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어떻게 쓸까? 

- 이규보의 〈論詩中微旨略言〉

 

#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는 정민교수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올립니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論詩中微旨略言)〉은 시창작의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 글이다. 800년 전 시인이 말한 시창작상의 여러 문제를 오늘에 비추어 읽어보면 어떻게 읽힐까? 따라 읽기 방식으로 이규보의 글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1] 대저 시는 뜻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은 또 기(氣)가 중심이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가 저열한 자는 글을 꾸미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뜻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 대개 그 글을 아로새기고, 그 구절을 꾸미면 어여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 함축하여 깊고 두터운 뜻이 없고 보면 처음엔 볼만해도 두 번만 읽으면 맛이 다하고 만다.
 
시의 출발은 뜻[意]에 있다. 어떻게 쓸까 보다 무엇을 쓸까가 먼저다. 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글이 다 그렇다. 생각이 정해지면 표현은 저절로 따라온다. 추상적인 생각의 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기(氣)다. 기는 마음 속에 쌓인 기운, 즉 생각을 펼쳐가는 힘이다. 무엇을 쓰겠다는 구상만으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운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좋은 시는 이런 기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머리 속의 생각만으로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을 끌고 나가는 힘은 기에서 나온다. 많은 독서와 여행의 체험이 이 기운을 길러 준다. 그런데 그 기는 인위적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일정 부분 타고난다.
 
기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노력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기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노력 없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양기(養氣) 공부, 즉 기를 기르는 공부를 중시했다. 기는 어떻게 해야 길러지는가? 뜻이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양기 공부를 위해 구방심(求放心)과 무자기(毋自欺)의 수양에 힘을 쏟았다. 마음이 제 멋대로 놀러 나가지 않도록 방심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면 마음 속에 호연한 기상이 차곡차곡 쌓인다고 믿었다. 
 
시론 책을 열심히 읽고, 시창작 교실을 열심히 다닌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 법은 없다. 이론을 몰라도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가 부족한 사람은 기교로 제 부족한 부분을 덮어 가리려 한다. 뜻이 서지 않은 채 기교를 앞세우면, 처음엔 사람의 눈을 놀래키지만 금세 싫증이 난다. 한 두 번은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천박한 바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쥐어짜듯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고, 처음엔 그럴 듯 하다가 두 번만 읽으면 혐오감이 느껴지는 시가 있다.   
 
[2] 비록 그러나 스스로 먼저 운자를 정하되, 뜻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고쳐도 상관없다.

다만 남의 시에 화답할 때는 만약 험한 운자가 있으면 먼저 운이 맞는 가를 따진 뒤에 뜻을 얹는다. 이때는 차라리 그 뜻을 뒤로 돌리더라도 운은 알맞게 놓지 않을 수 없다. 대구를 맞추기 어려운 구절은 한동안 생각해 보아 쉬 얻을 수 없을 것 같으면 즉시 떼어버려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옳다. 왜 그럴까? 그 시간이면 전편을 얻기에도 충분할 터이니, 어찌 한 구절 때문에 한편을 지체시키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시의 창작은 운자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운자는 한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이 규칙도 펼치려는 뜻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운자를 화답할 경우에는 운의 조화가 중요하므로, 뜻에 대한 배려를 조금 뒤로 할 수도 있다. 지훈이 〈완화삼〉에서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라고 하자, 목월이 〈나그네〉에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로 받은 것이 그것이다.
 
한시는 구절과 구절 사이의 호응을 중시한다. 대개 먼저 떠오른 한 구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1구부터 차례로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3,4구나 5,6구를 먼저 지은 후 앞뒤로 채워 나갈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한 구절에 집착하여 전편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점은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문득 떠오른 한 구절은 시 창작의 계기를 마련해주지만, 그 첫 번째 느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3] 시간에 맞추어 서두르면 시가 군색해진다.

처음 구상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면 헤매게 된다. 헤매다 보면 집착하게 되어 통하지 않게 된다. 다만 출입하고 왕래할 때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며, 앞을 보면서도 뒤를 돌아보아 변화가 자재로운 뒤에야 막히는 바 없이 원숙하게 된다. 혹 뒷 구절을 가지고 앞 구절의 잘못된 부분을 구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구절의 타당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니, 이점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 지은 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 지나친 생각은 시를 엉겨붙게 만든다. 이것을 제재로, 혹은 이런 주제로 시를 지어야지 하고 작정하면 그 생각에 빠져 얽매이고, 탈출구를 찾아 헤매이다 보면, 이것이 집착이 되어 생각이 꽉 막힌다. 시는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설계 도면에 따라 제작할 수도 없다.
 
구절마다 모두 좋으려 들것도 없다.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뛰어나면 다른 부분이 혹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시에도 치고 빠지는 리듬이 있다. 강약중강약의 호흡이 있다. 뻣뻣하기만 하면 부러지고, 부드럽기만 하면 물러터진다. 어깨에 힘을 빼고 전후좌우 경쾌한 행보를 유지해야 한다. 시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는 전체의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분의 완결성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4] 오로지 청고(淸苦)하려고만 하는 것은 산에 사는 중의 격식이다.

