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읽고 있다. 이번 장은 경제 분야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 그리고 1970년 이후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유럽 국가로부터 독립한 이후) 제1세계 (서유럽, 미국) 여성은 일자리로부터 소외되고 가정주부가 되어 번식과 소비의 주체로서, 제3세계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은 가정주부이며 번식자이자 동시에 생산자로서 기능하기를 사회로부터 강요받게 된다. 1세계 여성이 번식을 권장받는데 비해 3세계 여성에게는 가족계획, 그러니까 덜 낳는 것이 권장되었는데 그 이유는 제3세계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여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3세계 여성이 자유로운 노동자로서 존중받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국제 자본이 제3세계 여성에게 끌리는 이유는 '가장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노동력' (256쪽) 이기 때문이다. 농업, 가내수공업, 공장에서의 공업, 성산업 등에 종사하게 되나 대부분 그들의 노동은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대다수는 젊은 여성 (14-24세)이며, 나머지는 대개 가정주부로서 '여가' 시간에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노동을 하는 경우에도 임금에 관한 권리가 남성 (남편)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요약이 아니라 기억에 남은 것을 적어봄)



1980년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이 장에서 드디어 실감했다.



1990년까지 한 집 건너로 가정용 컴퓨터를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다. 가정주부는 ... 컴퓨터를 통해 쇼핑을 하고, 텔렉스 등을 통해 편지를 보내게 될 것이다. (295쪽)


동남아시아 섹스관광의 중심에 있는 세 국가 중, 타일랜드, 필리핀, 한국 .... (298쪽) 


(여기가 동남아시아였나?)


1980년대까지 이러한 상황에 있었던 한국이 지금은 '서구산업화 국가의 초국가적 조직'인 OECD 가입국가라고 생각하면 놀라운데, 사실 1990년대 이후에 가입한 다른 국가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 어쨌든 한국이 좀 놀라운 사례인 것 같기는 하다. 예에 함께 속했던 인도, 태국, 필리핀 등을 생각하면, 또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비교해도 그렇다.




얼마 전 <몸이 선언이 될 때> 

운 좋게 태어난 백말띠 여성, 임신중지 여성, 성소수자가 말하는…‘내 몸’ - 경향신문 (khan.co.kr)


전시를 보고 왔다. 

1986년 이후 초음파로 태아를 진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 여아 낙태가 많이 행해졌다고 했다.


이제는 출산율이 낮아 걱정하며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으니.

30년 동안 한국은 국가 차원의 경제발전, 그리고 출산과 관련된 점에 있어서는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이동한 것인가.



논제는 아니고 궁금한 것.


4장 마지막에서


제3세계의 가난한 여성의 모습은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에게도 '미래의 이미지' (306쪽)



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 미래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여성이 '보이지 않게 노동'하고, 생계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팔면서 '발전 속으로 통합' 되었나?


국가 안에서도 분명 경제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여전히 1세계는 1세계이고 3세계는 3세계인 것 같은 느낌인데.. 

1980년대 이후 이것이 어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또 이 논의에서 빠져있는 제2세계 (공산주의 국가) 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한 국가가 사회주의 발전의 길을 채택한 혁명 이후에도 결국은 노골적인 반여성정책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후에 좀더 깊이 분석해야 할 것이다. (272쪽)



라는 문장을 보면, 또 앞의 장에서의 논조를 보면 사회주의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예들이 6장에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여성은 오늘날 노동자로서는 은폐되고 있고, 번식자와 소비자로, 그것도 탐탁하지 않은 번식자와 소비자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72쪽)



이렇게 중국의 예만 드는 것은 아시아라서 그렇다는 것인가? 러시아나 동부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인가?



섹스와 관련된 부분에서라도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뭔가 달랐는지,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약) 자본주의가 식민지 강탈에 기초하여 세계체제로 발전하면서 착취 대상은 외부로 확장되었다. 식민지의 토지와 주민은 남성 문명인의 착취와 이용을 기다리는 ‘자연’으로 여겨졌다. 동시기에 발전한 근대 과학기술은 자연을 분석과 해체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여성, 식민지에 대한 시각과 유사하다. 교회, 국가, 신흥 자본가 계급, 근대 과학자는 협력하여 여성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종속시켰다.



