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
저번에 이런 https://blog.aladin.co.kr/suha/13780881 글을 썼고 직후에 작가의 사정으로 내가 보던 로맨스 소설의 연재가 중단됐다 (역시 연재물에는 손을 대는 게 아니라는 교훈). 구글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이 내가 웹소설을 읽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나에게 새로운 웹소설을 자꾸 들이밀었다. 그래서 또 새로운 걸 읽게 되었고, 그것도 연재중이고, 하루에 아주 짧은 분량 올라오는데 사실 그닥 재미가 없는데도 결말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고...
그리고 이제는 <어글리 러브>와 브리저튼 시즌2까지 (언젠가) 읽고 볼 예정이다.
왜 이렇게 내가 요즘 로맨스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유가 좀 궁금해서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책을 읽어 보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실 아주 관계가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얻은 지식이 있어 밑줄을 남겨보기로 한다.
이 책의 저자는 도널드 시먼스와 캐서린 새먼으로 둘다 심리학자이며,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캐서린 새먼이 다른 학교의 교수 도널드 시먼스에게 슬래시 소설 slash fiction을 연구하는 데 조언을 구하는 것을 계기로 이 연구를 시작하고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슬래시 소설이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는데, 그것은 매우 성적인 그림이 자주 나오는 일종의 로맨스 소설로, 여성들이 주로 읽으며 소설 속의 연인은 모두 남자라고 한다. 슬래시라는 이름은 셜록홈즈/왓슨 처럼 미디어에서 짝을 이룬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이름 사이의 구분 기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의 '야오이' 와 비슷한 개념일 수도 있을 것 같으나 내가 슬래시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고 하여 확신할 수는 없다.
전반부에서는 진화적 관점에서 짝짓기(재생산)에 대한 남녀의 입장을 알아보고, 후반부에서는 짝짓기에 대한 남녀의 상반된 심리가 에로물 (포르노, 로맨스, 슬래시 소설)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낭만 전사>라는 이름의 이 책은 '여자는 왜 포르노보다 로맨스 소설에 끌리는가?'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꼭 등가의 개념은 아니라 하더라도 남성이 즐기는 포르노에 대응되는 것이 여성의 로맨스일까 하는 생각을 나도 해본 적 있다. 사실 내가 왜 포르노보다 로맨스 소설에 끌리는 지가 궁금하진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하필 요즘 로맨스 소설을 자꾸 읽게 되느냐 (그러느라 다른 책도 못 읽고) 하는 것인데..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최근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을 알게 되어서일 수도 있고, 사실 이것보단 두번째 이유가 더 맞을 것 같은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하면서 내가 뭘 하고 싶더라도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랑에 대해서 이미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인생에서 사랑보다 중요하고 재미있는 게 많으며 (그래서 에바 일루즈 책들은 의식적으로 관심 가지려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안하는 것도 아닌데 취미생활까지 사랑에 치중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그냥 내가 궁금하면 읽고 재미있으면 더 읽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연애라는 단어는 나와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또 읽는 페미니즘 책들에서 (개인으로보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갈등을 자주 접하면서도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는 것에는 약간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로맨스 소설의 행복한 결말이 결혼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다.) 아무리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이성애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죄책감 씩이나 느낄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책도 읽고 싶고 저 책도 읽고 싶다고 하면서 그걸 안 읽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한편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여주인공이 인간 진화의 역사 속에서 높은 짝 가치를 이루는 신체적, 심리학적, 사회적 특징을 가진 남주인공을 알아보고, 획득하고, 결혼하기까지 장애물을 극복하는 여성 짝 선택의 연대기적 이야기." 라면 내가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와서 새로운 로맨스를 바라는 걸까.. 이러다가 중년의 위기가 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농담이다).
나는 진화와 심리를 연관시키는 부분에 좀 회의적이고, 이 책의 내용이 좀 구닥다리라는 생각도 한다. 남기는 밑줄은 나중에 다른 책을 읽을 때 비교 참고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 내용에 내가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성교에 관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짝짓기 욕구 관점이 그렇다. 인간에게 있어 짝짓기 욕구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짝짓기 외에 쾌락 관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은데. 물론 피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때는 쾌락을 위한 성교의 부담이 매우 컸을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앞으로 이 부분에 관한 책을 더 읽어보고 싶고 무슨 책이 더 있는지는 아직 찾아보지 않았다.
적당한 책을 아시는 분은 추천 바랍니다.