곱고 어여쁜 것으로만 꾸미는 것은 궁녀들의 격조다. 능히 청경(淸警)·웅호(雄豪)하면서도 연려(姸麗)·평담(平淡)할 수 있어야만 갖추어진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남들이 한 체재로 이름지을 수가 없다.
 
고기를 먹지 않는 중처럼 맑은 소리만 한다고 좋은 시가 아니다. 궁녀의 하소연처럼 분단장 냄새가 나는 곱고 여린 것만으로도 안된다. 때로는 호방하고, 어떤 때는 섬세하고, 간혹 덤덤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다양해야 한다. 한 색으로 갇히면 그 시는 끝난다. 등단해서부터 늙어서까지 똑같은 목소리만 내고 있다면 그 시는 죽은 시다.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데 시만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젊은 날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시라고 발표하는 시인은 보기에 차마 민망하다. 차라리 붓을 꺾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끊임없는 자기 복제는 답보의 표징일 뿐이다. 

 시는 부단히 변하면서 늘 변치 않아야 한다. 나만의 색깔을 지니되, 그 색깔이 한결 같아서는 안된다. 늘 같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그런 시, 남들이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시가 살아 있는 시다.
 
[5] 시에는 아홉가지 마땅치 않은 체(體)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다. 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수레 가득 귀신을 실은 체`다. 옛 사람의 뜻을 취해오는 것은 도둑질을 잘해도 하기 힘든데, 도둑질 마저 시원찮을 때 이를 `못난 도둑이 쉽게 붙잡히는 체`라 한다. 어려운 운자를 쓰면서 근거가 없는 것, 이것은 `쇠뇌를 당기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체`이다. 그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운자를 씀이 지나치게 되면 이는 `주량보다 넘치게 술을 마신 체`이다. 험벽한 글자 쓰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쉬 현혹시키는 것, 이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이다. 말이 순하지 않은데도 굳이 인용하는 것은 `남더러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체`다. 일상어를 많이 쓰는 것은 `시골 사람이 모여 얘기하는 체`이고, 꺼리는 말을 잘 범하는 것은 `높고 귀한 분을 능욕하는 체`이다. 말이 황당한데도 깎아내지 않으면 `잡초가 밭에 가득한 체`이다. 이런 마땅치 않은 체를 면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가 있다.  
 
앞선 시인의 구절을 슬쩍 끌어다 쓰거나, 감당치도 못하면서 근거없는 큰 소리를 쳐대는 것, 그럴듯한 표현으로 남의 이목을 현혹하고, 아닌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 되는대로 떠들고 황당한 말을 해대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의 적이다. 한유는 사필기출(詞必己出)이라고 했다. 반드시 자기의 목소리를 내라는 뜻이다. 또 진언지무거(陳言之務去)를 강조했다. 남이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해진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란 것이다. 두보는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즉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마다 신기한 말을 쓰고 작품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을 담으란 말은 아니다.
 
대개 시의 병통은 알맹이 없이 폼만으로 어찌 해 보려 할 때 생겨난다. 이들은 암호문과 상징 은유를 구분하지 못하며, 설교와 주제의식을 혼동한다. 누구도 모를 소리를 하면서 독자의 낮은 수준을 개탄한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 시를 자기가 해설한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구덩이를 파놓고 어리숙한 독자를 인도하는 시, 알량한 권위를 내세워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시, 감당도 못하면서 주제만 고상한 시, 슬쩍슬쩍 베껴와 짜깁기한 시는 지금도 너무 많다. 그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인간과 시가 따로 노는 시다.  
 
[6] 남이 내 시의 병통을 말하면 기뻐할 만한 점이 있다.

말한 것이 옳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뜻을 따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부하여 끝내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겠는가? 무릇 시가 완성되면 되풀이 해서 살피기를, 대략 자기가 짓지 않은 것처럼 살펴 보고, 마치 다른 사람이나 평소에 몹시 싫어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그 흠집을 즐겨 찾되, 오히려 흠을 알지 못하게 된 뒤에야 발표할 일이다. 대저 논한 바는 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문장 또한 비슷하다. 하물며 고시는 문구가 아름답고 압운이 끊긴 것 같은 것을 좋게 여긴다. 뜻이 아름답고 여유롭고 말 또한 자재로워야 얽매이지 않게 되니, 그렇다면 시나 문장은 또한 한 가지 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시를 두고 나쁘게 말하면 발끈한다. 칭찬하면 실상보다 지나쳐도 흐믓하기만 하다. 남의 지적을 들으면 우선 기뻐할 일이다. 그 말을 들어 옳게 여겨지면 따르면 그뿐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면 된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에 빠지고 만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작심하고 흠집을 찾아내서 과감히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꼴보기 싫은 사람의 시를 흠잡는 기분으로 자기 시를 냉정하게 비판하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발표한다. 이것은 비단 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산문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사람 사는 일도 한 가지다. 남의 허물은 잘도 잡으면서, 자기의 허물은 슬쩍 눈감아 버린다. 남의 칭찬에는 그리도 인색하면서, 누가 제 칭찬이라도 하면 금방 입이 벌어진다.
 
