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에 나의 ID는 똑같이 'sungdreamer'이다.

꿈을 꾸는 성군- 이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에겐 꿈이 없다.

 

거래처의 친구는 60살만 되면 무조건 고향으로 갈 것이며,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가 가기를 꺼린다면 혼자라도 간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친구의 꿈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다.

 

" I have a dream" (마틴 루터 킹)이 나의 책상 머리맡에 붙어 있은 적이 있었다.

불을 쫓는 불나방처럼, 오직 꿈을 향해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은 새로운 꿈을 잉태하지 못하고 불에 타서 재로 변한 모양이다.

 

오늘, 누군가와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꿈이 뭔가요? 라는 간단한 물음에 나는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마치 내가 미래도 없이 막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내 꿈은 뭘까?

 

 회사의 직원들(아저씨들, 여사님들, 동생들)이 제때 월급 받고, 상여금 듬뿍 받고,  그래서 그분들의 가정이 화목하고,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 환경을 만드는 것.

이건 나의 바람이지 꿈이 될 수 있을까?

 

좌우당간, 당분간 내 꿈은 이 걸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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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일요일을 맞이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톱도 깎아보고, 웃자란 율마도 예쁘게 정리를 해주었다. 이 귀중한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궁리하다 지난주에 받은 '장자'와 놀아보기로 했다. 

최대한 게으르게, 최대한 건방진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장자'를 읽었고 팔이 아프면 저쪽으로 눕고 어깨가 결리면 이리로 눕고 앉아서 읽기도 했으며 깜박 졸아 800페이지가 넘는 '장자'가 내 얼굴을 살짝 덮치기도 했었다.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장자'에 짓눌려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창밖은 날씨가 너무 좋았고 전에부터 미뤄오던 대사(大事)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大事인 즉은, 보지 않는 아까운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파는 일이였다. 왜 大事이냐하면, '서면'이라는 큰마실까지 반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갇혀있어야하고 두더지 소굴 같은, 갈 때마다 헷갈리는 서면의 지하세계에서 알라딘을 찾아내야하는 고행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1호선 갈아타는 곳'과 '지하 상가'와 '지상으로 나가는 곳'이 어디로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보통은 가다 되돌아오기 일쑤고 운이 좋으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제대로 가고있었다. 요지경 소굴이다. 알라딘을 찾아 1번 출구쪽으로 가서 지상으로 나가려했는데, 어라~ 저 멀리 알라딘의 램프가 보인다. 지상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지하에서 만나다니, 처음 방문도 아니고 두 번은 온 것 같은데, 내가 길치인지 반문명인인지 어째든 되게 반가웠다.

 

내가 팔려고 가져간 책은, 카티아 관련 서적 두 권과 자전거를 직접 수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비책 한 권이였다. 카티아를 공부할 때 이책 저책 하나씩 사다보니 다섯 권이 되었고 그 중에서 세 권은 지은이가 같다보니 내용도 많이 중복되어 잘 보지 않게 되었고 새 책같은 두 권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내다 팔기로 마음먹었었다. 책의 표지에 적힌 정가대로라면 세 권 합쳐 팔만칠천원이였다. '많이 못 받아도 절반은 받겠지, 아니야 30%만 받아도 만족해. ㅋㅋ 민음사의 세계문학으로 골라 사 와야지' 혼자 속으로 신이 났었다.

 

 

대기표를 뽑고 잠시, 담당 직원은 갖고 간 세 권의 책을 쭉 훑었다. 표지도 조금 바랬고, 뭐라 뭐라 계속 문명화된 기계적인 억양으로 반문명인인 나에게 설명을 했었다. 결론을 말하면 한 권은 중고 재고가 많아 구매가 힘들고 나머지 두 권은 합쳐서 오천 원이니 팔겠냐?는 물음이었다. ㅋㅋ 오만오천원이 오천원, 거의 10%네. 나는 냉큼 오천원 지폐 한장을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구겨진 지폐처럼 나의 존심에 알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나? 민음사의 세계문학으로 네다섯 권은 골라 오리라 예상했었는데 속으로 헛웃음만 자꾸 났었다.

 

문제는 그다음 이였다. 팔지 못한 책을 종이가방에 다시 넣고 세계 문학 코너로 민음사의 책들을 찾아 나섰는데 책이 너무 없었다. 겨우 열 권이 전부였었고, 그나마 1권 빠진 2권이거나 생소한 제목의 것들이었다. 기분 전환으로 왕창(?) 사오고 싶었는데 그것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가벼워진 종이가방을 들고  '서면'의 햇빛은 구경도 못한 채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 왕복 2400원

늦은 점심으로 육개장 8000원

A4 용지 수백 장 주고 A7 될법한 용지 딸랑 한 장

석가탄신일은 그저께였는데 어딘가에 적선한 느낌.