12-17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던 마녀사냥은 여성을 통제하고 종속시키려는 메커니즘의 하나였다. 중상주의 관점에서 근대국가의 발전에 노동력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대체로 고수되고 있다). 마녀사냥으로 산파가 통제하던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남성 의사에 의해 통제되었다. 마녀로 몰린 자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로 환수되었고 봉건계급과 부르주아의 자본으로도 축적되었다. 코르넬리어스 루스에 의하면 마녀 재판은 ‘인간의 피에서 금을 만들어낸 새로운 연금술’이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 프란시스 베이컨은 마법의 비밀을 알아내는 수사 방법과 같은 방법- 귀납법으로 자연의 비밀을 캐낼 수 있다고 하였다. 베이컨에 따르면, 자연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노예’로 만들어져야 하며, ‘규제’되고, ‘해부’되어야 한다. ‘여성’의 자궁이 상징적으로 겸자에 굴복한 것처럼, 자연의 자궁이 품고있는 비밀 역시 인간의 삶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연약한 여성상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조해낸 산물이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잠시 엿보았다. 그 시대 여성은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긴 치마를 입고 물에 빠진 고양이를 구한 여성은 누가 자신을 봤을까봐 정신없이 고양이를 안은 채로 ‘네트’를 통과해 미래로 가고 만다), 신경증이 있고 기절을 잘 하며 (자주 가장하기도 한다), 온통 결혼에만 관심이 있다. 그 시절 여성과의 대화에서 성적인 것과 관련된 주제는 금기시된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의 임신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없다).










16-17세기는 약탈, 해적질, 강제노동과 노예노동을 통해 식민지로부터 자본을 축적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의 여성과 본국의 여성에게 서로 다른 가치체계가 적용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소유한 여성은 한 사람과만 성관계를 갖는 후계자의 출산자로 길들였다. 집 밖에서 일하지 못하게 했고, 재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 노예 여성에게는 결혼이나 출산이 허용되지 않았다. 임신-출산-육아의 노동공백기를 고려하면 노예를 수입해 오는 것이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면서 식민지 정부는 노예 여성에게 출산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기간 동안 반모성적 태도를 내면화한 노예 여성은 19세기 중엽까지 출산 파업을 지속했다. 출산을 하면 자녀가 노예가 되어 평생 노예주의 부를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용납되기도 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떠오른다)










식민지 초기 서아프리카의 상류 여성들은 숙녀로 대접받았고 유럽인과 결혼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영국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여성을 창녀로 만들었다. 아프리카 여성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면서, 조국에 있는 백인 여성은 ‘숙녀’의 지위로 상승시켰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는 자메이카에서 귀족으로 살고 있던 여성이 영국에 가서 다락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지역에 따라 여성에게 다른 기준이 적용된 이 두 과정은 역사적으로 단순히 평행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에서 필요에 의한 인과관계로 깊숙히 얽혀 있다. (남성들의 필요에 의해 두 집단의 여성이 다르게 살게 되었다는 것 외에 딱히 얽혀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내가 잘못 이해한건가?)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부르주아 이상 계급 여성의 향신료, 화장품, 비단 등의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신항로의 개척 등) 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가정을 새로운 기계와 물품의 소비 시장으로 삼아 가사노동과 소비의 주체로 가정주부를 부각시켰다.


부르주아는 가족을 사적 영역으로 선언하고 여성들을 공공 영역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여성의 성적 경제적 독립성의 증발에 대한 보상으로 ‘낭만적 사랑’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는 재생산의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고 이 여성들은 결혼 제도에 매여있지 않았다. 국가는 입법과 경찰과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재생산에 개입했다. 결혼 전 혹은 결혼 외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했고, 낙태를 불법화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했다.



엥겔스와 베벨의 동지이자 사회주의 여성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클라라 제트킨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부르주아 페미니즘처럼 남성에 맞서서 싸울 수 없으며, 남성과 함께 자본과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 미즈는 이러한 제트킨의 주장을 여성의 역할을 어머니와 아내로 보는 부르주아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사회적 생산으로 진입하는 것이 여성해방 혹은 독립의 전제조건이라면,

남성을 부양자이자 가장으로, 여성을 의존적인 가정주부이자 어머니로 여기고,

핵가족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여성 운동을 부르주아 여성의 전유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여성 운동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주장이기도 하다. 여성 운동이 여러 상황에 있는 여성의 다양한 주장을 모두 포괄하기는 어렵겠지만, 여성 운동이 계급 운동 혹은 사회 운동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의 한 진보 인사가 진보진영 내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벌어진 논란에 대해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고 했던 발언과 비슷한, 대를 위해서 소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굳이 ‘조개’를 줍는다고 한 것도 기분 나쁘다. 의도된 표현일까?))



또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남성과 함께 자본가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 사이의 계급 차이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남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가정화하면서


1) 쓸만한 임금노동에 대해 독점적 권한을 주장할 수 있고

2) 가정 내에서 모든 소득에 대해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다.