정지용은 〈시와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꾀꼬리 종달새는 노상 우는 것이 아니고 우는 나달보다 울지 않는 달 수가 더 길다." 또 이렇게 말했다. "시가 시로서 온전히 제자리가 돌아빠지는 것은 차라리 꽃이 봉오리를 머금듯 꾀꼬리 목청이 제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하는 것이다." 되는대로 떠드는 것은 시가 아니다. 읽어 모를 시는 시가 아니다. 풍경이 떠오르지 않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고, 늘상 보던 사물인데 처음 보는 듯하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나 말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시가 시다. 살아있는 진짜 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2-06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02-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멋진 비유입니다.자본의 불길과 '자성'이라... 역시 '나침반'이나 '인간'이나 제 역할을 하려면 '자성'이 필요하네요....
... 아...제가 처음 글을 올렸나요.^^ 지난 번 샘들 모임에 엉겁결 초대를 받았지만 못갔던 '드팀전'입니다.^^ 다음 번 모임에서는 꼭 뵙겠습니다.

해콩 2007-02-0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안녕하세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몰랐네요. 지난 번 모임에 오시기로 했군요. 글샘님 사주신 저녁도 맛있었고, 느티나무님 쏘신 차도 좋았구요, 무엇보다 이야기가 좋아서 10시 넘어서여 헤어졌답니다. 담번에 꼭 뵈어요~ ^^
 

21111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antitheme 2007-02-02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1111

축하드려요,


해콩 2007-02-0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제가 잡으려고 했는데 늦었구만요.. 감사 감사~

조선인 2007-02-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1113

물만두 2007-02-0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11116

글샘 2007-02-02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11119

369 game


2007-02-02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사람과 땅

The person and the land which become happy through education




교육이 미래다


교육의 목적은 성적을 높이는데 있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육은 마치 성적 높이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학교도 가정도 성적에 연연하고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이니 국가와 사회, 가정과 개인이 땀흘려 노력한 결과, 좋은 성적 거둘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무한경쟁상대이니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승자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서 진정한 승자는 학교를 떠나 삶의 현장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이다.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학교가 되어야 하며, 살아가는 힘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교육은 풍류를 회복해야 한다. 신바람, 흥, 멋, 움직임, 노래, 춤들이 살아나야 한다. 거리의 건전한 끼가 학교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거리도 좀 더 유용하고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나의 가능성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나라! 학원을 가더라도 지필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가는 나라! 사교육비가 세계에서 제일 적게 들어 부모들의 지갑이 두둑해지는 나라! 이 땅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여 농구도 하고 하이킹도 가고 청소년회관에 가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마냥 행복한 나라! 그래서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이런 미래를 꿈꾸어 본다.

  이번에 발간하는 작은 책자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사람과 땅’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모범답안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은 책자를 통하여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우리나라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점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 여름


전라북도교육감 최 규 호



한국어를 어설피 아는 외국인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사실에 달갑지 않은 시선을 가진 그가 한국인들과 대화 중에 의아해 하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애 먹었어’ 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애(아이)도 먹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이 애를 먹는다는 오해를 받고 있음을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애먹으며 살고 있는 셈이다.

사교육비 부담율 세계 1위!

그렇게 해서 대학에 보낸 자녀의 1년 간 대학 등록금이 1,000여만원 하숙비와 용돈으로 한달 100만원이 넘는 돈을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자녀에게 보내는 지방의 아버지 그는 1년 동안 2,000만원이 훨씬 넘는 교육비를 써야 한다.

자녀가 둘이거나 셋이면 두 곱, 세 곱 더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참 힘들다



1. 키 작은 거인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적응 기간이 끝나고 난생처음 시험이란 것을 보았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에는 100점 맞은 시험지가 들려져 있었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뻤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책가방을 휘돌리며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엄마에게 큰소리로 자랑한다.

  “엄마, 나 100점 맞았어”

  이때 엄마의 반응은 가지각색이겠지만 상당수 엄마들은 이런 반응을 나타낸다.

  “네 짝은 몇 점이니?”

  아이는 자기 짝까지 걱정해주는 엄마가 고마워서 더욱 큰소리로 대답한다.

  “응, 내 짝도 100점이야!”

  엄마가 말한다.

  “시험문제가 쉬웠나 보구나!”


풀려있는 엄마의 눈빛이나 냉소적인 말투에서 상처를 받은 아이는 이와 같은 몇 번의 반복적인 일을 겪은 후 더 이상 책가방을 흔들지도 시험지를 들고서 집에 뛰어오지도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의 엄마는 100점을 맞은 아이에게 왜 이렇게 냉소적이어야 하는가? 아이의 엄마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남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우리 교육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남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에 쏠리게 된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여러 사람이 100점을 맞아오는 관계로 ‘학교 진도 앞지르기 교육’을 서둘러서 시킨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더 빨리!’와 ‘더 많이!’라는 비방책을 쓰기도 한다. 


  놀이 공원에 가서 작은 키의 제한에 걸려 놀이 기구를 타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여러 종류의 학원과 과외, 학습지 등으로 잘못된 몸집을 부풀리는 ‘키 작은 거인’이 되어가고 있다.  



