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 읽으며 끝을 봤다. 마리아 포포바가 여러 인물을 엮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지만 흥미롭고, 그 인물들 (모르던 인물도 있고 알던 인물도 있는데) 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해 준다. 인물들간의 이야기를 엮어갈 때 신문기사나 책에 근거한 것도 있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편지에 근거해 작가가 짐작 혹은 재구성한 것도 많은데,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도 많다 보니 내가 그들의 편지를 몰래 훔쳐보는 것 같아 약간 죄책감도 들었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글이 그 사람을 얼마나 솔직하게 보여주는 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우리 모두는 말할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하니까. 내가 죽고나서 나의 블로그, 일기 (그래서 내가 일기를 잘 안 쓰고, 써도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서재 글 들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생각하면 그리고 그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된다면? 상상만 해도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럴 일은 없을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이런게 내가 부활한 싸이월드에 관심이 없는 이유일지도. 싸이월드 시절이 내 인생의 흑역사는 아니지만 별로 다시 보고 싶진 않다. 내 것도 다른 사람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성소수자도 많이 있다. 동성애라기보단 사랑,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동성애에 대해 거부감이 큰 사람은 이 책을 별로 읽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종이책을 샀으니 이제 밑줄을 옮기며 다시 읽어봐야겠다.
저번에 룰루 밀러의 마니아가 되었을 때에도 조금 당혹스럽긴 했는데, 그래도 그 저자의 책에 관해 글을 쓰긴 했다. 오늘은 갑작스레 ‘미술’의 마니아가 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미술? 예술 중 가장 나와 거리가 멀 것 같은 미술..? 어제 그림책 리뷰를 쓰기도 했고그 출판사 이름에 ‘소묘’ 란 단어가 들어가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본다.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컵 때문에 한 권 산 적이 있는데 주디스 버틀러의 마니아가 된 것도 당혹스러운 (그러나 기분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북플은 여러모로 내게 신비의 베일에 싸인 존재다.. (응?)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책을 읽고 심란했었기에 해러웨이가 왜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또 왜 사이보그라는 개념을 생각했는지는 대략 이해한 것 같은데 여전히 적용은 난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직접적인 적용만 생각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통신 기술, 인터넷의 발달로 여성들 간의 소통은 용이해졌다. 여성들도 예전에 비해 과학기술과 많이 친해졌고 종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남성들도 사용하는 것이고 N번방과 같은 사건도 일어난다 (물론 그걸 불꽃 추적단이 추적해내기도 했다). 해러웨이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계몽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과연 그동안에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서구의 과학기술 종사자들은 이에 대해 좀더 고민했을까? 더 읽고 더 퍼트리면 효과가 있을까? 일단은 해러웨이의 글을 더 읽으며 생각해보려 한다. ——————-자다가 일어나 퍼뜩 (머리가 맑아서인가) 현재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여성을 넘어 ‘약자’ 의 입장에도 관심을 갖는 것 전체를 아우르는 경향이 <해러웨이 선언문> 과 그 시기의 다른 사상가들로 인해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상 그러할듯. 여러 페미니즘 집단들의 정당성을 굳이 따지지 않는 것에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해러웨이와 쿰쿰 바브나니의 인터뷰 https://en-movement.net/346?category=718342 에서 일부 이해를 돕는 지식을 얻었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을 읽으면 더 좋겠지만 이 인터뷰 내용도 도움이 된다. 현재 내가 보고 있는 페미니즘의 지평은 이미 <사이보그 선언문>의 내용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해러웨이의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래서 사이보그-과학기술의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는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20세기 말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라는 책을 호기롭게 샀고 읽어보려 했지만 잘 읽어지질 않았는데, 해러웨이 다 읽고 나면 이 책도 다시 펴보아야겠다. (밑줄을 추가했더니 그 책을 추가할 수가 없네)
사이보그는 경건하지 않다. 사이보그는 조화로운 세계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다. 사이보그는 전체론을 경계하지만, 연결을 필요로 한다. 사이보그는 전위당 없는 연합 전선의 정치에 친숙함을 느낀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포함해 백인 여성은 "여성"이라는 범주가 순수하거나 결백하지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발로 차고 소리를 질러서 간신히 알아듣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기존 범주의 지형 전체를 바꾸고, 열이 단백질을 변성시키는 것처럼 범주를 변성시킨다.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라면 "우리"는 자연적 통일성의 기반을 더 이상 원치 않으며 총체적 구성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순수성 및 그와 결부된 피해자됨victimhood을 유일한 통찰 근거로 삼는 바람에 생겨난 피해는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하지만 새로 구성된 혁명 주체는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인민에게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유를 주어야 한다. 정체성이 너덜너덜해지는 동안 정체성을 구성하는 반성적 전략 속에서, 종말 이후를 대비한 수의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선지자적으로 마감해줄 다른무언가를 직조할 가능성이 열린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단일한 실체로 자연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성과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사회관계에 뿌리내린 관점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본질화하는 것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혹은 그 유비물인 여성의 활동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르크스적 인본주의를 계승하면 지나치게 서구적인 자아를 함께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커뮤니케이션 과학 및 생물학의 예는 일상과 동떨어진 현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과학기술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나의 이러한 주장은 평범한 일상의 현실, 주로 경제적 현실로 뒷받침된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전자공학에 의존한다.
