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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혜윰님에게 이끌려 얼마 전부터 알라딘 서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했더니 알라딘 서재의 다락방님을 알려주셨고, 여성주의 책읽기에 관심이 있다보니 계속 방문하게 되면서 나도 이곳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책 이야기를 이렇게 즐겁게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그것도 예전부터 있었다니. 이런 곳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보니 알라딘 서재에 예전에 썼던 글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읽으며 거기에 내가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스트' 까지는 아닌데,
라고 써놓은 걸 보고 얼마전 깜짝 놀랐다. 2009년에 나는 저렇게 생각했구나 하고.
<듄> 1부를 읽었다. 전부터 궁금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나온다기에 같이 책을 읽는 모임
(이 모임에서는 정말 같이 '읽기' 만 한다. 함께 읽을 책을 정하고 각자 읽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톡방에서 수다를 떤다.) 에서 이걸 얼른 읽고 영화를 보자고 하여 읽기 시작했다. 이 모임은 4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책도 좋아하지만 모두 SF도 좋아한다.
1965년작, 휴고상과 네뷸러상 수상, <스타워즈>와 <왕좌의 게임> <The Five Star Stories> 등 많은 창작물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갖고있던 사전 정보였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읽었다. 반쯤 읽고 영화를 보러 갔고, 영화를 보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나는 재미있게 봤다. 당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생태학의 개념이 나오는 것도 흥미로웠고, 그 시절 히피들이 사용했던 마약 대신 향신료가 인간을 각성하게 만든다는 설정, 또 향신료 무역이 과거의 대항해시대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에서는 오니솝터 Ornithopter 의 구현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헬리콥터보다 훨씬 빠르고 섬세하게 방향과 속도를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헬리콥터도 충분히 빠르지만..) 다만 동력이 상당히 많이 들 것 같은데 연료를 실으면 또 그 무게가 추가되므로 영화에서처럼 사람을 6인이나 태우면서도 그 정도의 속력을 내려면 핵발전 정도는 해야 (...)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돈이 얼마..?
영화를 보고 나서 나머지 반은 좀더 느리게 읽었다. 설정이 거의 파악되어감에 따라 흥미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낡은 세계관이 페미니스트로서의 (드디어 말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쯤 읽었을 때에는 이것을 7부까지 다 읽어야 하는가 마음의 갈등을 하였으나 (그러니까, 세트로 묶어 할인판매하는 책을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다), 1부만 읽고 접기로 마음먹었다.
<듄>에는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베네 게세리트 (영화에서 발음은 베네 제써맅 ...) 는 버틀레리안 지하드라는 일종의 종교 혁명 이후 만들어진 일종의 성직자 그룹이고,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렌지 가톨릭 성경' 이라는 것이 그들의 경전인 것 같다. 그들은 의식을 집중하여 사물 혹은 인간의 속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고, '목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세뇌하여 움직일 수 있다.
가끔 나오는 베네 게세리트의 교리 등을 보면 가톨릭과 불교, 수피즘 등의 종교 특성이 대략 합쳐진 것 같다. 남성 황족 혹은 전사들은 이들을 뒤에서 이야기할 때 '여자 마법사' 혹은 '마녀' 라고 부른다. 반면 아라키스의 사막에 사는 종족 프레멘의 종교는 유대교 혹은 이슬람교처럼 다소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베네 게세리트는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황제의 조언자 '비밀을 말하는 자' 로서 봉사하거나 황족 혹은 귀족의 부인으로 남편에게 봉사한다. 이들의 비밀스러운 목표는 수백년 동안의 유전자 교배를 통해 특정 유전자 조합을 가진 '퀴사츠 해더락' 이라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특정인과 결혼을 하고, 특정 성별의 아이를 낳으며 (현대 과학의 상황에서 인간의 성별은 남성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베네 게세리트는 임신과 관련하여 성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긴 나중에 유기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면서 약간 바꾸어 독성을 없애는 일도 한다 (....)),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황제와 협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올 메시아 같은 존재인 '퀴사츠 해더락' 을 위해 아라키스라는 행성에 선교단을 보내 전설을 심어두기도 한다.
'퀴사츠 해더락'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자, 혹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자 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 곳에 다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이 두 의미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더 높은 차원들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퀴사츠 해더락은 '남자' 이다.