2. 이대로의 모습으로


  언론에 보도된 중학교 여학생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와 유명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 인성 바르고 머리도 좋은 모범적인 딸이 있었다. 언제나 바쁜 부모들 못지 않게 딸도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 세 가족은 서로가 바빴기 때문에 얼굴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처럼 만나게 되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못내 아쉬움을 표해야만 했다.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네, 아빠!”

  “아빠는 널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단다. 딸아!”

  “고마워요. 아빠!”

  “사랑하는 딸아! 아빠는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어. 다만 한가지 네가 전교 1등을 한번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이들 부녀간의 대화는 며칠 뒤 어머니와도 이어졌다.  


  “엄마는 너에게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단다. 엄마를 위해 전교 1등 한번 해줄 수 있니?”

  “네.”


  착한 딸은 부모님의 바램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오직 전교 1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교 1등을 했다. 아이의 인간성이 좋았던 연유로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친구도 없었다. 선생님들도 반 아이들도 모두 진심으로 1등을 축하해 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책상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대로의 모습으로 절 기억해주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더 말하는 것은 망자에게 누가 될까봐 이야기를 여기서 접을 따름이다.


  모든 부모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공부를 잘해야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래서인지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1등이나 그에 버금가는 성적을 유지하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정서이다.



3. 지름길 공부는 이제 그만


  공부에서 진정한 승자는 학교를 떠나 삶의 현장으로 나갔을 때, 그 곳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이다.


  세월이 흘러 학창 시절의 성적이 덧없는 추억으로 아련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 성적 높이기에 열심인 한국식 공부가 처음에는 두각을 내는 듯하나 결국 세계무대에서 먹히지 않는 이유가 있다. 10개의 수학문제를 내놓고 풀라고 하면 한국의 학생들은 후닥닥 문제를 푸는데 이 모습을 서구나 유럽의 학생들은 경이로운 묘기를 보듯 바라만 볼 따름이라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은 ‘지름길’ 중심의 공부를 한다. 그러나 서구의 아이들은 미련해 보일 정도의 과업 수행 공부를 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차이가 대학에 가면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 나라 대학생들이 국가간 경쟁력에서 너무 뒤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에서 간혹 한국의 유학생이나 교포들이 만점 또는 수석을 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것이다. 그들이 다음 단계에 겪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미국에서도 입시 학원, 과외 등을 통해 지름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대학에 가서 중도 탈락하거나 몇 년씩 졸업이 늦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식 공부가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뒤에야 공부 방법을 바꾸고 졸업을 하게 된다.


  한국식 공부 방법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 방법이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요약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따기보다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와 발상을 통하여 진정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공부 방법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에 나올수록 유용하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양의 공부를 하며 시간과 함께 물질을 허비한다. 중3 또는 고3의 수험생을 한번이라도 겪어 본 부모라면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며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왜 그들이 학원으로 가는가?


  우리나라가 세계 순위에서 1위를 달리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수주율. 청소년 흡연률, 교통사고 사망률, 사교육비 부담률 등이다.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사교육비 부담률이다. 학교 수업료가 두 세배 오른다해도 학원에만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중산층 아버지들의 푸념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사교육비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지출하면서도 토익 순위 세계 111위를 하는 교육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학교가 끝나고 새벽 두시까지 학원에 가 앉아 있고 싶은 학생이 있겠는가? 1인당 국민소득 10,000$ 나라의 고급 교육을 받은 엄마들이 파출부를 하며 학원비, 과외비를 만들고 있는 불합리가 어디 있겠는가? 왜 그렇게 학원으로 가고 있는가?

  

  근본적인 이유는 ‘한 줄 세우기식 입시’에 문제가 있다. 줄서기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줄의 맨 앞에 서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잘 알고 있다. 출세의 티켓을 확보하는 듯한 한 줄 세우기식 입시는 빨리 사라져야 한다. 지금의 입시제도는 시골에서 공부한 아이들에게조차 서울 강남의 학원에 가서 배워야 푸는 유형으로 시험을 치르게 한다. 문제를 읽어 나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학원에 가서 배우라는 식이다. 입시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는 식이다.


  서울 8학군 아이들에게 시골의 토종으로 진술된 문제를 풀게 하면 그들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저항이 거셀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말은 다양한 입시 제도가 활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이 보는 시험 문제, 도시 서민층이 보는 시험 문제, 기득권층이 보는 시험문제, 노는 아이, 거리의 아이, 노래부르는 아이, 음식 잘 만드는 아이, 게임에 정신 팔려있는 아이 등이 입시에 관련한 각종 평가에서 존중되어져야 한다.


  그들의 강점이 부각되어 신바람 나서 풀 수 있는 시험 방식을 채택해야 할 일이다. 뭐든 전문가가 되면 돈이 되는 세상이 아닌가? 입시는 아직도 봉건 시대부터 줄곧 채택했던 지필 위주의 관료를 뽑는 평가를 취하고 있다.


