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로맨스 판타지를 한 일곱 편 읽었다.


시작은 <루시아>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아직 완결 안됐지만) <상수리 나무 아래>

https://ridibooks.com/books/4766000001 이다. 



그 중 다섯 편을 작년 올해 읽었는데 읽을 때는 정신없이 읽지만 다 읽고 나면 '나는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읽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려고 사 둔 책이 그렇게 많은데 휴대폰으로 눈이 빠져라 결제까지 해가면서 봐야 했는가? 이제는 로맨스라는 것이 나랑 전혀 관계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페미니즘 책 읽으면서 더욱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는데 왜 이걸 재미있게 읽고 있는건가 싶었다.



대개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을 때 누가 재미있다고 알려주거나, 광고를 보면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1) 일단 재미가 있고

2) 내가 판타지 장르에 거부감이 없으며

3) (연애 경험이 있으므로) 내용 이해와 공감이 어렵지 않고

4) 연재물 특성상 끊으면 안될(?) 곳에서 끊기 때문에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


이런 이유들이 나로 하여금 잠도 줄여가며 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7편밖에 안 읽었지만 그 중 6개 정도가 아래와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1) 중세 기사물

2) 남주: 검은머리의 기사, 몸짱, 냉미남, 여주에게만 잘하고 다른 여자한테는 냉정한 '나쁜 남자'

3) 여주: 출생의 비밀 등 약점이 있고 연약함

4) 중세물이기 때문에 연애하기 전 이미 결혼을 하고 시작


이런 특성들이 왜 독자에게 잘 팔리는가가 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읽어보기 시작..



책을 읽어보니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는 제 생각보다 더 광범위하고 '육아물' 이라는 장르도 있다고...


어린 주인공이 애교나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여 아버지나 오빠 등 가족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거나,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보호자가 주인공이 되어 아이를 양육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 12쪽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이런 게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책의 서문에 따르면


웹소설이 종이책과 다른 점은 동시대의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문학이며, 로맨스 판타지는 철저하게 동시대의 여성 독자를 위한 이야기라고 한다. 연애가 전제되는 장르 특성상 인물들 간의 '관계'가 많이 다뤄지는데, 대상 독자인 여성들이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의 반영이기도 하다고.. 그러고보니 <루시아>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는 가족관계로부터 상처받은 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긍정되면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가 지켜본 바 2014년-2021년 초 로맨스 판타지는 작가와 독자 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에 의해 독특하게 발전-변화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그 관심이 공유되고 퍼져나갔다. 웹소설이라는 장르 특성상 (회차마다 댓글란이 있어요) 활발한 상호작용이 가능했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요구를 신속하게 반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전 희곡을 함께 낭독하는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읽었다. 물론 옛날에 쓰여진 작품인 걸 알지만 멤버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몰입이 잘 안되는 거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주인공과 남의 말만 (그 사람이 말을 참 잘하긴 하는데) 듣고 아내를 죽이는 남편이라니..










그런데 로판은 중세시대가 배경인데도 그 정도로 몰입이 안 되지는 않는다. 웹소설의 작가들도 분명 본인이 쓰고싶은 걸 쓰기는 하겠지만 대상 독자가 나름 분명하고, 끊임없이 댓글로 자극받고, 판매부수가 바로바로 보이므로 이 시대의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 작품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로맨스가 받았던 전문성, 예술성이 없다는 비난과 등단의 문턱이 낮다는 웹소설의 특징은

바꿔 말하자면 로맨스 판타지의 화자가 바로 '보통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보통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보통 사람'인 우리와 공명한다.


- 9쪽, 추천의 말 중



내가 읽은 로판들의 남자주인공은 대개 내 여자에게만 친절한 '나쁜 남자' 였다. 이 남자들이 상당히 '남성적'이고 특히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그래서 밤일도 잘 하고) 여주를 보호해주는 대신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상당히 가부장적이다. 이 부분은 좀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이전에 주로 서브 남주로 나왔던 '친절하고 공감 능력이 있으며 여자 주인공과 대화가 잘 통하는' 남성들이 좀더 발전하여 '조신하고 순결하고 살림 잘하고 다정한' 남자 주인공도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도 여성들의 변화하는 '취향'의 반영일 것 같다.


또 배경이 중세임에도 불구하고 '회귀' 하거나 '환생' 하는 설정으로 경험이 풍부한 여주들의 경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남주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하거나, 그 시대에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여 사업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름 진취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주인공들의 외모는 아름답다는 설정이지만, '신분'이나 '사랑'만으로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다.


그밖에 여주들은 대개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만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 갈등을 겪었다는 설정이 많은데,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을 조금 더 안전하게 (성폭력이나 성적인 착취의 위협 없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성적 긴장이 제거된' 나쁜 남자라고.