여성의 노동은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처럼 여겨져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여성은 자본가 (부르주아 보다도 더 상위계급) 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 가정주부화는 가정에 여성을 묶어둠으로써 여성의 단체협상력도 떨어지게 만들었다. 남성 ‘부양자’가 부양하는 핵가족과 여성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내부 식민지’인 것이다.



엥겔스는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을 모든 계급에게 확대’하는 것을 통해 계급의 양극화된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어하였으나,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는 자연이나 타인에 대한 착취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발전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퇴보적 진보의 관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착취, 남성의 자연에 대한 착취, 식민주의자의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를 완전히 폐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의 경제 체제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논제)


부르주아 남성 - 부르주아 여성 / 프롤레타리아 남성 - 프롤레타리아 여성 간의 위계는 분명하다고 치자.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남성의 상대적 지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하지 않지만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1-11-2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롤레타리아 남성이 부르주아 여성을 질투해서 조개로 폄하하는 상황? 부르주아 남성은 프롤레타리아 남성 표를 얻어야 해서 이대남 워째하며 부둥부둥 하고요. 그나저나 영원히 까이는 유시민 ㅋㅋㅋ 남자는 입조심 항상 해야죠 ㅋㅋ
수하님 넓고 깊게 읽으시네요. 저도 다시 읽는 마음으로 쭉 읽어보았습니다 💕

건수하 2021-11-25 11: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사실 유시민 좋아하는데요 그 말은 맘에 안 들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남성이 부르주아 여성보다 하위에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써놓은 글이 있어서 한 장 한 장 올리기는 하는데 (이 책까지만 올릴거예요), 고기 한 부위씩 올리는 거 같아 좀 그렇지만 전체를 통합해 짧게 줄이기가 힘들다능….

공쟝쟝님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독서괭 2021-11-2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의 임신에 대해서도 말하면 안 됐다고요?? 헐..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빌러비드>는 너무 참혹하죠 ㅜㅜ
조개 줍줍 ㅋㅋ 저 그 사람 꽤 좋아했었는데 정희진씨 책에서 그 내용 읽고 알게 된 후로 호감도가 떨어졌어요. 방송도 안 듣고 책도 안 사게 되네요ㅠ

건수하 2021-11-26 08:59   좋아요 1 | URL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 잘 모르고 시간여행을 가서 고생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고양이 얘기도 그 중 하나랍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가 진짜 수다스러운데, 그만큼 또 재미있어요. 고양이 얘기 많이 나와서 독서괭님 좋아하실거예요~

유시민에 대해 저는 그래도 아직 좋은 감정이 남아있지만, 요즘 안보고 있긴 해요 ㅎㅎ
 
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혜윰님에게 이끌려 얼마 전부터 알라딘 서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했더니 알라딘 서재의 다락방님을 알려주셨고, 여성주의 책읽기에 관심이 있다보니 계속 방문하게 되면서 나도 이곳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책 이야기를 이렇게 즐겁게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그것도 예전부터 있었다니. 이런 곳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보니 알라딘 서재에 예전에 썼던 글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읽으며 거기에 내가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스트' 까지는 아닌데, 

라고 써놓은 걸 보고 얼마전 깜짝 놀랐다. 2009년에 나는 저렇게 생각했구나 하고. 






<듄> 1부를 읽었다. 전부터 궁금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나온다기에 같이 책을 읽는 모임 

(이 모임에서는 정말 같이 '읽기' 만 한다. 함께 읽을 책을 정하고 각자 읽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톡방에서 수다를 떤다.) 에서 이걸 얼른 읽고 영화를 보자고 하여 읽기 시작했다. 이 모임은 4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책도 좋아하지만 모두 SF도 좋아한다. 


1965년작, 휴고상과 네뷸러상 수상, <스타워즈>와 <왕좌의 게임> <The Five Star Stories> 등 많은 창작물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갖고있던 사전 정보였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읽었다. 반쯤 읽고 영화를 보러 갔고, 영화를 보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나는 재미있게 봤다. 당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생태학의 개념이 나오는 것도 흥미로웠고, 그 시절 히피들이 사용했던 마약 대신 향신료가 인간을 각성하게 만든다는 설정, 또 향신료 무역이 과거의 대항해시대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에서는 오니솝터 Ornithopter 의 구현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헬리콥터보다 훨씬 빠르고 섬세하게 방향과 속도를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헬리콥터도 충분히 빠르지만..) 다만 동력이 상당히 많이 들 것 같은데 연료를 실으면 또 그 무게가 추가되므로 영화에서처럼 사람을 6인이나 태우면서도 그 정도의 속력을 내려면 핵발전 정도는 해야 (...)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돈이 얼마..?  