+ '포르노'와 '로맨스' 키워드로 검색하니 이런 책이 나왔다. <낭만전사>의 저자 중 한 명인 캐서린 새먼이 추천사를 썼는데.. 이 책도 역시 품절이다. 목차를 보니 약간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더 읽어볼까 한다. (도서관에 있기를)
다른 성을 위해 만들어진 에로물을 접할 때는 성별 간에 서로 다른 심리의 심연을 응시하게 되며, 더 끔찍한 일은 다른 성의 이상적인 판타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단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로맨스 소설과 포르노 비디오 간의 차이점은 무수히 많고 너무나 커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녀가 함께 생활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으로 아이를 기르기까지 한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 P13
효과적인 남성의 재생산 전략은 가능한 빨리 아내를 얻고, 또 가능하다면 아내를 추가로 더 얻고, 위험이 충분히 낮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의 성교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 효과적인 여성의 재생산 전략은 짝 가치가 높은 남성에게 선택되고 선택하는 것, 그리고 되도록 그 사람의 유일한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출산과 양육의 부담 때문이다) - P49
많은 이성애자 남성들이 정기적으로 낯선 이와 성교하지 않는 주요 이유가 여성들이 이런 성교에 관심 없기 때문이라면, 많은 게이들이 낯선 이와 성교하리라고 충분히 에측할 수 있다 (반면에 레즈비언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78
레즈비언이 이성애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다소 더 많은 성 파트너를 가지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레즈비언은 임신의 위험도 없고, 성병에 걸릴 확률도 더 낮아보이며, 신체적 강압의 위험도 적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성행위에 더 개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 P79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목표는 결코 자신만을 위한 성교가 아니며, 낯선 이와의 감정 없는 성교는 더더욱 아니다. 로맨스 소설 줄거리의 핵심은 여주인공이 자신에게 적합한 한 남자를 알게 되고, 그의 마음을 얻어서, 결국 그와 결혼하기까지 장애물을 극복해나가는 사랑 이야기이다. 바로 그렇기에 같은 여주인공이 계속 나오는 로맨스 소설은 시리즈로 만들 수 없다. 각각의 로맨스 소설은 영원한 결합을 맺으며 끝나야 한다. 남성용 포르노와는 달리, 독자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시점을 가진 등장인물의 존재가 로맨스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 P94
성공적인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의 성격은 여성들의 짝 선택 심리를 상당히 잘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은 다정하고 감수성 있는 남주인공을 결코 그리지 않는다. 로맨스 소설에서 대성공한 한 작가는 여성들이 "강하고, 지배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이 여성에게 복종하는 순간이 오는 것"에 대한 판타지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 P96
남주인공의 신체적 특징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쓰인 형용사는 근육질의, 잘생긴, 힘센, 큰, 햇볕에 그을린, 남성적인, 정력적인 등이 있다. ... 남주인공은 성적으로 대담하고, 차분하며, 자신만만하고, 추진력이 있다. ... 가장 일관되게 기술되는 남주인공의 특성은 여주인공을 대하는 그들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가장 일관되게 기술되는 남주인공의 특성은 여주인공을 대하는 그들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성적으로 원하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과거에 원하던 다른 여성보다 더 여주인공을 원하고, 이전엔 결코 사랑에 깊게 빠진 적이 없고, 여자 주인공에 대한 생각이 밀려오는 경험을 하고, 일반적으로는 아니지만 여주인공에게만은 다정하고, 여주인공을 아주 특별하다고 여기고, 여주인공을 보호하고 싶어하고, 여주인공에게 사로잡혀 있고, 성적으로 여주인공을 지키려고 애쓴다. - P97
남성은 상상을 하든 실제로 하는 경우든 간에, 새로운 여자와의 저비용 성교에 흥분하고 그런 성적 기회를 만들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성 심리를 진화시켰다. 포르노토피아는 진화적으로 새로운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판타지 세상으로, 그 안에서는 높은 짝 가치를 가진 여자들과의 감정 없는 성교가 드문 일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이 된다. - P101
반대로 조상 여성들은 무작위로 낯선 이와 감정 없는 성교를 하고 자신만을 위해 다양한 성적 대상을 찾다보면 얻을 것은 거의 없고 잃을 것은 많았다. 그녀들은 신중히 짝을 선택해야 많은 것을 얻는다. 로맨스 소설은 여주인공이 인간 진화의 역사 속에서 높은 짝 가치를 이루는 신체적, 심리학적, 사회적 특징을 가진 남주인공을 알아보고, 획득하고, 결혼하기까지 장애물을 극복하는 여성 짝 선택의 연대기적 이야기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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