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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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1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최근에 본 시집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집이었습니다. 신경림 선생은 이제 말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곳까지 가신 듯 해요.

해콩 2008-05-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이 부분이 더욱 좋아요. ^^ 알라딘 이벤트로 자필 싸인이 된 시집을 한정 판매할 때 얼렁 구입해서 싸인 있는 시집을 갖게 되었답니다. ㅋㅋ 촌스럽게 저는 이런 일로 뿌듯+행복해해요~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유명하신 분을 할랑한 제 서재에서 뵈니 ㅎㅎㅎ 기뻐요.


글샘 2008-05-1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경림 낙타 참 좋더군요. ^^
길동무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해콩 2008-05-1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씀바귀

- 정두리

쌉쌀한 맛

씁쓸한 맛

쓰다고 씀바귀래요

엄마는 씀바귀 나물 먹고 입맛이 난다 했어요

 

언 땅을 뚫고 견딘 힘

이른 봄에 일어설 수 있는 고집쟁이

씀바귀의 힘은 쓴 맛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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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04-0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봄맞이꽃도 구경할 겸해서, 틈에 있는 씀바귀를 한틈 베어 물었습니다. 혀를 관통하여 가슴까지 다가서는 묵직하고 깊은 맛. 그 여운이 너무도 강열하더군요. 어쩌면 몸의 절반이 그 강열함으로 물들었을지도. ㅎㅎ. ㅡ 그 덕에 지난 겨울을 아예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씀바귀의 힘은 쓰으은 맛에 있어요. ㅎㅎ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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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3-0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하는 신데요...
왜 저것이 담탱이로 보이는 것인지... 직업병의 일종이죠? ㅋㅋ
자, 힘찬 한 해를 시작합시다.!!! 담쟁이 잎 수천 꼭 함께 손을 잡고...

해콩 2008-03-0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내일, 첫날 아이들과 함께 읽을 시랍니다. 담쟁이같은 담탱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ㅋㅋ
 

월급 
- 학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다가는 흘린다 13
                                         -노영민




2007년 10월 17일 3백17만9천원의 월급을 받았다

너무 많이 받았다




우리 학교 야간 경비 할아버지보다 4배 이상 일하지 않았다

청소 아줌머니보다 4배 가치 있는 일 하지 않았다

죄가 될 만큼 많이 받은 거다




월급 받는 일이 죄가 되어서야 되나 그래서

나는 변명을 만든다




내 쉰 목소리를 돌려받았다

내 부은 발을 돌려받았다

수업 뒤 내 어지럼증을 돌려받았다

수업에서 흘렸던 내 진땀을 돌려받았다

내가 먹은 눈치밥을 돌려받았다

입시 과목 아니라 드러내고 잠들려하는 아이들이 내게 준 수모를 돌려받았다




많든 적든 이 정도 일 안하고 이 정도 수모 안 당하고 월급 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나는 월급을 너무 많이 받은 거야




이도 좋다 저도 좋다 어설프게 뻗은 내 양다리 양시양비론을 돌려받았다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한 내 외눈 거짓을 돌려받았다

두고 보자, 좀 더 두고 보자 내 잔머리 기회주의를 돌려받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내 낯 두꺼움 뻔뻔스러움을 돌려받았다




월급 받을 일 아니라 이건 내 호주머니 오히려 털어 내놓아야 할 일이로구나




할인매장 계산원 아주머니보다 4배 친절하지 않았고

주차장 관리 알바생보다 4배 허리 굽히지 않았고

콩나물 두부 매장 아주머니보다 4배 목청 돋우지 않았는데




2007년 10월 17일 3백17만9천원의 월급을 받았다

너무 많이 받았다 (20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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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 2007-12-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의 가슴을 치는 시네요
 

어항 
- 학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다가는 흘린다 4
                                                      - 노영민




세숫대야에 미꾸라지 한 마리

교실에서 아이들 장난친다




점잖게 훈계했다

살려주라고




이 도시에 미꾸라지 살려줄 곳 어디 있는가

습관성 훈계증 환자




며칠 지났다

미꾸라지 까맣게 잊었다




교실에 어항 있다

분수, 공기 발생기까지 넣어서




그 무거운 것 20분 걸어 가져왔다고

죽어가는 것 그냥 못 보겠더라고

미꾸라지 세 마리, 금붕어 두 마리로 식구도 불렸다고




훈계까지만 나는 행동한다

티내지 않고 아이들은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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