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일요일을 맞이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톱도 깎아보고, 웃자란 율마도 예쁘게 정리를 해주었다. 이 귀중한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궁리하다 지난주에 받은 '장자'와 놀아보기로 했다.
최대한 게으르게, 최대한 건방진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장자'를 읽었고 팔이 아프면 저쪽으로 눕고 어깨가 결리면 이리로 눕고 앉아서 읽기도 했으며 깜박 졸아 800페이지가 넘는 '장자'가 내 얼굴을 살짝 덮치기도 했었다.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장자'에 짓눌려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창밖은 날씨가 너무 좋았고 전에부터 미뤄오던 대사(大事)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大事인 즉은, 보지 않는 아까운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파는 일이였다. 왜 大事이냐하면, '서면'이라는 큰마실까지 반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갇혀있어야하고 두더지 소굴 같은, 갈 때마다 헷갈리는 서면의 지하세계에서 알라딘을 찾아내야하는 고행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1호선 갈아타는 곳'과 '지하 상가'와 '지상으로 나가는 곳'이 어디로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보통은 가다 되돌아오기 일쑤고 운이 좋으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제대로 가고있었다. 요지경 소굴이다. 알라딘을 찾아 1번 출구쪽으로 가서 지상으로 나가려했는데, 어라~ 저 멀리 알라딘의 램프가 보인다. 지상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지하에서 만나다니, 처음 방문도 아니고 두 번은 온 것 같은데, 내가 길치인지 반문명인인지 어째든 되게 반가웠다.
내가 팔려고 가져간 책은, 카티아 관련 서적 두 권과 자전거를 직접 수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비책 한 권이였다. 카티아를 공부할 때 이책 저책 하나씩 사다보니 다섯 권이 되었고 그 중에서 세 권은 지은이가 같다보니 내용도 많이 중복되어 잘 보지 않게 되었고 새 책같은 두 권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내다 팔기로 마음먹었었다. 책의 표지에 적힌 정가대로라면 세 권 합쳐 팔만칠천원이였다. '많이 못 받아도 절반은 받겠지, 아니야 30%만 받아도 만족해. ㅋㅋ 민음사의 세계문학으로 골라 사 와야지' 혼자 속으로 신이 났었다.

대기표를 뽑고 잠시, 담당 직원은 갖고 간 세 권의 책을 쭉 훑었다. 표지도 조금 바랬고, 뭐라 뭐라 계속 문명화된 기계적인 억양으로 반문명인인 나에게 설명을 했었다. 결론을 말하면 한 권은 중고 재고가 많아 구매가 힘들고 나머지 두 권은 합쳐서 오천 원이니 팔겠냐?는 물음이었다. ㅋㅋ 오만오천원이 오천원, 거의 10%네. 나는 냉큼 오천원 지폐 한장을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구겨진 지폐처럼 나의 존심에 알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나? 민음사의 세계문학으로 네다섯 권은 골라 오리라 예상했었는데 속으로 헛웃음만 자꾸 났었다.
문제는 그다음 이였다. 팔지 못한 책을 종이가방에 다시 넣고 세계 문학 코너로 민음사의 책들을 찾아 나섰는데 책이 너무 없었다. 겨우 열 권이 전부였었고, 그나마 1권 빠진 2권이거나 생소한 제목의 것들이었다. 기분 전환으로 왕창(?) 사오고 싶었는데 그것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가벼워진 종이가방을 들고 '서면'의 햇빛은 구경도 못한 채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 왕복 2400원
늦은 점심으로 육개장 8000원
A4 용지 수백 장 주고 A7 될법한 용지 딸랑 한 장
석가탄신일은 그저께였는데 어딘가에 적선한 느낌.
'장자'랑 계속 놀걸
아니야, 안보고 쳐박아두느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유용하게 쓰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