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진다.
이 곳이 최고봉인지 바로 앞이 낭떠러지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지금까지는 4륜 구동 승용차로 조심스럽게 올라오면 올라 올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비포장 좁은 도로도 끝이 났다. 희미하게 난 수풀 길을 몇 백미터 가다보니 더럭 겁이 났었다. 며칠 째 계속된 비로 심기가 사나울 대로 사나워진 뱀이라도 밟으면 나는 어쩌지? 하는 생각은 연이어 휴대폰도 차에 두고 와서 구조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인적 없는 곳에서 죽지나 않나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 길이 내가 찾아가는 주사암(朱砂庵)가는 길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산 입구에서 마을 사람들이 일러 준 대로 올라 왔지만 도중에 갈림길이 너무 많았었다. 나의 감각에 맡기고 안개가 이끄는 대로 올라왔지만, 이제는 돌아갈 것을 염려해야만 했었다. 책에까지 소개된 절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정표 하나 없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주사암은 사람들을 꺼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부처님이 이런 사소함에도 나에게 시련을 주시고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자위했었다.
발걸음을 돌려 하산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책에 나온 약도로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안개가 시야를 가려 위험하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들 어떠리!
내 몸과 마음은 이미 물의 요정들에 의해 맑아질 대로 맑아졌는데...

오르던 중에 사주암이 아닌 사실만 확인하고 스쳐지나갔던 돌기둥 앞에 멈춰 섰다.
마음을 흠뻑 적셨고 배도 몹시 고프니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만교사라는 절에 들어가 주사암 가는 길을 물어 볼까?

잠시 머무는 동안 절 앞에 가꿔 논 텃밭이 눈에 들어 왔다.
촌에서 자랐기에 저 밭에 얼마나 큰 정성이 들어갔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계곡에 몰린 안개와 산사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렇게 정성껏 밭을 일군 스님과 한번 대화를 나눠 봤으면 ... ... 더 볼 것도 없이 인자하신 분이 분명할 것이다.'
어느새 발길은 절의 사립문 앞에 멈춰 있었다.