그런데, 베네 게세리트라는 집단이 수백년 동안 애써서 이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고, 각성시켜서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면, 그 이후의 목표는 딱히 없다. 거창한 세계관을 만들었지만 그게 어딘가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사실 '퀴사츠 해더락' 을 어느 다른 베네 게세리트가 통제할 수가 없다. 그 뒤는...? 2부부터는 읽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꼭 와야 하는 이유나, 와서 뭘 하기를 바라는지는 나오지않는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그러나..?
주인공 폴이 아라키스에서 각성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하드' (성전)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지하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려고 노력하지만 각성할 수록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럼 또 한 번의 지하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베네 게세리트의 목적인가? -_-;
이제 한참 <듄> 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이 이야기가 더 읽고 싶지 않고 더 궁금하지 않은 이유를 얘기해야겠다. 베네 게세리트들은 대단한 능력자다. 그러면, 딱히 뚜렷한 목표도 없으면서 (사실은 2부 이후에 나올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왜 그렇게 수백년(!) 동안 노력해서 '퀴사츠 해더락'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가? 그것이 왜 '능력자'들의 모임인 베네 게세리트의 거의 유일한 목적인가? 종교라는 것이 원래 딱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딱히 그 외에 다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열심히 정신 수련을 하고 능력을 개발시키는가? 황제나 다른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조차,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어 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말이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조언자, 그리고 '자궁' 역할에만 머무르는가? 때로는 정실 부인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면서까지. (만화 <The Five Star Stories> 에서 파티마의 설정이 불쾌했던 이유도 이것이다. 그들은 기계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자 남성의 보조적 역할 혹은 '자궁' 이다.
<왕좌의 게임>에는 그래도 대너리스, 세르세이, 아리아가 있었다. <듄>에는? 퀴사츠 해더락을 낳은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와 그녀의 미친 딸 엘리아, 퀴사츠 해더락과 정략결혼하여 자손을 보지 못하고 회고록을 남긴 이룰란 공주가 있다. 퀴사츠 해더락과 사랑하고 그에게 영감을 주고, 결혼은 못했지만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도맡았던 챠니가 있다. 챠니의 말을 들어보자.
"얘기했잖아. 시에치는 남자들이 없는 외로운 곳이라고. 거긴 일을 하는 곳이야. 우린 공장과 포장실에서 일해. 무기도 만들어야 하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모래기둥을 박아야 하고, 뇌물을 바치려면 스파이스도 채취해야 하니까. 또 모래언덕에 식물을 키워서 모래를 제자리에 묶어두게 만들어야 해. 천과 융단도 만들어야 하고 연료 전지도 충전시켜야 하지. 부족의 힘이 약해지지 않게 아이들도 훈련시켜야 하고."
"그럼 시에치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는거야?"
"아이들이 즐거운 일이지. 우린 의식을 지키고 음식도 충분해. 때로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북쪽으로 와서 자기 남자와 함께 지내기도 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 듄 신장판 1권, 707쪽
프레멘 여성만 일하고 남성은 논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멘은 성별을 막론하고 전사로 훈련받는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아이를 낳고 나면 남녀의 역할은 저렇게 분담되고 만다. 리에트 카인즈의 딸인 챠니, 현명한 여성이고 성직자인 챠니조차 퀴사츠 해더락에게 힘을 주는 일종의 '뮤즈'로 소비되는 느낌이다.
레이디 제시카는 1부 마지막에서 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룰란 공주와 결혼하려고 할 때 (폴은 챠니에게 결혼관련 협상 역할을 맡기며 심지어 '잘 지켜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삶이 저 공주의 삶보다 낫다며 챠니를 위로한다. 이룰란 공주는 결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할거라며.
"생각해 봐라, 챠니. 저 공주는 아내라는 이름을 갖겠지만 첩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결혼으로 자신과 묶여있는 남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부드러움을 맛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말이다, 챠니, 첩의 이름을 달고 있는 우리는 역사가들에 의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다."
- 듄 신장판 1권, 892쪽
남자의 부드러움? 아내라는 이름? 마음? 낭만적 사랑? 그게 여성의 삶에 유일한 보상이자 위로인가?
남자의 마음이 없어도 공주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의 삶을 정형화하여 이것이 당신들에겐 적당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다. 이것이 내가 영화 <듄>과 책 듄 1부를 보고 씁쓸했던, 그리고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이유이다. 예전에 쓰여진 소설에는 이런 설정이 많이 나오고, 과거의 나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즐겼다. 그 부분 빼고는 괜찮잖아- 라면서. 이제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다. 읽더라도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