  지금의 입시에는 찬란하게 휘날리는 기득권자들의 깃발만 보일 뿐이다. 지방의 초․중등학교와 대학들이 모두 쇠락하고 기득권자들의 자리 지킴만 있는 나라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속칭 ‘안전빵’이란 말을 영원히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 줄 세우기 평가’가 너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평등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린 사고를 가진 학생들이나 뜻이 있는 교육 선각자들에게 물어 보자. 그들은 실현가능성이 지극히 있다고 하고 평등한 방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선발한 학생들이 전국 어느 대학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각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신명나는 학교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입시는 점수 서열로 학생을 뽑기 때문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도 고만 고만한 학생들이 모여 고만고만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학의 모습이다.


  그곳에는 초점 잃은 눈빛들이 방향성을 잃은 채 무한 가치가 있는 귀중한 본인만의 재능을 사장시키고 있다.


  대학은 이제 싸구려 인력 송출업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 안주하며 자리 지키기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한사람이 백만 명의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두뇌 혁명의 선발주자들을 길러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진정한 인물을 원하고 있다.


  진정한 리더의 안내를 받으며 이 땅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여 농구도 하고 하이킹도 가고 청소년회관에 가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마냥 행복한 나라! 학원에 가지 않아도 나의 가능성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나라! 학원에 가더라도 지필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가는 나라! 사교육비가 세계에서 제일 적게 들어 부모들의 지갑이 두둑해 지는 나라! 그래서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이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5. 교육은 시스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새치기’란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오죽하면 공중전파를 타고 새치기를 하지 말자는 공익광고가 전국에 방영되었을까?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새치기라는 말이 추억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시절의 광고방송을 다시 본다면 모두가 입에 빙그레 실웃음을 머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시에는 이 ‘새치기’가 아직도 존재한다. 선행학습이 새치기이고, 과외, 학원수강이 새치기이다. 미리 배워 가지고 와서 정상적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앞줄에 가서 서는 격이다. 이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왜 학원으로 학생들을 내모는가? 그러면서도 불안해하는가?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안정된 시스템에서는 새치기가 영원한 이탈을 뜻하기 때문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


  은행의 번호표를 뽑는 것은 단선형 시스템이다. 은행에 가서 새치기를 꿈꾸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차례를 인지하고 순응한다. 그 옛날 번호표 시스템이 없었을 때 은행에서 줄서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자기 줄에 서서도 옆줄의 상황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혹시 유난히 짧은 옆줄로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 줄이 대출을 상담하는 줄이어서 곤혹을 치러본 사람이면 지금의 은행 줄서기 시스템에서 무한히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선진국의 화장실 줄서기는 복선형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화장실에 가면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하나 있다. 어쩌자고 사람들이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 모두 들어가 소변기 마다 줄을 서서 앞사람의 실례하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있는지? 혼잡스럽고 즐겁지 않은 풍경임에 확실하다. 이런 화장실 시스템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밖에 사람들이 한 줄로 서있고 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다른 한사람이 들어간다. 소변기 앞에는 늘 한 사람 만이 서있다. 번거롭지 않으나 빠르고 개인의 프라이버시까지 존중되는 시스템이다.

  

  공항의 평면 에스컬레이터는 다선형 시스템이다. 통로가운데로 커다란 평면 에스컬레이터 하나만을 놓았는데 이것이 훌륭한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걷고 싶은 사람은 에스컬레이터와 관계없이 걷고, 에스컬레이터로 편하게 가고 싶은 사람은 그위에 올라 서 있으면 된다. 그 나마 바쁜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의 위를 걷거나 뛴다. 충돌이나 새치기가 일어나지 않고 승객을 태운 수백 편의 비행기가 하루동안 뜨고 내린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혼란스러운 것은 시스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교육으로 행복해지기를 진정으로 꿈꾼다면 ‘신뢰’라는 장치를 한 시스템의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6. 차라리 바람에게


  시스템은 환경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시인 서정주는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시스템은 자연이었다. 무간섭이었고 악조건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뒤로하고서라도 이 시는 혀가 내둘러지는 천재적인 발상이며 진실한 고백이다.


  히말라야 산 밑에 가면 ‘부탄’이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조그마한 벌레마저 죽이는 것을 꺼려하는 품성을 지녔다 한다. 범죄라는 것은 개념조차 없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인지 서방에 있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였을까? 그것은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테레비전에 상영되는 온갖 종류의 상황들이 히말라야산의 하얀 눈처럼 깨끗한 ‘부탄’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은 학생들이 학습부담을 무겁게 느끼고 사교육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주대학교에서 2004년에 실시한 고3 학생의 학습 성향 설문에서 40.4%의 학생들이 핵심과목이나 과목 전체적으로 사교육이 더욱 필요해졌다고 응답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입시다.

  앞에서 언급한 시스템의 불안이다.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는 늘 바뀌는데 시스템의 핵심인 평가는 변하지 않으니까 옛날의 모든 상황에 새로운 교육과정까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평가 방법은 그대로 두고 입시제도만 갈수록 복잡해지는 반면 학교는 대입 지도에 있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보니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가 계속 높아지는 것이다.


