이면 도대체 몇 끼의 식사인지를 셈했었다. 아주머니는 정말 애처로운 표정으로 살 것을 권했으며, 그런 아주머니의 표정에서 집에서 기다리는 아주머니의 아이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망설인 뒤, 나는 무려 다섯 개를 샀다. 귀신이 씌어도 톡톡히 씌었던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도 아주머니였지만, 남자난, 여자 난들이 독특하게 조금씩 다르게 생겨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책상에 올려놓으면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볼 수도 있어 좋을 것만 같았다. 사 만원을 주고 하나는 덤으로 얻었다고 마냥 좋아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까지 했었다. 때론 밥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 법이라며, 나는 고고한 선비라도 된 듯 마음 흡족해 하며 난들을 바라다보고 했었다. 그런데 며칠 뒤, 꽃가게를 지나다 처마에 걸린 화분에 여자의 긴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은행 난을 발견했다. 나는 반가움에 화분에 다가섰다가 불에 데인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조그마한 가격표가 꽂혀 있었다. 은행 난은 은행 난인데, 나의 까만 플라스틱 화분보다 더 좋은 화분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 천원이었다. 다시 확인 해 봤지만 영(0)은 세 개었다. 일생 일대의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억울하던지 사기꾼 아주머니는 잡을 길이 없고, 선생님에게 달려가 난 값을 물어 달라고 억지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蘭)이 정말 나를 난(難)하게 만들었었다...

나는 꽃가게 앞을 지날 때면 항상 발길이 멈춘다. 콘크리트 바닥이나 보도 블록 위에 꽃이나 난, 혹은 분재를 보면 그들이 콘크리트라도 뚫고 나온 듯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운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난 듯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 전에도 까만 숯의 가운데에 난을 심어 놓은 것을 유심히 보고 온 적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으로 쓴웃음도 났지만, 나의 뇌리에는 벌써 숯으로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가게로 다시 찾아가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내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만들 수 있는 원형크기의 굵기를 가진 숯의 가운데를 파내고 난을 심어 놨는데, 주인의 말로는 숯이라서 실내 공기 정화에도 좋고 난이 있어서 정서 순화에도 좋다고 했다. 한 송이의 풍란과 혼자인 내가 벗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자며 만 원을 주고 샀다. 정말 나에게 돈이 아깝지 않을 때는 이럴 때다. 방에 와서 창틀에 올려놓고 바라다보면, 숯은 산이고 난은 고독한 소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고독한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라보다, 문득 난이 답답해 보였다. 움푹 패인 그 속에 쏙 들어가 있는 폼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밤을 세워 가며 난의 뿌리를 돌에 동여매고 시간 맞춰 물을 주신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책을 접어 치우며, '이래선 안 되는데,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좀 쉬었다 하지뭐, 때론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하며 어느새 난의 뿌리를 다 풀어 헤쳤다. 이끼에 가린 뿌리들은 엉망이었다. 온전하게 자란 뿌리는 단 두 개었다. 하나는 나의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짧게 자라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볼펜의 심만큼 튀어 나와 있었다. 나머지 여섯 개의 뿌리는 모두 썩어 있었다. 왠지 또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벌써 화분의 테두리에 팔 월 모의고사 몇 점이라고 커다랗게 목표 점수를 적어 띠를 둘러놓았기 때문이다. 풍란이 살아야 내 목표점수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선 세 장의 잎을 과감하게 잘라 냈다. 난의 크기에 비해 여섯 장은 너무 많은 것 같았고 뿌리가 건실히 살아야 잎이 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썩은 뿌리도 잘라 냈다. 처음엔 성한 두 개만 남기고, 뿌리 끝이 검게 썩어 길게 자랄 수 없는 나머지 것들 모두를 잘라 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었다. 그러나 혹시 하는 마음에 썩었지만 세 개를 더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나서,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뿌리에 이끼를 싸맸다. 실이 없어서 가게에 가서 반짇고리를 사 와서 하나 하나 조심스럽게 동여맸다. 그런 다음 내가 마음에 드는 숯의 일부에 잎의 중심으로 잡고 다섯 개의 뿌리를 손가락으로 숯을 에워싸는 형상으로 뻗쳐 놓았다. 치료가 끝난 난이 다시 창틀에 올려 졌다. 마치 숯이 잔디를 뒤집어 쓴 것처럼 모양이 우습게 되었다. 나중에 뿌리가 뻗어 내리면, 내 마음이 투영된 나의 분신으로 다시 태어 날것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성장점이 있는 뿌리의 끝부분이 썩어 버린 세 개의 뿌리가 어떻게 살아 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섞은 뿌리를 동여 맬 때 잘라 버린 뿌리도 고통을 인내하고 멋지게 살아 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잘라 버린 것은 아무래도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앙증맞은 천 원짜리 분무기도 하나 샀었는데, 뿌리가 마르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물도 나눠 마시고,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마음도 배우며 풍란이 탈바꿈하는 모습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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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4-08-0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난(蘭)은 어떻게 됐을까?