또 여주인공을 주로 '귀족 여성'으로 설정하는 것이 미혼 여성으로서 안전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또 요즘에는 '여적여'의 구도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오히려 여주인공의 성장을 도와주는 서브 여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다른 로판들은 연재가 끝난 뒤 읽었는데, <상수리나무 아래>는 아직 연재중이다. 그래서 한 번 쭉 읽고 다시 재독을 했는데 (그러니까 웬만한 책은 다시 읽지 않는 내가 로맨스 판타지를 재독... 완결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재독하면서 이제 여유도 좀 있겠다 댓글을 읽다보니, 댓글 읽는게 너무 재미있는 거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암시적인 요소들을 말해주는 댓글도 있고,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댓글도 있고, 또 앞으로 어찌어찌 진행되면 좋겠다- 이런거 해주세요- 하는 댓글도 있고... 또 누가 불평을 하면 (여주인공이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누가 그것에 대한 의견 (성장 과정을 고려해줘야 한다.. 등)을 달기도 하고. 알라딘 서재에서 글에 댓글 다는 것처럼.. 그래서 재독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재미도 느꼈지만 동시대 여성들과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위안도 받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 하는구나.. 하면서.



저자는 로맨스 판타지의 생명력이란

"여성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나아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를 응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6쪽, 추천의 말 중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가 딱히 고상하거나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장르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응원해준다는 점에서 이걸 읽는다는 걸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네 사실은 좀 그랬습니다) 했다. 이제 로맨스 판타지는 나에게 길티 플레저 아니고 그냥 플레저 인걸로. 그래서 이제 책에 있어 나의 길티 플레저는 '책에 관한 책' 그냥 플레저는 '로판' 이 되었다. (응??)



여성에게 로맨스가 남성에게 포르노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판된 이 책을 빌려뒀는데, 아마 못 읽고 반납할 것 같다. 읽고 싶으면 다음에 다시 빌려 읽는 걸로...









그러니까, 요즘 (여러가지 일로) 스트레스 만땅 받으며 <상수리나무 아래>를 읽느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건 원래 안 읽으려고 했지만) 

<가부장제의 창조> <레이디 크레딧>

을 읽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7월도 벌써 20일이네..  


참고로 <상수리나무 아래>는 무척 재미있다. 19금이라서 야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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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왜 로맨스 판타지를 읽고 있나
    from 수하의 서재 2022-08-23 16:16 
    저번에 이런 https://blog.aladin.co.kr/suha/13780881 글을 썼고 직후에 작가의 사정으로 내가 보던 로맨스 소설의 연재가 중단됐다 (역시 연재물에는 손을 대는 게 아니라는 교훈). 구글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이 내가 웹소설을 읽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나에게 새로운 웹소설을 자꾸 들이밀었다. 그래서 또 새로운 걸 읽게 되었고, 그것도 연재중이고, 하루에 아주 짧은 분량 올라오는데 사실 그닥 재미가 없는데도 결말이 비슷해서
 
 
mini74 2022-07-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야하기도 하군요. ㅎㅎ 한때 회귀물 복수물 좋아해서 한참 봤었어요. 아마 과거로 돌아가 로또 번호를 알고싶었던 제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을까요, 아님 저런 남자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은 ㅎㅎㅎ 수하님도 글 참 재미있게 쓰세요. 술술 읽히면서 상수리나무에 대한 궁금증이 *^^*

건수하 2022-07-20 20:26   좋아요 1 | URL
로또번호… 그거 좋은데요 _
상수리나무가 좀 야한데요, 야하기만 한 건 아니고 여주 남주의 로맨스도 (로맨스 별로 안 좋아하던) 꽤 애절하고 재미있습니다 ^^ 무료로 5화 정도 보실 수 있으니 리디 계정 있으시면 맛보기 해보셔요 ^^!

독서괭 2022-08-02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서 가부장제의 창조와 레이디 크레딧을 못 읽으셨다는 결론이 ㅋㅋㅋㅋㅋ <루시아>도 야하죠 ㅋㅋ 로판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네요. 저도 최근 트렌드가 여적여 없고, 조신한 남주, 적극적인 여주인 것 같아 더 재밌더라고요. 육아힐링물은 약간, 내 유년도 이랬으면..하는 마음의 반영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기도..

건수하 2022-08-02 16:37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날카로운 지적 ㅎㅎ
레이디 크레딧은 거의 다 읽었는데 7월을 넘겨버렸네요. 가부장제와 창조는 3장까지 읽었나... 아직 멀었어요. ㅠㅠ
이번달엔 <레이디 크레딧>을 얼른 다 읽고 <임신 중지>를 읽은 뒤 시간이 남으면 <가부장제의 창조>를 마저 읽어보려고 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