  학교가 입시 지도를 못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것이 공교육 체제하의 입시인가? 학교가 못하면 어쩌란 것인가? 지금 당장 학원으로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는 입시 제도의 개선이 아닌 평가 방법의 개선책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자신이 없으면 시인처럼 부는 바람에게 아이들을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7. 새로운 관계의 회복


  진정한 관계(Relationship)는 어떻게 회복하는가? 한사람과 한사람이 진실하게 관계하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를 시도해야 한다. 행복한 학교 만들기를 위한 4단계의 관계 회복 방법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구(ask)의 과정이다.

  요구는 1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임신하고 장차 태어날 2세를 위해 정석 수학과 종합 영어 공부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부부는 이미 태어날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에 욕심 많은 엄마, 아빠와 수많은 요구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요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아무런 의미를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나 부모가 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면 그들 사이에는 관계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진 요구는 상대에게 부담과 상처를 주지만 정당하고 적절한 요구는 서로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관계 요소이다.


  둘째, 대화(dialog)의 과정이다.

  대화는 2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대화가 되고 있다면 희망적이다. 조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이 막히는 것을 대화가 안 된다고 한다. 대화가 되지 않을 때 그들간의 관계는 단절이다. 어려운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셋째, 이해(understanding)의 과정이다.

  이해는 3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제대로 된 이해는 해석 능력과 분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대화를 통한 정보의 공유와 인간애를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 이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할 수가 없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며 대부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행정가와 교사, 기관과 기관 간에 더 성숙한 관계를 위해 서로를 이해(understanding)하는 가르침과 교육 행정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널 이해한다.’는 말을 그리 쉽게 써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동행(going together)의 과정이다.

  동행은 4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으로 단 한 명의 동행자만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행복 추구’에 있다. 말을 바꾸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동행(going together)하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동행은 관계의 완성이다. 이들은 아낌없이 주고받는 사이일뿐더러 매력적인 인성과 리더쉽을 최대한 발휘하여 향기로운 삶을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학교 현장에 다음 같은 질문을 해본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가?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자녀 사이에 따뜻한 대화가 있는가?

․학교와 가정, 교육 당국과 학교 기관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동행하는 동반(Company)의 관계인가?



8. 교실 수업에 최선을 다하기


  정부에서 여러 가지 공교육 정상화 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중 핵심적인 내용이 EBS교육 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사교육비 절감 방안이다. 이 방법은 단지 사교육비 절감 방안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사교육에 빼앗긴 아이들 공교육으로 다시 데려오기가 맞다. 그것도 일시적이다. 사교육의 유명 강사들이 그들의 방법으로 하는 강의를 빌려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교실에서 EBS교육 방송과 인터넷으로 학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가 있다.


  교실의 수업에서 행복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육청에서 매번 실시하는 장학 지도도 수업에서 방법을 찾고 수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수많은 계획들과 양적인 실적물들이 수업을 방해하고 일선학교의 교사들의 불만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학과 평가, 보고서들이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야됨도 인지해야 한다.


  보고서와 사례집의 질을 높이고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편하게 느낌을 받으며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보급해야한다. 지금의 책자들은 누구더러 읽으라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다. 너무 어렵고 지극히 주관적이며 실적 중심이다. 거기에 산만하기까지 하다. 아마 전국적으로 발간되는 자료집의 발간 경비는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본다.


  학교의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고 그 요인을 찾아 원인을 해소하고 지원해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교육당국의 임무이다.


  이런 말이 있다. 30%는 알고 있어서 자고 30%는 몰라서 자고 40%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느라고 눈을 뜨고 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중․고등학교의 교실 모습을 풍자해서 한 말이다. 또, 어떤 학부모는 그럴 바에는 학원을 낮에 하고 학교를 밤에 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비약된 말이다. 이 말에 강하게 반발하는 교사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말이 왜 회자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9. 좋은 수업은 선생님의 몫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는 좋고 누구는 안 좋다면 그것은 진정 좋은 것인가? 좋은 것은 누가 보아도 좋아야 한다. 누가 봐도 좋은 수업은 어떤 수업인가? 이런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업은 재미(樂)가 있어야 한다. 어른들에게 재미없는 영화를 한시간 동안 보라고 하면 투덜대고 졸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수업이 한 시간 진행되고 있다면 그 아이들의 심정을 해아려볼 필요가 있다.


  마술 쇼 같은 수업! 하지만 그것들은 지극히 교육적이어야 하며 교육원리를 존중해야한다. 따라서, ‘개그 콘서트의 봉숭아학당’은 그리 좋은 수업이 되지 못한다.


  좋은 수업은 움직임(動)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이 활동 중심이라서 가 아니다. 교훈적이라면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제격이다. 목사님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움직이고 싶어한다. 이것을 역동성, 다이나믹,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늘 흐름 속에 머무는 아이들을 “STOP"이란 정서 쪽으로 이끈다면 얼마나 이율배반인가?


  좋은 수업은 생각(思)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수업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수업이 끝나면 잔잔한 감동이 교실에 머물러야 한다. ‘수업이 왜 안 끝나지?’ , ‘선생님, 이제 그만 해요?’ 등의 생각이 아니다. ‘맞아,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해!’ , ‘그렇구나! 그렇게 푸는 거구나!’ ,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와 같은 생각이다.