파란운동화 2004-08-04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난, 돌아 가신지 옛날이다.
대신에 강가에서 가서 돌을 주워 새로 산 난을 옮겨 붙인게 있다.
기가 막힌다. 정말로...
다음에 와서 사진 찍어 주면 여기에 올릴께.
경주에서 어머니가 열심히 물을 주고 계신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밤을 치고 계실 때, 어린 나는 어떻게 치는 것이 밤을 제대로 치는 것인지 여쭤본 적이 있었다. 선친께선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웃으시며, 칼날이 지나간 자리가 표시 나지 않게 여러 번 반복해서 치고, 팔각의 각이 알맞게 생겨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선친께서는 한자를 고서에 찍힌 활자처럼 매우 잘 쓰셨는데, 나는 먹을 갈며 옆에 앉아서 지방을 쓰시는 선친의 모습을 바라다보며, 나도 이 다음에 한자를 잘 써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제사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는 제물(祭物)을 골고루 나누어 이웃에 나누어 드렸는데, 몇 마리 되지 않는 생선을 나누고 나면, 정작 우리의 식탁에는 생선의 머리와 꽁지부분이 올랐다. 물건을 나눌 때는 상대방에게 좋은 부분을 주고, 자신은 나머지의 것을 취해야 한다는 어려운 사실을 쉽게 받아 들릴 수 있게 되었다.

선친이 양자로 나오셨는데, 우리 집의 제사는 일년에 열 번이었다.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한다'는 속담은 우리 집 같은 경우를 두고 생겨난 듯도 하지만 부모님은 언짢아하시거나 귀찮게 생각하시는 기색이 전혀 없이,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나 또한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제사 풍속을 당연히 받아 들였고, 그런 전통에 흥건히 젖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도 어릴 때는 한밤중에 일어나 세수하고 제상을 닦고 잔심부름하는 것이 못마땅한 적이 있었다. 제물을 장만할 돈으로 차라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다른 음식을 사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고, 공부를 핑계삼아 제사에 불참하게 되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가므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 흩어진 음과 양에서 그를 찾는다.-예기(禮記)' 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같이 과학적이고 바쁜 시대에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나의 의구심은  최근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분명 우리 삼 형제만 섰던 자리에 형수님들이 언제부턴가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제는 어디서 오셨는지 나의 조카들도 거짓말처럼 자리를 메워 가고 있다. 7살, 5살 남매인 조카들은 내가 형님들과 그러했듯이 소곤거리고 깔깔거리기도 하며, 오빠가 조용해야 된다며 동생을 타이르기도 한다. 소리 없이 빠른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신(神)의 조화로움과 위대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 진다. 그래서 나는 조카에게 다가가서 조카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큰형의 이름을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생전의 모습을 뵌 적이 없는 어린 조카에게 그것은 무리인 듯 했다. 나는 조카의 조부, 나의 선친의 함자를 일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아주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 조카는 누구 때문에 태어났는지를 묻고, 이어서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태어났는지를 물었다. 다시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조카는 아버지 때문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위의 아버지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줬다. 물론 일곱 살짜리 꼬마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성급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매 제사마다 이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면서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심을 감사들이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다.

집안 제사의 제물을 장만할 때, 부엌에서 여자들만 고생하는 권위적인 가부장시대는 지났으며 우리 집도 예외일 순 없다. 큰형님은 마련된 생선을 서두하고 차리신다, 작은 형님은 과일을 깎고 음식을 차리신다. 나는 제상을 닦고 음식을 나른다. 기회(형님들이 먼저 밤을 쳐버릴 수도 있음)가 주어진다면, 껍질을 까서 깨끗한 물에 담가 둔 밤을 친다. 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멋진 공예품은, 아마도 내가 친 밤일 것이다. 부엌에선 형수님 두 분이 밥을 짓고 나물을 삶고 한참 분주하시다. 이러한 일사불란한 모습 속에서 나는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한다.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 조그마한 가족의 울타리 속에도 구성원의 지위와 역할이 있다. 집안이 평안하다는 말은 가족 상호간에 질서가 있어 마찰이 생기지 않고, 잡음이 일지 않으며 그 구성원의 각자가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알아서 척척해 낼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내가 지방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은 내 지위에 맞지 않는 역할이기 때문이고, 내가 나물을 삶고 싶어도 삶을 수 없는 것은 형수님들이 각자의 일을 찾아서 먼저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자의 *정명론과도 상통하는 얘기로, 제사를 통해 가족 상호간의 지위의 역할과 질서를 확인하고 신뢰를 느끼며, 또한 정성으로 이뤄진 제사의식을 통해 강한 가족 애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며칠 전, 선친의 제사가 있어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모였는데, 제사를 마치고 제관들이 물러나며 음복을 기다릴 때, 말수가 적으신 고모부께서 잔을 받으시며, "정말, 양반이네"하고 대뜸 말씀하셨다. 21세기의 양반이 어떤 의미 일까를 생각하다가, 아마도 고모부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의 이러한 가족애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봤다.