 

'장자'랑 계속 놀걸

아니야, 안보고 쳐박아두느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유용하게 쓰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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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공장장이 퇴사했었다. 나의 사형이자 멘토였던 그는 퇴사와 동시에 새로운 간판을 걸고 사장이 되었다. 지금도 CNC 4대를 놓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업을 하고있다. 그 바람에 4~5명의 오퍼레이터가 입사했었고 며칠 혹은 기껏 한 달을 채우고 떠나갔었다.

내가 프로그래밍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잠 잘 시간까지 줄어들었다. 중요 업무외엔 나를 대신해 납품 다닐 기사님이 입사했다. (7월 쯤)  그리고, 사장님보다 한 살 많은 오퍼레이터가 9월에 입사했었다.(젊은 사람은 대체로 책임감이 없었다.) 지금도 계속 함께이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나의 직함은 과장이지만 공장장 업무를 보고 있다.

CNC도 2대 더 들어왔다. CNC 7대 MCT 2대가 되었다.

 

9월

나에게 아버지와 다름없는 큰형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였다.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 볼 틈도 없이 애쓰시더만,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라믹 볼을 만들기위해 밤낮없이 가마에 불을 지피고 볼을 만드시더니 공장을 크게 일으키기도 전에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반신 마비가 왔었고 2달 넘게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다. 지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입원 초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환골탈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쉽다. 힘들게 시작한 공장을 남에게 넘기고 지금은 우리 공장에 나오신다.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시고, 어떨 땐 '과장님'하고 불러 뒤돌아보면 웃으며 커피도 타주신다.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 '새옹지마'라 생각한다.

 

10월

거래처(볼트&너트) 사장님이 납품차량으로 쓰기위해 근두운을 팔라고 하셨다. 중고 매매 업자에게 나중에 파는 것보단 낫다싶어 팔기로 했었다. 하지만, 차를 팔고나면 나는 뭘 타고 다니나 걱정이였는데 사장님의 NF소나타를 양도받기로 했다. 그래서 갤로퍼, 근두운은 팔고 사장님의 소나타는 내가 타고 사장님은 HG그랜저를 구입하셨다. 사장님은 소나타를 ALL도색해서 내게 넘겨주셨다.

 

여름 한때, 김해 비행단 시설대대장으로 와 있는 철이를 신부(神父)가 된 태경이와 셋이서 만났었다.

늦여름, 성재, 범재, 광찬이 옛전우가 대전에서 1박했었다. 정말 오래가고 싶은 녀석들이다. 대전이 2011년, 부산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간 곳이었다.

 

이렇게 1주일처럼 1년이 갔다.

 나에게도 2011년은 있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5월에 누나의 지인을 통해 동갑인 아가씨를 소개받았다. 들뜬 누나도 나를 응원하며 옷을 4벌이나 사주었다. 하지만 9월까지 우린 4~5번 만났으며 매 번 만남도 반나절을 넘긴 적이 없었다. 나도 바빴지만 그녀도 알 수 없이 바빴다. 어쩔 수 없이 시골가서 포도밭을 돌봤지만, 그녀는 주말마다 산에 가 있었다. 같은 부산 하늘아래에 있는데도 좀처럼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뭔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전화 해야만 받고 전화를 먼저 거는 법이 없었다. 둘 다 시간에 쫒기는 듯했다. 나중엔 짜증이 났다. 산에 남자를 숨겨 둔 것으로 혼자 결론을 내고 연락을 끊었다. 속이 시원해졌다. 인연이 닿으면 다음에 다시 만나겠지. 좁은 부산의 땅덩어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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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윤(閏) 5월 10일, 양력 7월 2일. 

그날, 아버지께선 모내기를 위해 갈아 논 논에 물을 대기위해 어쩔 수없이 들에 나가셨다고 한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안마을의 산파가 나의 몸을 살피고, 중요한 곳을 보고나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신나게 울어 제겼다. 부끄러워서... 

5살인 작은형은 외할머니 등에 업혀 있었고 7살인 큰형은 건넌방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누나가 외할머니와 같이 밖에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분주하게 외할머니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6시 30분을 알리는 굉음을 내자 나는 또 한번 크게 울다가 고단한 인간세상에 태어남을 원망하며 잠이 들었다. 