 따라서, 행복한 학교 만들기의 결정적인 키워드를 교사들이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10. 신명나는 교육을 생각하며


  문명은 어둠에 대한 밝음이다. 밝음을 지속시키기 위한 인간의 공동체를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문화이다. 화(化)란 변화요 새로운 생명력의 끊임없는 유입이다. 이것은 결국 새로운 복합체를 형성한다. 이를 전승하는 곳이 가정이고 사회이고 학교이다.

  새로운 생명력은 풍류라 말할 수 있다. 바람이고 움직임이다. 풍류는 신바람이고 흥이고 멋이다. 노래이고 춤이며 신명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에게 도도히 흐르던 문명 전승의 매개였다. 풍류와 대응되는 개념이 도덕이고 규범이며 절제라면 건강함은 이것들의 적절한 조화에서 나온다. 건강은 중용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는 것이든 과(過)한건 건강하지 않음이다.


  이야기를 교육과 연계시킬 수 있다. 행복하고 신명나는 학교는 우리의 꿈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 학교 교육은 너무 점잖게 시작되었다. 앉아서 천자문을 암기하고회초리를 두려야해야 했다.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학교도 그리 신나지 않다.


  회초리는 사라졌지만 잘못된 기 살리기와 시스템이 잘못된 입시가 학교를 누르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네모난 수박을 방영하고 있었다. 그 수박은 스트레스의 덩어리다. 곤(困), 피곤하다는 글자이다. 나무를 가두어 놓았으니 얼마나 답답하랴! 크는 아이들을 가두고 있는 담장같은 누름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학교의 곤(困)한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풍류를 회복해야한다. 신바람, 흥, 멋, 움직임, 노래, 춤들이 살아나야 한다. 거리의 건전한 끼가 학교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거리도 좀더 유용하고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 내야한다.


  유명한 건축가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는 고백하지 않았던가? 거리는 나의 환상과 현실의 학교(my school of fantasy and reality)였다고! 거리로부터 배운 그는 다시 거리를 변화시켰다. 그는 고향 꾸리찌바시의 시장을 세 번이나 했고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다.


  그는 브라질에서 가장 존경받는 행정가로 고향을 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인 생태 도시로 변화시켰다. 결국 생활과 교육은 가능한 일치되어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교육과정에 다소 풍류적인 요소를 가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곱 번에 걸친 교육과정의 개편에서 점차적인 풍류의 회복을 시도한다. 멋을 부리고 흥에 겨워해도 되는 제도적 장치도 만들어 보려 시도하고 있다. 이점이 부담스러움으로 다가오기까지 할 정도이다.


  하지만 아직도 도덕적이고 규범적이고 절제를 강요하는 면이 너무 강하다. 어느 것이든 지나친 것은 건강함을 잃게 한다고 했다. 우리의 학교는 더 풍류 적이어도 좋다. 아니 마음껏 풍류 적이어야 우리 교육의 건강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만의 심오한 사색과 지혜, 단순(Simple)과 깊은

뜻(意味) 등이 학교 안에 녹아 있어야 한다.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은

  우리의 참 소망이다.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학교가 되어야하며

  살아가는 힘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혜덕화 2007-02-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_()_

프레이야 2007-02-0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 회복을 위한 4단계, 특히 새깁니다.
요구, 대화, 이해, 동행.
 

[서 면 진 술 서] 

 

위 본인은 2007년 1월 26일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여 진술함에 있어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서면진술서를 제출합니다.


이 징계가 얼마나 부당하고 졸속적인 행정처분인지는 다른 선생님들께서 충분히 진술하시리라 생각되므로 저는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언급만 잠시 하려합니다.


지난 1월 9일 부산광역시 교육감님이 제게 보내신 [교육공무원 징계의결 요구서]에 기록된 징계사유는 이러합니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소속상관의 직무상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고, 소속상관의 허가 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직장을 이탈하지 못하며, 노동운동 기타 공무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됨에도 불구하고 상기교사는 2006. 11. 22.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주최한 교육현안 관련 연가투쟁에 참가하여 복종의 의무, 직장이탈금지의 의무, 집단행위 금지의 의무를 위반함'


아울러 징계의결요구권자의 의견에는 '위의 위반 사유와 같이 국가공부원법 제56조 (성실의 의무), 제57조(복종의 의무), 제58조(직장이탈금지의 의무), 제63조(품위유지의 의무), 제66조(집단행위금지의 의무)를 위반하여 동법 제78조(징계사유)에 해당하여 경징계 의결 요구함'