*정명론(正名論) -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가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뜻. 즉, 제각기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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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참 살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것은 에너지의 과잉과 부족이 평형을 이룬다는 것이고, 이렇게 양쪽으로 균형 잡힌 곳에 살게 되어 너무나 다행스럽다. 외국에 나가 살아보진 않았지만, 사계절이 나타나서 실증남도 훨씬 덜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사계절의 변화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빨라지는 느낌이고, 그런 일 년의 계절 중에 이맘때가 되어 비가 내리면, 그리고 그 빗방울이 빛좋은 산을 감싸고도는 것을 보는 날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이 일 년중에 바로 그런 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

어제 저녁 비가 와서 자전거는 독서실에 묶여 있다. 아침에 걸어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산이 안개와 포옹한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독서실 방향과는 정반대방향인 산 쪽으로 걸어갔다. 집에서 산 쪽으로 삼 백 여미터를 가면 버스 종점이 있는데, 그 곳에 앉았다가 버스가 오면 타고 가려고 캔 커피를 하나 사서, 오랜만에 산에 다가 섰다.

'마동 마을'이라고 마을의 입구를 알리는 입석 옆의 콘크리트에 걸터앉아 산을 바라보며, 내 넋을 씻어 내고 있었다. 이 태백이 달을 동경했고, 퇴계 선생이 매화를 아꼈듯이 나는 산 안개를 즐긴다고 멋스런 생각도 해 보고, 오늘 하루를 공치고 저 안개 속으로 뛰어 들까? 라는 강한 유혹도 받았다. 그럴 때, 저 안개는 복사 안개인가? 이류 안개인가? 라는 지구과학의 내용이 느닷없이 떠오르면서, 현실을 잠시 잊고자하는 욕구와 냉정한 현실과의 괴리를 맛보고, 아예 의식을 차분히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자꾸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었는데, 바로 개구리였다. 마을 경계 입석의 바로 옆은 폭이 십 미터도 채 못되는 하천이었는데, 물의 냄새를 맡고 어디서 나왔는지, 십 여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는 스며들어 하천의 바닥은 말라있고, 그 자갈바닥에서 습기를 찾고 있는지 이리저리 뛰어 하천가로 몰리고 있었지만, 콘크리트로 방벽이 2 미터 가량 쌓여져 있어 빠져나올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 방벽의 높이는 나도 겨우 빠져 나올 정도의 높이었다. 그러나 개구리가 50 여 미터 아래로 내려가야 방벽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왜, 또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그 개구리는 내가 어릴 때 익숙히 보아 왔던 고향의 토종 개구리는 아니었다. 짙은 녹색의 등에 붉은 반점이 위협적으로 박혀 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둥이 개구리였다. 개구리를 포함한 모든 파충류가 내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온 종일 팔딱거리다 피부가 말라버리면 죽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내가 만약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저런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책을 읽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판단 능력이 흐려진다면, 저 개구리처럼 살 길을 찾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죽는 줄도 모르며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불교에서 *호생지덕(好生之德)이라 했으니, 저 놈들을 살려야 겠지'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 또한 멸한다고 했으며 인간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과 식물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윤리시간에 교육을 받았으니 당연히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개구리가 "어, 저기 못생긴 놈이 돌에 멍청하게 앉아 커피 마시고 있네" 라든가, "어, 저기 멋있는 사람이 자연에 도취되어 앉은 모습이 요즘 보기 드문 선인 같아" 라는 편견은 갖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친숙한 개구리가 아니고 보기에 흉한 개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편견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일 테지, 하지만, 다 같은 생명이라는 점에선 당연히 편견을 깨고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살리기를 실천해야 되지 않을까? 선(善)이란 것이 내가 본래부터 선한 것이 아니고, 상황의 이치를 알고 나를 깨우쳐 실행함으로써 느낄 때, 즉 순자가 말한 *화성기위(化性起僞)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 맞아. 나는 절대적으로 순수하지도 선하지도 않아, 단지 선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거야' '하루에 몇 번씩 악한 생각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선의지)일거야.'

*호생지덕 -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

*화성기위 -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며 인위(人爲)는 선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인위란 사고 작용을 통해서 선택되고 조종된 것, 학습을 통해서 얻어진 모든 것을 말한다. 순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일종의 질박한 재료이고, 인위는 예의 도덕을 이용하여 가공한 것이다. 그는 인위에 의하여 인간의 본성이 바뀔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인위를 통해 본성을 변화시켜야만 완전한 선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실천이성(선의지) - 스스로 보편 타당한 도덕 법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 하도록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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