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더 까먹기 전에 적어보려고 적는다.
일단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랐던 건 이거다. 숲의 천이 succession 에 관한 것.
(이미지 출처: 산림청 홈페이지)
이런거 고등학교 때 배웠나? 여튼 오래 전에 배웠는데. 내가 배웠을 때는 이렇게 가로 방향의 그림이 아니었고 세로 방향으로 달라지는 그림이었는데 요즘엔 거의 이런 그림만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개념을 배울 때, 실제로 가르치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음수림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라고 생각했다. 위키 백과에 '천이'를 찾아보면 천이 (생물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지막 단계인 음수림 (극상 군락)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극상 군락이란 식물의 종류가 더 이상 교체되지 않는 안정된 군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 때에는 물질 생산·축적·고사(말라죽음)의 순환이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화살표도 있겠다,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가 된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개념 자체가 그런건지 내가 그렇게 이해한 건지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시간에 따른 선형성이 표현되어 있고 나는 시간에 따라 역사는 진보할 거라는 생각을 내재화하고 있어서 이 음수림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정적, 평형 상태라는 말은 보수적인 것 같지만 진보가 거듭되다보면 언젠가는 다 좋아지고 완성되어 안정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막연한 낙관주의와 잘 부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송이버섯에게는, 소나무에게는 이 음수림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소나무는 아마 양수림 상태에서 가장 잘 자랄 것 같고 송이버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개체 어떤 집단에게는 불안정한 것이 더 좋고 그래서 송이버섯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보의 방향성을 거슬러 그 불안정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주변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지 미국에는 존재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공유지 (땅이 좁은 한국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에서 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들에게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활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고향과 관계하여 숲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경제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감수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지구의 한 편 일본에서 송이버섯이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는 듯한 삶의 방식도 자본주의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버섯의 수요가 전세계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면 자본주의와 관련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이 집단의 규모는 마냥 커질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의 표현대로 작은 패치로만 존재할 수 있다. 찾으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저 어디 존재할 뿐 수가 적기에 모두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그렇기에 지속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학생일 때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없어서, 나는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 낳고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하고싶은 일과 돈을 좀 절충할 수 있게 되어서 아이도 낳고 책도 좀 사면서 적당히 살고 있다. 코로나가 한참 창궐하던 2020-2021년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둘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어쨌든 돈은 계속 벌어와야 한다고 해서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은 대리운전, 서점주인 (자본이 부족한데), 아니면 서점 알바..? (알바를 쓸 수 있는 서점이 얼마나 될런지) 좀 무리하면 학원강사..?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공계서적 번역을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영어나 국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공계서적은 수요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내 상상력의 한계는 딱 그 정도였고 실행력도 없었다. 주류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 책을 계속 읽고 있지만 지금도 딱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들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자영업자의 수가 그렇게 많은 모양이다.
이 책의 역자 노고운은 역자 해설에서 번역은 주변자본주의적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공부 매거진 10월호에는 학원강사 출신 번역자가 나왔고, 11월호에는 대학교수 출신 동네 사회학자가 나왔다. 이분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다면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희진샘도, 서점이나 온갖 돈이 되지 않는 것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주변자본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쓰고 역자에 대해 찾아봤는데 역자는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현직 교수다. 책 어딘가에 저자가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한 학생에게 고맙다고 한 각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노고운 교수가 저자와 친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번역하는 것은 노고운 교수의 이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송이버섯을 따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모두가 꼭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살지는 않아도 된다. 쉽게 찾을 수도 없고 그렇게 사는게 쉽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면서 얻는 것이 있을 거다. 그건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찾거나 선택하기 전에 생각의 방식이 달라져야겠고 그게 가장 어렵지만 말이다.
역자는 모두가 이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삶의 방식을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류세 Anthropocene 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언급한다. 책이 출간되던 시점에는 국제지질학연합 IUGS에서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자료를 수집했지만, 올해 투표를 통해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인류세는 오존홀을 발견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한 개념이고,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는 맞다. 오존홀도 그렇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렇게 빨리 증가한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한 내 생각은.. 지질시대는 보통 대륙의 이동이나 생물의 대량 멸종, 큰 기후변화를 기준으로 지정하는 것인데 아직 인류가 그만큼의 영향을 미쳤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인류 입장에서는 중요하고 심각한 변화지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 시대는 좀 작은 단위이기는 하지만 이미 16000년 전 기준으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를 나눴고, 그 기준은 지구의 많은 면적을 빙하가 덮고 있다가 물러난, 나름 지질학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플라이스토세에 인류는 이미 존재했지만 홀로세 이후 신석기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경작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홀로세 역시 인류에게 의미가 있는 지질시대이다. 현재의 기후 위기 관련해 굳이 어떤 시기를 지정해야 한다면, 제이슨 무어 (나는 이 사람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가 주장한 대로 산업혁명 이후를 자본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지정한다 해도 지질시대라고 보기는 어렵고.
인류가 그렇게 쉽게 멸종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우점하진 않아도 소수가 살아남을 것이다. 혹시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지구에는 곰팡이나 식물 등 많은 생물들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처음 기후 우울을 앓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놀랐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 분들이 우울을 경험하는지 알아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류는 멸종한다 해도 지구는 어떻게든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낫지 않을까? 나는 기후 관련 일을 하고 있고 무력함을 자주 느끼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아졌다. 18세기 이후를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로 굳이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 위기를 구해야 한다고,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능력이나 흔적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IUGS가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은 이유는 좀더 실용적인 것이다. 원문을 찾아보긴 귀찮아 검색을 해보니 인류세는 공식적인 지질학 시대가 될까? 이런 기사가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