우선 '소속상관의 직무상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고' 에 관한 부분입니다. 2006년 11월 21일, 제가 저의 학교 다섯 분의 선생님과 함께 근무상황부에 ''전국교사결의대회참가'라는 사유로 익일의 연가를 신청했을 때, 저는 소속상관-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이에 관한 어떠한 '직무상의 명령'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분께서는 그날따라 하루 종일 저와 얼굴 한 번 마주친 일이 없습니다. 교감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교육청 공문 중에  '전국교사결의대회'에 참가하지 않도록 하고 연가결재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납니다. 이 공문에 근거하여 소속상관인 교장 선생님께서 당연히 해당교사를 불러 '불참을 명령'했으리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제가 알기로는 저희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학교에서도 이러한 절차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직무상의 어떠한 명령'도 없었으므로 '소속상관의 직무상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징계사유는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소속상관의 허가 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직장을 이탈하지 못하며'  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는 교사의 연가권과 관련 있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 모든 교사는 1년에 일정기간 연가를 낼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연가를 낼 때 저희 교사들은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업결손이 없을 경우 연가의 결재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11월 22일 연가를 예상한 저는 이미 두 주 전부터 여러 선생님과 수업을 바꾸어서 했습니다.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각각 몇 교시에 몇 시간 수업이 있었는지, 어느 선생님과 어떻게 수업을 바꾸었는지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수업관련 네이스 입력자료 참조) 수업과 업무에 지장이 없는 한 교사에게 주어진 권리인 연가를 어떤 용무로 사용하는지는 관리자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학교업무와 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을 초래할 일이 전혀 없는데 교사 개인의 판단과 정당한 권리행사를 무시하고 결재를 해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관리자의 직권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 경우엔 교육부,  교육청에서 공문을 내려 각 학교 관리자에게 결재를 해주지 말라고 지시한 일이 있으므로 교육청 교육부 담당자의 직권남용이라 하는 편이 올바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장을 이탈했다함은 무단이탈을 말하는 것인데 저는 분명 업무와 수업에 전혀 지장이 없도록 사전에 처리해두었고, 근무상황부를 통하여 소속상관에게 알리고 결재를 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이 역시 부당한 징계사유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노동운동 기타 공무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됨'에 관한 부분입니다. 우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조합원인 교사가 노동운동을 위한 집단행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왜 합법적인 단체로 인가해 주었는지 국가에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너무 우활한 문제제기라면 교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교원평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겠다고 밀어부치는 교육부의 선포가 교사의 입장에서 과연 '공무이외의 일'인지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사안은 제가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은 개인교사라 하더라도 충분히 반대의사를 표명할 이유가 있는 사안이며, 따라서 만약 제가 '전교조 조합원이 아닌 개인 교사 자격으로 그 집회에 참석하고자 하였다'라고 주장한다면 위 항목은 징계사유로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인지 역시 묻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집단행위'가 징계이유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개인행위'였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교사로서 '성실', '복종',  '품위유지'가 뜻하는 외연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습니다. 교사로서 살아온 지난 8년 동안 저는 학생들에게, 학교업무에 성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이번 징계의 근거로 교육청 담당자께서 형광펜까지 그어주며 제시한 근무상황부의 지난 기록- 2001년  10월 10일의 조퇴, 2001년 10월 27일의 연가, 2003년 6월 21일의 연가, 그리고 2006년 11월 22일의 연가까지 단 한 시간의 수업결손도 없었음을, 어떠한 업무상의 지장도 없었음을 맹세합니다. 특히 2006년의 경우, 이미 교체수업으로 네이스에 입력까지 되어있는 저의 수업을 당일 보강으로 처리하였고 저와 수업을 교체한 교사가 거부하는데도 끝까지 보강비를 지급한 사실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합니까? 이것은 명확한 공문서 위조가 아닙니까? 더욱이 교육부와 교육청은 이를 지시하는 공문을 내렸고, 단위학교에서는 업무상 절차상의 문제가 전혀 없는데도 이 지시에 따르기 위해 연가결재를 거부하고 결강처리를 하여 해당교사들을 징계처리하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징계가 징계를 위한 징계’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더욱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사회 정의를 위해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한다'고 말해야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에 근거한 스스로의 양심에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사로서 지켜야할 복종이며 성실이며 품위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로서 제 행동에 관한한 아이들에게 당당해야한다고 생각하여 양심과 자유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고 제 행동이 교사로서의 '성실'과 '복종'과 '품위유지'에 어긋난 것이라면 아마 저는 징계를 받아야겠지요.


이 징계는 철저하게 부당합니다. 그것은 거기 계신 여러 징계위원님들이나 저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징계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음이 뚜렷합니다. 공문서까지 위조해가며 교사의 자유와 양심을 논리가 아닌 힘으로 억압하려 하는 일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여야한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그럼에도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권력의 이 횡포는 역사적 평가 운운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학교에서든 교육청에서든 어디서건 징계위원회가 마련된 이유는 '혐의자'의 진술권을 마지막까지 최대한 보장하여 억울한 사태를 줄이고 공정하고 형평에 맞는 법 집행을 하자는 것이 목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혐의자'로서 제가 느끼기에 현실은 그들을 좀 더 압박하여 재범을 막는 구실로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징계위원을 맡으신 여러분들의 엄정하고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7-01-30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자 떼셨군요. ^^
징계위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 것인지...
그래도 세상 많이 좋아졌어요. ^^ 옛날엔 한겨레 신문에 이름 하나 난 걸로 짤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연가를 냈다고 뭐, 경징계를 한다니... ㅠ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2007-01-30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