산술에 약했던 나는 어이없게도 그렇게 윤달에 태어나고 말았다. 내가 연이어 낙방을 정기적으로하자 어머니께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몇 군데 찾아가셨는데 그들의 공통적인 지적은 나의 생일은 양력 7월 2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이유가 윤 5월이여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언제가부터 주민등록증에 등록된 번호와 상관없이 나의 생일은 양력 7월 2일이 되었다. 음력은 신경도 쓰지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년 초부터 큰형님이 39년만에 돌아오는 진짜 나의 생일이 올해라고 하셨다. 달력을 보니 7월 2일이 분명 윤5월 10일이었다. 39년만에 찾아먹는 진짜 나의 생일이라니 기구한 팔자에 눈물이 나려했다. 윤달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검색을 하다보니 나의 진짜 생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19년마다 한번씩 돌아오고 38년이 지난 올해가 두번째인것이다. 19년이 지난 다음이 나의 진짜 3번째 생일이며 3살이 되는 해이다. 참 나이도 더디게 먹는다. 외모도 더기게 변했으면 좋으련만, 옥황상제께선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19년이 지나 내가 3살이 되었을 땐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나는 장가는 갔을까? 

아이는 올바르게 잘 키웠을까? 

큰 병치레는 없을까? 

마음 맞는 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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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9-07-05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정말 의미있는 생일이네요!!!
19년이 지나 형이 3살이 되면 장가도 갔고,,,아이도 올바르게 잘 키웠을것이고,또한 큰병치레는 없이, 큰행복 가슴에 품고 살고 있죠!!! 당연히....
늦었지만 두살 생일 추카해요,,,,
정말 사는 게 바빠 연락도 못하고 죄송해요 ㅠ ㅠ

파란운동화 2009-07-0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살,4살,5살...까지 건강하게 살고자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ㅋㅋ

지금처럼, 그때까지도 나의 짜증을 귀여운 주책으로 받아주는 너그러운 동생으로 남아주기바란다.

더운 날씨에 수고하시고 건강해라.
 

'짱구' 한 봉 뜯어먹으며 사무실에 앉아있다. 

공장에서 방송대학교까지 근두운으로 날면 10분, 15분이면 도착한다. 오전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 다시 공장으로 왔다. 강의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저녁에 다시 갈 생각이다. 공장 주변은 휴일이라 조용하지만 도서관만큼 집중력은 생기지않는다.  

기말고사는 28일이다. 20일이 남았다. 5과목중에 전공과목인 '경영학개론'만 진도가 조금 나갔다. '경제 원론', '대학 국어', '세계의 역사', 컴퓨터의 이해'를 해야한다.  일을 마치고 8시에서 11시까지 도서관에서 3일동안 공부를 했었다. 진도는 더디게 나갔고, '진작에 도서관에 와서 공부할걸'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남은 20일이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20일동안만  개발품이나 불량발생 건없이 조용하게 흘러가기를 바란다.  

시험에 대한 부담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지난 주는 거진 울상이 되어보냈는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외롭게 외국생활을 했지만 꿈이 있어 버텨낼 수 있었다는 젊은 발레리나의 진부한 공익광고를 들었다. 이런 식상한 얘기가 ,그순간,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공장엔 끊임없이 일이 들어와서 항상 일이 있고, 연로하시지만 항상 내 걱정에 여념없는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내가 하고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시가 넘도록 일이 끝나지않아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짜증만 내다가 막상 일을 마치면 피곤해서 TV를 보다 그냥 잠을 청해버렸는데, 일이 있음에 감사하고 짜증만 내지않았다면 일을 마치고 기분을 새롭게 해서 30분, 1시간이라도 공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일이 늦게 끝나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 이상으로 짜증을 내서 심신이 피곤해진 탓이라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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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9-06-1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잘치삼! 홧팅

파란운동화 2009-06-1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엿 안주나?

2009-06-3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저씨 안녕! 진짜 오랫만이다. 그죠?
저두 요새 회사에서 마케팅공부하래서 하는데 어렵긴해도 재밌더라구요. 내후년엔 경영대학원쪽으로 공부할려고 생각중인데, 아저씨 공부하는거 보니까 엄두가 안나네.
홈페이지는 도메인연장신청안해서 이제 영영 사라졌고, 대신 새로운 블로그 주소. 제 아이콘 누르면 연결될꺼에요. 6월 7일 쓴 글이니까 이제 시험은 끝났으려나.
종종 연락하구 그래요, 가까이 살면 가끔만나 술한잔 할텐데, 맞다, 저 8월에 한달 몽땅 쉬는데 부산 한번 뜰께요. 회 사주실꺼죠?

파란운동화 2009-07-0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씨란 호칭이 많이 거슬리긴 하지만,정말 많이 반가워요. 많이많이
잊지않고 찾아주시니 너무 고마워요. 내가 먼저 안부도 묻고해야하는데 마음같이 잘안되네요. 한살이라도 어린 수진씨가 지금처럼 가끔(조금은 더 자주)연락해 줘요.
제가 알기로는 술을 전혀 못하는걸로 아는데 조금 늘었나요. 맛있는거 얼마든지 사드릴께요.
이상하게 수진씨와 있으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8월에 저 좀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