영화를 보고 나서 나머지 반은 좀더 느리게 읽었다. 설정이 거의 파악되어감에 따라 흥미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낡은 세계관이 페미니스트로서의 (드디어 말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쯤 읽었을 때에는 이것을 7부까지 다 읽어야 하는가 마음의 갈등을 하였으나 (그러니까, 세트로 묶어 할인판매하는 책을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다), 1부만 읽고 접기로 마음먹었다. 



<듄>에는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베네 게세리트 (영화에서 발음은 베네 제써맅 ...) 는 버틀레리안 지하드라는 일종의 종교 혁명 이후 만들어진 일종의 성직자 그룹이고,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렌지 가톨릭 성경' 이라는 것이 그들의 경전인 것 같다. 그들은 의식을 집중하여 사물 혹은 인간의 속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고, '목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세뇌하여 움직일 수 있다. 



가끔 나오는 베네 게세리트의 교리 등을 보면 가톨릭과 불교, 수피즘 등의 종교 특성이 대략 합쳐진 것 같다. 남성 황족 혹은 전사들은 이들을 뒤에서 이야기할 때  '여자 마법사' 혹은 '마녀' 라고 부른다. 반면 아라키스의 사막에 사는 종족 프레멘의 종교는 유대교 혹은 이슬람교처럼 다소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베네 게세리트는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황제의 조언자 '비밀을 말하는 자' 로서 봉사하거나 황족 혹은 귀족의 부인으로 남편에게 봉사한다. 이들의 비밀스러운 목표는 수백년 동안의 유전자 교배를 통해 특정 유전자 조합을 가진 '퀴사츠 해더락' 이라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특정인과 결혼을 하고, 특정 성별의 아이를 낳으며 (현대 과학의 상황에서 인간의 성별은 남성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베네 게세리트는 임신과 관련하여 성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긴 나중에 유기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면서 약간 바꾸어 독성을 없애는 일도 한다 (....)),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황제와 협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올 메시아 같은 존재인 '퀴사츠 해더락' 을 위해 아라키스라는 행성에 선교단을 보내 전설을 심어두기도 한다. 

 

'퀴사츠 해더락'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자, 혹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자 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 곳에 다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이 두 의미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더 높은 차원들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퀴사츠 해더락은 '남자' 이다. 


그런데, 베네 게세리트라는 집단이 수백년 동안 애써서 이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고, 각성시켜서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면, 그 이후의 목표는 딱히 없다. 거창한 세계관을 만들었지만 그게 어딘가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사실 '퀴사츠 해더락' 을 어느 다른 베네 게세리트가 통제할 수가 없다. 그 뒤는...? 2부부터는 읽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꼭 와야 하는 이유나, 와서 뭘 하기를 바라는지는 나오지않는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그러나..? 


주인공 폴이 아라키스에서 각성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하드' (성전)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지하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려고 노력하지만 각성할 수록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럼 또 한 번의 지하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베네 게세리트의 목적인가? -_-; 



이제 한참 <듄> 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이 이야기가 더 읽고 싶지 않고 더 궁금하지 않은 이유를 얘기해야겠다. 베네 게세리트들은 대단한 능력자다. 그러면, 딱히 뚜렷한 목표도 없으면서 (사실은 2부 이후에 나올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왜 그렇게 수백년(!) 동안 노력해서 '퀴사츠 해더락'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가? 그것이 왜 '능력자'들의 모임인 베네 게세리트의 거의 유일한 목적인가? 종교라는 것이 원래 딱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딱히 그 외에 다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열심히 정신 수련을 하고 능력을 개발시키는가? 황제나 다른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조차,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어 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말이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조언자, 그리고 '자궁' 역할에만 머무르는가? 때로는 정실 부인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면서까지. (만화 <The Five Star Stories> 에서 파티마의 설정이 불쾌했던 이유도 이것이다. 그들은 기계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자 남성의 보조적 역할 혹은 '자궁' 이다. 



<왕좌의 게임>에는 그래도 대너리스, 세르세이, 아리아가 있었다. <듄>에는? 퀴사츠 해더락을 낳은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와 그녀의 미친 딸 엘리아, 퀴사츠 해더락과 정략결혼하여 자손을 보지 못하고 회고록을 남긴 이룰란 공주가 있다. 퀴사츠 해더락과 사랑하고 그에게 영감을 주고, 결혼은 못했지만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도맡았던 챠니가 있다. 챠니의 말을 들어보자. 