법당은 아니 보이고 조촐한 농가가 눈에 들어왔다.
끈에 묶인 백구 한 마리가 더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신나게 짖어댔다. 조용히 법당을 한번 둘러보고 가고자 하는 길손인데, 백구 때문에 조용한 산의 모든 만물의 눈들이 나에게 쏠리는 듯 했다. 안쪽으로 몇자죽 내딛었을 때, 발은 마당에 딱 달라붙고 말았다. 이번엔 시커먼 개가 나를 쏘아보며 곧장 내게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릴 적 큰 개에게 놀란 적이 있어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산길을 가다 범을 만난 사람처럼, 오랜만에 오금의 위치를 확인했고 오금이 저려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안 물어요. 안 물어."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개에서 눈을 땔 수 없었다.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지 나를 안심시키며 스님이 나타나셨다.
"허허, 안 문대두. 좀 물리면 또 어때?"
스님께서 내게 다가서시니, 개는 금세 경계를 풀고 꼬리를 흔들어댔다.
"어떻게 오셨우?"
"아, 예." 재빨리 가방에서 '우리 산 옛 절' 을 꺼내 주사암 (p.112)을 펼치고 두 장 더 넘겨 절벽 사진을 찾았다. 개의 뜨거운 혓바닥이 가방을 받친 손에 느껴졌었다.
" 책에 나오는 주사암을 찾아 가는 길이었는데 안개에 길을 잃고 3시간 동안 헤매다 길을 여쭈려고 왔습니다. ^^" 스님께 책을 건네 드리며,
"사진에 나온 절벽위에 오르고 싶어서요"
"지금은 많이 변했어, 이리로는 안개에 길을 찾기 힘들지. 국도를 따라 아화로 가다보면 푯말이 있을 거야. 그리로 가 봐."
" ... ..."
"이리로 와서 좀 앉지."
농가로 보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독기를 품었던 개는 어느새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을 하고 내 옆에 앉았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몇 번인가 넓적한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텃밭은 스님께서 직접 가꿔셨나요. 너무 보기좋습니다."
"절을 돌보는 사람이 가꿨지. 그 사람의 선친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도 침으로 고치는 기인이었네. 땅 속까지 훤히 들여 다 보는 도통한 사람말일세. 이곳의 풍수를 말 해줄까? 자네는 복이 많아, 보통 사람들은 이곳이 기가 세서 그냥 지나치는 데 이곳으로 들어 왔으니 말일세. 겉모습에 끌려선 안 돼, 이곳에 절벽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있지. 나를 따라 오게."
농가에서 백 미터 못 미치는 곳에 드디어 대웅전이 나타났다. 이동 중에 스님은 내게 안 좋은 일이 있어 찾아 왔냐고 물으셨고 산을 좋아하고 비가 올 때 산에 오르고 싶어진다고 했었다. 내가 한의대생인 걸로 착각하시는 듯해서 부산에서 기계를 만지는 사람인데 기계소리에 산이 몹시 그리웠다고 말씀드렸다.
폭포까지 나를 안내하시고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백제군 수 천 명이 이 계곡에서 목숨을 잃었지. 이 폭포를 따라 붉게 물들여 피가 흘렀으니 지금도 이 곳엔 백제 병사들의 원혼이 떠 돌고 있지. 큰 절에서 몇 십년 도를 닦은 스님도 이 절에선 오래 버티지 못 해." 하시며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눌러대던 나의 옆으로 다가 오셨다.
"어때, 마음이 편안해 지시나?"
"예, 무척 아름답습니다." 폭포가 시작되는 위쪽이 몹시 궁금해졌으나 궁금증을 누르고 대답했었다.
" 올해 ****** 인가?"
" 예?"
"세속 나이가 몇 인가?"
"다섯 입니다."
"스물 다섯? 서른 다섯?" 내가 스님의 연세를 가름할 수 없었듯 스님도 나의 나이가 수상한 모양이였다.
"서른 다섯입니다. "
"내가 많아, 반말해도 괜찮아."
" 아, 예. ^^"
" 이 곳의 풍수를 말 해줄까?" 따라오게."
스님는 잰걸음으로 나아가시며 이 절의 풍수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귀를 쫑긋 세우고 뒤따르며 경청했었다.
" 대웅전이 앉은 뒷산이 용머리지. 용이니까, 대가리라고 해도 돼. 그리고 여기가 혓바닥이야. 혓바닥처럼 길게 나오지 않았나? 그리고 저 바위는 여의주야. 어떻게 저런 둥근 바위가 저 곳에 위치하고 있겠는가? 저렇게 큰 바위를 사람이 옮겨? 천만의 말씀이지. "
그리고 보니, 폭포에서 떨어져 흐르는 법당 앞 계곡물은 깊게 골을 파고 혓바닥처럼 휘어감아 돌고 있었다. 그리고 혓바닥 끝부분에 내려앉은 둥근 바위.
"지금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앉지만, 저 앞에 보이는 *** 과 ***. 풍수를 아는 사람들은 이 곳이 명당임을 대번에 알아차리지. **거사도 이 곳에서 도를 닦으셨는 걸"
스님을 뒤따르며 한바퀴 휙 두르고나니 다시 농가의 텃마루에 걸터 앉게 되었다. 다시 좋은 말씁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대부분이 한자성어라 들어도 잘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혹세우민'이란 말은 알기에 귀에 쏙 들어 왔는데, 속세에서는 몰라서 죄를 범하면 어느 정도 죄가 감해지는데, 불가에서 모르는 것은 '중죄' 라 하시며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시는 것이라며 마음을 잘 다스려 가슴으로 공부하라 하셨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내가, 마음으로 공부는 책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하고 여쭈니, 그런 책은 없다하시며 껄껄껄 웃으셨다.
차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손님들이 곧 오시기로 되어 있어 아쉽다하시며 나를 법당 쪽으로 다시 이끄셨다. 스님께서 거처에 들어가신 사이에 농가 쪽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오시기로 한 손님들이 오신 모양이었다. 책을 한 권 들고 나오신 스님께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신 스님은 나를 따라 농가의 사립문까지 배웅 나오셨다. 책을 읽고 막히는 곳이 있으면 다시 한번 들러라 하시며 법명과 전화번호까지 적어 주셨다.
이 무슨 귀한 인연이 있나싶어 산을 내려 오며 자꾸 뒤돌아 보게 되었다. 아직 산은 안개에 가렸고, 드디어 절은 산에 가려지게 되었다. 안개에 홀린 듯, 다시 찾으면 '만교사' 란 절이 애당초 없는 절은 아닐까싶다가도 가슴에 안긴 책을 확인하고는 꿈은 아닌 듯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비워 디카와 책을 말리기위해 펼쳐 놓았다.
마음이 흐뭇하여 방안을 이리저리 가볍게 왔다갔다 하였다.
스님이 주신 책. "간 화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