정치적 책임을 어떤 형태로 구성할 때, 여성들이 서로를 갈라놓는 과학기술의 위계를 넘어 단결할 수 있게 될까? 반군사주의 과학 활동가 집단과 연대해서 페미니즘과학/기술 정치를 발전시킬 방법이 있을까? 하이테크 카우보이를 비롯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과학기술 노동자 상당수는군사 과학을 연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개인적 취향과 문화적 성향이, 유색인을 포함한 여성의 수가 상당히 증가한 전문직 중산층의 진보 정치와 결합될 수 있을까?
공통 언어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꿈은 전체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이다. 모순을 해결하려 하는 변증법 역시 그런 의미에서 꿈의 언어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및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서구 로고스의 체현인 (남성)인간이 되지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사회관계를 통해 불가피해진, 강력하고 금기시되는 융합에서 체험하는 쾌감에 주목하면 페미니즘 과학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유기체와 기계의 구분을 비롯해 서구적 자아의 구조를만드는 깔끔한 구분선이 무너지면서 출현하는 독특한 가능성을 단호히 포용할 때, 페미니즘은 엄청난 자원을 얻게 된다. 붕괴의 동시성은 지배의 기반에 균열을 내면서 기하급수적인 가능성을 연다.
페미니스트들은 최근, 일상의 삶에 묻혀서 어떤 이유에서든그 생활을 유지하는 쪽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잠재적으로 우월한 인식론적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는 솔깃한 주장이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활동을 드러내며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삶의 유일한 기반이라고? 여성들의 무지, 지식과 기술로부터의 배제와 실패는 어떻게 봐야할까? 남성들의 일상적 능력, 물건을 만들거나 분해하며 다룰 수 있는 지식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방식의 체현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사이보그 젠더는 전면적 복수를 행하는 부분적 가능성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만족시킬 수단이나 복합적 지배의 기반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오랫동안 팔로우하던 분이 번역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구름의 나날>. 읽고 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읽는 사람 누구나 그런 기분을 느낄 거라 생각한다. 그림책 내용을 말하기는 좀 그렇고… 옮긴이의 말 일부를 옮겨본다.
조금 이른 나이에 혼자 살게 된 저는 한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잠을 잃은 밤은 참 길었습니다. 긴 밤은 혼자라는 현실을 더욱더 깊게 느끼게 했어요. 이 이야기는 그 시절의 제게 해주는 말 같았습니다. 이유 없이 시작된 무거운 마음이 나를 짓누르고 점점 더 가라앉아 밤까지 쫓아올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내 안에 피어나는 꽃이 될 거란 것을 알았다면 조금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시절의 나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둡고 슬픈 순간들이 있어도, 그저 잠시 멈추어 기다리면 삶은 기어이 다시 향기로워질 테니까요. 구름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란 걸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이 글을 옮긴 지금의 나는 압니다. 만약 당신에게 구름의 나날이 찾아온다면, 피어날 꽃을 위해서란 걸 기억하기 바라요.2022년 3월 정림
자유로운 작가의 성격을 반영한 건지 내용이나 문체도 자유롭고 표현 등이 덜 민감해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되는 내용도 없고 전반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2015년에 나온 책이다보니 (그 뒤에 워낙 페미니즘 책들이 쏟아져 나와서) 아무래도 좀 시대에 뒤처져서 권하고 싶지는 않다. 딱히 권할 다른 책이 떠오르진 않지만 요즘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