"얘기했잖아. 시에치는 남자들이 없는 외로운 곳이라고. 거긴 일을 하는 곳이야. 우린 공장과 포장실에서 일해. 무기도 만들어야 하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모래기둥을 박아야 하고, 뇌물을 바치려면 스파이스도 채취해야 하니까. 또 모래언덕에 식물을 키워서 모래를 제자리에 묶어두게 만들어야 해. 천과 융단도 만들어야 하고 연료 전지도 충전시켜야 하지. 부족의 힘이 약해지지 않게 아이들도 훈련시켜야 하고."

"그럼 시에치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는거야?"

"아이들이 즐거운 일이지. 우린 의식을 지키고 음식도 충분해. 때로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북쪽으로 와서 자기 남자와 함께 지내기도 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 듄 신장판 1권, 707쪽



프레멘 여성만 일하고 남성은 논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멘은 성별을 막론하고 전사로 훈련받는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아이를 낳고 나면 남녀의 역할은 저렇게 분담되고 만다. 리에트 카인즈의 딸인 챠니, 현명한 여성이고 성직자인 챠니조차 퀴사츠 해더락에게 힘을 주는 일종의 '뮤즈'로 소비되는 느낌이다. 


레이디 제시카는 1부 마지막에서 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룰란 공주와 결혼하려고 할 때 (폴은 챠니에게 결혼관련 협상 역할을 맡기며 심지어 '잘 지켜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삶이 저 공주의 삶보다 낫다며 챠니를 위로한다. 이룰란 공주는 결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할거라며.


"생각해 봐라, 챠니. 저 공주는 아내라는 이름을 갖겠지만 첩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결혼으로 자신과 묶여있는 남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부드러움을 맛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말이다, 챠니, 첩의 이름을 달고 있는 우리는 역사가들에 의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다." 


- 듄 신장판 1권, 892쪽


남자의 부드러움? 아내라는 이름? 마음? 낭만적 사랑? 그게 여성의 삶에 유일한 보상이자 위로인가? 

남자의 마음이 없어도 공주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의 삶을 정형화하여 이것이 당신들에겐 적당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다. 이것이 내가 영화 <듄>과 책 듄 1부를 보고 씁쓸했던, 그리고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이유이다. 예전에 쓰여진 소설에는 이런 설정이 많이 나오고, 과거의 나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즐겼다. 그 부분 빼고는 괜찮잖아- 라면서. 이제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다. 읽더라도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11-24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앤절라 카터 책 읽고 ‘이 책은 나보다 페미니스트들이 더 좋아하겠다‘고 리뷰 써놨더라고요? 와- 제 과거 어떡해요?

그런데 듄이 이런 내용이군요. 사실 저는 SF 에도 판타지에도 관심 없어서 듄에 대해서도 좀 무심한 편이었는데, 수하 님 글 읽고 보니 오히려 읽고 싶어져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고 대차게 까고 싶어진달까요.... 흠흠.

건수하 2021-11-24 10:3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도 그런 과거가 ㅎㅎㅎ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별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오려고 애썼는데 말이죠...

SF에 관심없으시면 초반에 좀 재미없으실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가 재미있긴 재밌어요. 읽어보시고 대차게 까주세요!! 900쪽이 넘어서 갖고다니면서 읽기는 힘드니 전자책 추천합니다~

독서괭 2021-11-24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하하 다락방님 수하님께도 그런 과거가 있으시다니 정말 위안이 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ㅜㅜ
수하님 글 넘 재밌게 읽었고, SF에 특별히 관심없는 자로서(시간여행 쪽에만 관심있음) 고민없이 거르면 되겠다 싶네요. 지적해주신 ˝자궁˝으로 소비된다는 내용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건수하 2021-11-24 14:36   좋아요 1 | URL
사실 전 SF 좋아하는데 말이죠, 이 이야기가 오래되긴 했지만 오래된 이야기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실망스럽더라구요. 영화에서는 남성 인물 하나가 여성으로 바뀌는 등 약간 변화가 있긴 했답니다.
 

이 책의 저자 마리아 미즈의 관심사는 페미니즘, 환경과 세계 개발문제에 대해 방법론과 경제학 부분에서 대안적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1998년에 쓴 이 책의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낸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23쪽


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 전에 읽은 <캘리번과 마녀>에서도 나왔던 이야기다.


이번주에는 “2장, 성별노동분업의 사회적 기원”을 읽었다.



