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기 시작했다.
서문과 1장만 읽었지만, 1986년에 처음 나온 책이라는 걸 믿기 어렵다.. 믿고싶지 않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또 내 생활에서 생긴 고민이 가지를 뻗어 만들어지던 생각이 과거 페미니즘의 첫번째와 두번째 wave에서 이미 시도하였고 오류를 발견한 생각들이라는 사실에 조금 부끄럽기도 하면서, 내가 그동안 갖고있던 물음에 대한 답을 (무려 15년 전에 제시된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어쨌든 길을 잘못 찾지는 않았구나 하고 안도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1장은 그 동안 (1986년까지) 페미니즘이 걸어온 길을 요약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민감한 이슈이다.
우리 사회들 속에 있는 남녀 관계의 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47쪽
그리고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이 피해자일 뿐 아니라 공범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얼마전 지인을 방문했다가 책상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물었다. 그 분이 쓰는 논문 주제에 페미니즘과 관계된 내용이 있는지. 그 분은 조금 조심스럽게 래디컬 페미니즘의 입장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내가 요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가부장제 내부의 여성 (기혼자 여성) 은 페미니즘의 입장을 취하는데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본인의 의견을 말했다. 그 분은 나를 가부장제로부터 취하고 싶은 것 (남편이 벌어오는 돈 혹은 남편의 소유물)은 취하면서 뭔가를 더 원하는 욕심많은 여성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분과 나의 인간관계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도 이 시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분은 혼인 관계에 있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 며칠간 나는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정의 일원이면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건가? 내부자는 조직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면 안되나 또는 그것을 논하는데 한계가 있나? (있겠지) 한계가 있는 채로 이야기하면 안되나?
마리아 미즈가 제시하는 답은 위에 굵은 글씨로 나와있네...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고. 그동안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현 체제 안에서 뭔가를 조금씩 바꾸는 것 - 남성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임금 노동에 참여하거나 가사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는 것, 일자리와 관련하여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 의회 등에 페미니스트 여성을 많이 진출시켜 정책 결정이나 법 입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여성 혹은 육아와 관계된 복지를 늘리는 것, .... - 은 소용이 없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다 뒤엎어야 한다고.
여성이 억압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의 가사 노동 (남성 노동자를 서포트하는) 혹은 값싼 노동력을 전제하여 굴러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생식능력을 통제한다는, <캘리번과 마녀>에 나와서 약간 친숙해진 이야기가 나온다.
1세대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이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 (자유주의) 이나 임금 노동 (사회주의), 부르주아 남성이 독점하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갖는 것 -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갖는 것 - 이 목표였고 그것을 국가에게 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의 몸' 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적 영역으로 국가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해방에 있어 국가에게 요구하기를 멈추고 현 체제에 회의를 품게 된다. 대의정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활동이나 캠페인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1세대 페미니즘 그리고 정통 좌파는 재생산 노동 / 공공의 생산노동 혹은 임금 노동 의 자본주의적 구분을 수용한다. 그리고 여성도 임금 노동에 참여해야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기에 사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가사노동을 재평가하고 재규정하기 시작했다.
1972년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이탈리아 파도바), 셀마 제임스 (런던), 실비아 페데리치 (뉴욕), 브리지트 갈띠에 (파리)는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을 결성하였고 이후 <가사노동 임금 조직 및 위원회>라는 캠페인을 만들었다. 달라 코스타는 가정주부의 노동이 남성 임금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기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고 이야기한다. 핵가족은 '노동력' 이라는 상품이 생산되는 공장인 것이고, 가정주부의 노동은 자본축적 과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이들의 주장은 가사노동이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던 고전적 맑스주의, 여성이 해방을 원한다면 임금 노동자로서 '사회적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좌파의 인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후 폰 벨호프는 가사노동과 식민지 (엄밀한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이외에도 저개발국가, 제3세계, 남부세계 등으로 표현되는 국가들을 포함한다) 에서의 자급적 노동이 '특권적인' 남성 임금노동관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밝혔다. 로자 룩셈부르크 (1923)이 이야기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과 조건'이 농민과 장인, 식민지였다면 '가정'이 더 추가된 것이다. 노동력과 자원을 확충할, 그리고 생산한 물건을 팔 시장으로서의 대상으로.
결국 세계적 자본주의-가부장제 체제하에서 과개발국가와 저개발국가의 여성 문제는 연결이 되어 있고, 한 국가 내에서 혹은 한 가정 안에서 약간의 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어렵다, 결국은 전체의 큰 그림을 살피고,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페미니즘은 남녀 관계 이외에도 인간-자연의 관계, 중심부-식민지의 관계 등 모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계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고. 저자는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남성) 권력 엘리트를 다른 (여성) 권력 엘리트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엘리트도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며 살아가지 않는,
서열이 없고, 중앙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이다.
108쪽
(페미니스트 전반이 동의하는 생각은 아닐 것 같고 저자의 생각, 저자의 바램인 것 같지만...)
저런 사회가 실현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름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인간의 이기심,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각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모두가 문제의식을 크게 느껴야 그걸 포기할텐데, 가진 자들은 가진 걸 포기 못하고 안 가진 자들은 가지고 싶어하니...그래서 25년 지난 지금도 별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아닌지.
결국 마리아 미즈가 어떻게 에코페미니즘으로 가게 되었는지 이해는 된다. 90년대말-2000년대 초에 운동권의 영향이 축소되면서 대학가에서 환경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환경 운동이 얼마나 반향을 일으켰나?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지는, 아니 이미 심각한 지금 이 상황에도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각국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데. 결국은 이런 생각이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꾸준히 알려주고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더더 나빠지는 것은 막는게 좋겠지만. <에코페미니즘> 역시 비현실적일 것 같지만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가부장제에 속해있는 나같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책의 7장 - 새로운 사회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전망에 대하여 를 얼른 읽고 싶다. 2장-3장은 <캘리번과 마녀>와 내용이 좀 중복될 것 같은데, <캘리번과 마녀>처럼 재미있지는 않겠지만 논리가 잘 정리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캘리번과 마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보고 일반론을 보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순서를 이렇게 정했는데, 읽어보면 나의 결정이 어땠는지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