요약)


다양한 형태의 불균형하고 서열이 있는 노동분업은 오늘날 전 세계가 자본축적의 엄명 아래 불평등한 하나의 노동분업시스템으로 구조화된 단계까지 와 있다. 이 불평등한 노동분업은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다. 자신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무기를 이용해 다른 생산자의 생산력과 생산품을 전유하고 종속시키는 관계는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171-172쪽)



맑스와 엥겔스가 '인류의 생산 혹은 출산'과 관련된 것을 '자연적'인 과정으로, 생산수단과 노동의 발전과 관련된 것을 '역사적' 과정으로 구분한 것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착취적 관계들을 타고난 것 혹은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벗어난 것, 즉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며, 여성의 경우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이 여성에게 자궁과 가슴이 있다는 사실과 연결지어 생리활동의 연장선으로, 노동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 개념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생산적 노동,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남성의 일은 진실로 인간적인 것(생각하고, 합리적이며, 계획되고, 생산적인 것 등)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여성의 일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 과정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자연적 물질을 전유 (exclusively possess)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왔다. 여성은 몸 전체를 통해 생산성을 경험한다. 아이를 생산하고, 아이의 첫 번째 음식도 생산한다. 어린 아이들과 자신의 생산물을 나눠야 하므로 여성의 생산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이다. 어머니-자녀 집단은 최초의 사회적 단위이고, 그래서 이것은 인간적인, 즉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어머니는 자신과 자녀를 위해 채집을 하였고 나아가 농부가 되었다. 여성은 처음으로 자연과 진정한 생산적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에 비해 남성은 몸을 통해 생산을 경험하지 못하므로 외부적 수단, 즉 도구의 중재가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남성 생산성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첫번째 신체기관은 남근이다. 남근을 통한 남성의 생산에 여성은 물리적 조건으로 전제된다. 남성은 주로 자신을 위해 채집과 산발적인 사냥을 하였고, 사냥의 도구 즉 무기를 발전시켰다.



여성 생산성은 집단의 구성원(남성 포함)에게 양식을 제공하면서 생존을 보장했다. 사냥은 ‘위험도가 높은 경제 활동’ 이기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사냥꾼’ 보다 ‘여성 채집자’ 덕분이다. 그러나 남성-사냥꾼 모델을 인류 진화의 패러다임으로 상정하는 것은 인간사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연구의 기초가 되었고 매체를 통해 대중화되었다 (초기 호모 속의 출현을 도구의 사용과 관련하여 정의하는 것, 문명(계급이 있고 가부장적 사회가 전제되는)의 발달과 함께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발제자 의견).


남성이 사냥에 이용한 도구는 생산이 아닌 파괴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동료 인간을 강제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사냥꾼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지배력을 갖게 된다. 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관계는 기본적으로 약탈적이며 착취적이다. 이런 지배관계는 남성이 세운 모든 생산관계의 일부가 되어 왔고, 이것이 그들 생산성의 주된 패러다임이다. 첫 번째 형태의 사유재산은 가축이나 식량이 아니라 납치된 여성 노예로 추정된다.

목축민은 사육 과정에서 황소 한 마리가 여러 암소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 경제적 논리는 여성에도 적용되었다. 여성은 움직이는 재산의 일부, 가축이 되었다. 사냥꾼과 달리, 목축유목민에게 여성은 식량의 채집자나 생산자로서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자녀 특히 아들을 출산하는 의미에서 필요했다. 여성의 생산성은 이제 '출산'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남성에 의해 전유되고 조정되었다.

농업 사회에서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착취적 관계가 존재한다. 농사를 주로 짓는 이는 여성이었으며 전사-사냥꾼은 활과 화살을 통해 식량과 여성 등 모든 다른 생산물을 취할 수 있었다. 사냥꾼은 원정을 통해 다른 마을의 여성이나 어린이를 납치하여 개인 노예로 전유하거나 팔아넘겼다. 여성은 농업노동자이기도 했고, 더 많은 노예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납치된 여성은 사유재산 축적의 직접적인 원천이 되었다.



무기 독점에 기초한 남성의 약탈적인 생산 양식은 주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다른 생산경제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공격할 수 있을 때에만 '생산적'이 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불균형한 성별노동분업은 무기를 독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약탈적 생산양식 혹은 자연과 여성에 대한 전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유양식은 인간 사이의 모든 착취관계의 역사에서 패러다임이 되었다: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것, 혹은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지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가부장적이었던 사회 (유대인, 인도-유럽인, 아랍인, 중국인 - 이 지역들은 모두 초기 문명의 발상지이다) 에서 거대 종교들과 더불어 발전했다.

모든 가부장적 문명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계속 강압적이고 착취적이었다. 불균형한 성별노동분업이 일단 폭력수단을 통해 수립되면, 이는 가부장적 가족, 국가와 같은 제도 그리고 강력한 이데올로기 체제 등을 통해 유지되었다. 특히 가부장적 종교, 법, 의학 등은 여성을 자연의 일부로 규정하여 남성이 통제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



유럽 봉건제 시대는 새로운 토지에 대한 약탈적 취득과 무장한 봉건계급 (기사)에 의한 대대적인 노략질과 강탈에 기초했다. 토지와 함께 생산의 수단이자 조건인 농민 역시 봉건영주에게 특수한 생산관계 내에서 전유되고 구속되었다. 봉건제에서는 농민을 토지의 일부로 보았기에 남성 농민 역시 여성과 비슷한 위상에 있었다 (이것이 중세 시대 여성의 인권이 이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지 않았던 이유이다).


자본주의 역시 경제적 강제의 메커니즘에 기초하고 있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생산물과 생산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취득이 초기 자본주의에서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자연은 원료의 매장지였고, 아프리카 여성은 인간 에너지의 결코 마르지 않는 공급처였다. 자본가가 노동자와 임금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노동 통제를 수립하고 경제적인 강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양보가 필요했다. 유럽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인 양보는 주변부, 즉 동유럽과 식민지의 노동자 남성과 여성을 '자연'으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정치적인 양보는 가정에서 지배계급의 사회적 패러다임인 사냥꾼/전사 모델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주어졌다. 노동자의 '식민지' 혹은 '자연'은 자기 계급의 여성이었다. 결혼과 가족법에 따라 규정된 범위 내에서 그는 강압수단과 직접적인 폭력을 독점했다.

식민지와 노동계급 여성 외에, 부르주아 여성 또한 자연으로, 자본가 계급의 후계자를 낳고 키우는 이로 규정되었다. 부르주아 여성이 길들여지고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는 가정주부로 변모하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 성별분업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모든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통제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영역인 가정과 가족은 '자연, 사적이고 길들여진 자연'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공장은 공적이고 사회적('인간적')인 생산의 공간이 되었다.




여성은 자신의 생산성, 섹슈얼리티, 생식 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자발적으로 남편과 유력자(교회, 국가)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마녀사냥 이전의 유럽 여성은 자신들의 몸과 피임법에 대해 오늘날(책이 처음 쓰여진 1980년대)의 우리보다 훨씬 나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수백만의 여성이 성적 생산적 자율성에 대한 잔혹한 공격(마녀 사냥)을 당한 끝에 유럽 여성은 의존적이고 길들여진 가정주부가 되었다. 마녀사냥은 여성의 성과 재생산 행위를 통제하는 직접적인 훈련 효과 외에, 여성의 생산성보다 남성의 생산성이 우월함을 수립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마녀사냥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적 자연의 사악함-성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언제나 정숙한 남성을 유혹하려고 함 - 을 끊임없이 강조하여, 딸과 아내의 정숙을 남성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서 한 것으로, (낭만적) 사랑으로 규정했다.




Q. 여성 몸의 생산성을 동물의 번식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노동분업의 결과이다. 여성 몸의 생산성과 동물의 번식은 본질적으로 다른가? 생산물을 나누고 어머니-자녀의 관계를 맺는 것은 일부 동물에서도 나타나는 행동 양식이다. '자연'을 지배 대상 혹은 열등한 것 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경우와 구분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후 다른 결과 (성별 분업 등)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다른건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건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기 시작했다.

서문과 1장만 읽었지만, 1986년에 처음 나온 책이라는 걸 믿기 어렵다.. 믿고싶지 않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또 내 생활에서 생긴 고민이 가지를 뻗어 만들어지던 생각이 과거 페미니즘의 첫번째와 두번째 wave에서 이미 시도하였고 오류를 발견한 생각들이라는 사실에 조금 부끄럽기도 하면서, 내가 그동안 갖고있던 물음에 대한 답을 (무려 15년 전에 제시된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어쨌든 길을 잘못 찾지는 않았구나 하고 안도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1장은 그 동안 (1986년까지) 페미니즘이 걸어온 길을 요약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민감한 이슈이다.


우리 사회들 속에 있는 남녀 관계의 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47쪽


그리고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이 피해자일 뿐 아니라 공범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얼마전 지인을 방문했다가 책상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물었다. 그 분이 쓰는 논문 주제에 페미니즘과 관계된 내용이 있는지. 그 분은 조금 조심스럽게 래디컬 페미니즘의 입장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내가 요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가부장제 내부의 여성 (기혼자 여성) 은 페미니즘의 입장을 취하는데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본인의 의견을 말했다. 그 분은 나를 가부장제로부터 취하고 싶은 것 (남편이 벌어오는 돈 혹은 남편의 소유물)은 취하면서 뭔가를 더 원하는 욕심많은 여성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분과 나의 인간관계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도 이 시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분은 혼인 관계에 있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 며칠간 나는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정의 일원이면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건가? 내부자는 조직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면 안되나 또는 그것을 논하는데 한계가 있나? (있겠지) 한계가 있는 채로 이야기하면 안되나?



마리아 미즈가 제시하는 답은 위에 굵은 글씨로 나와있네...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고. 그동안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현 체제 안에서 뭔가를 조금씩 바꾸는 것 - 남성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임금 노동에 참여하거나 가사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는 것, 일자리와 관련하여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 의회 등에 페미니스트 여성을 많이 진출시켜 정책 결정이나 법 입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여성 혹은 육아와 관계된 복지를 늘리는 것, .... - 은 소용이 없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다 뒤엎어야 한다고.



여성이 억압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의 가사 노동 (남성 노동자를 서포트하는) 혹은 값싼 노동력을 전제하여 굴러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생식능력을 통제한다는, <캘리번과 마녀>에 나와서 약간 친숙해진 이야기가 나온다.



1세대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이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 (자유주의) 이나 임금 노동 (사회주의), 부르주아 남성이 독점하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갖는 것 -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갖는 것 - 이 목표였고 그것을 국가에게 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의 몸' 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적 영역으로 국가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해방에 있어 국가에게 요구하기를 멈추고 현 체제에 회의를 품게 된다. 대의정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활동이나 캠페인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1세대 페미니즘 그리고 정통 좌파는 재생산 노동 / 공공의 생산노동 혹은 임금 노동 의 자본주의적 구분을 수용한다. 그리고 여성도 임금 노동에 참여해야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기에 사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가사노동을 재평가하고 재규정하기 시작했다.



1972년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이탈리아 파도바), 셀마 제임스 (런던), 실비아 페데리치 (뉴욕), 브리지트 갈띠에 (파리)는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을 결성하였고 이후 <가사노동 임금 조직 및 위원회>라는 캠페인을 만들었다. 달라 코스타는 가정주부의 노동이 남성 임금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기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고 이야기한다. 핵가족은 '노동력' 이라는 상품이 생산되는 공장인 것이고, 가정주부의 노동은 자본축적 과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이들의 주장은 가사노동이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던 고전적 맑스주의, 여성이 해방을 원한다면 임금 노동자로서 '사회적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좌파의 인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후 폰 벨호프는 가사노동과 식민지 (엄밀한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이외에도 저개발국가, 제3세계, 남부세계 등으로 표현되는 국가들을 포함한다) 에서의 자급적 노동이 '특권적인' 남성 임금노동관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밝혔다. 로자 룩셈부르크 (1923)이 이야기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과 조건'이 농민과 장인, 식민지였다면 '가정'이 더 추가된 것이다. 노동력과 자원을 확충할, 그리고 생산한 물건을 팔 시장으로서의 대상으로.



결국 세계적 자본주의-가부장제 체제하에서 과개발국가와 저개발국가의 여성 문제는 연결이 되어 있고, 한 국가 내에서 혹은 한 가정 안에서 약간의 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어렵다, 결국은 전체의 큰 그림을 살피고,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페미니즘은 남녀 관계 이외에도 인간-자연의 관계, 중심부-식민지의 관계 등 모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계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고. 저자는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남성) 권력 엘리트를 다른 (여성) 권력 엘리트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엘리트도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며 살아가지 않는,

서열이 없고, 중앙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이다.


108쪽



(페미니스트 전반이 동의하는 생각은 아닐 것 같고 저자의 생각, 저자의 바램인 것 같지만...)




저런 사회가 실현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름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인간의 이기심,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각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모두가 문제의식을 크게 느껴야 그걸 포기할텐데, 가진 자들은 가진 걸 포기 못하고 안 가진 자들은 가지고 싶어하니...그래서 25년 지난 지금도 별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아닌지.



결국 마리아 미즈가 어떻게 에코페미니즘으로 가게 되었는지 이해는 된다. 90년대말-2000년대 초에 운동권의 영향이 축소되면서 대학가에서 환경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환경 운동이 얼마나 반향을 일으켰나?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지는, 아니 이미 심각한 지금 이 상황에도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각국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데. 결국은 이런 생각이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꾸준히 알려주고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더더 나빠지는 것은 막는게 좋겠지만. <에코페미니즘> 역시 비현실적일 것 같지만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가부장제에 속해있는 나같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책의 7장 - 새로운 사회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전망에 대하여 를 얼른 읽고 싶다. 2장-3장은 <캘리번과 마녀>와 내용이 좀 중복될 것 같은데, <캘리번과 마녀>처럼 재미있지는 않겠지만 논리가 잘 정리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캘리번과 마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보고 일반론을 보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순서를 이렇게 정했는데, 읽어보면 나의 결정이 어땠는지 알게 되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11-22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3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3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