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을 필사하다가 8월에는 좀 쉬었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좀 읽어보고 싶어서 찾아보았다. 퀜틴 벨이라는 버지니아의 조카가 쓴 책이 유명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는 것을 알았고, 허마이오니 리라는 사람이 쓴 책은 800쪽짜리 2권으로 되어있길래 (절판이기도 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동성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아들 (나이젤 니콜슨)이 쓴 가벼운 전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이것을 읽어보기로 했다. 어머니의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알라딘 중고 등급 상-최상만 사고 중은 정말 급할 때만 가끔 산다. 우주점에 '상' 등급이 있어 주문했는데 등급이 '중' 이라며 주문이 취소됐다. 중을 시도해볼까 하다가 책바다 서비스로 대출해봤다. 


독일이나 북유럽 쪽 책을 많이 번역하는 안인희 님의 번역이다. 두껍지 않고 괜찮아 보였다. 역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이 책이 왜 다시 나오지 않았을까 의아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마음에 드는 문장도 발견했다. 


“기록되기 전엔 아무 일도 진짜로 일어난 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써야 한다. 일기도 꼭 쓰고." 기록을 하면 고통은 줄어들고 기쁨은 두 배가 된다. (11쪽)



나는 기억력에 자신감이 있는 편이었는데, 최근 내가 완전히 잊고 있던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에 조금 상처를(?) 입었다. 역시 기록을 남겨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 (여전히 귀찮기 때문인지)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괜찮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다. 김신지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읽고서는 5년 일기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고.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벨 (퀜틴 벨)의 빈정거림에 마음이 상해있던 헨리 (조지 덕워스의 아들)는 내게 다섯 통의 편지를 내주면서 출판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 편지들이 조지와 의붓누이 버지니아의 관계가 이성적으로 비난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몹쓸 취급을 받은 소녀가 자신을 유혹한 오빠에게 '친애하는 변호사님' 이나 '나의 사랑하는 조지' 라는 등의 말로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조지가 품었던 열정의 또 다른 희생자로 여겨지는 바네사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와 함께 1900년에 파리로,

그리고 2년 뒤에는 로마로 여행을 갔던 일도 마찬가지다. (25쪽)


곧 이 부분을 읽고나서 마음이 확 식어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이부 형제 (조지 덕워스, 제럴드 덕워스) 에 의한 가족 내 성폭력의 피해자라고 알려져 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성폭력의 강도에 대해서는 퀜틴 벨 (언니인 바네사의 아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조카)은 좀 강하게 언급한 것 같다. 그것을 조지 덕워스의 아들이 불편하게 여겼고 그에 대해 반론의 증거가 될 만한 편지를 나이젤 니콜슨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증거가 될만한 내용이라는게 '친애하는 변호사님'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조지' 라는 판에 박힌 인사말이라는 거다. 게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소설 <출항>은 제럴드 덕워스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게 버지니아에게 괴로운 일이었을 거라고 이 저자는 앞에서 언급하기까지 했었다. (바네사가 자신이 당한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했었는지는 알지 못하니 바네사가 여행을 간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이게 바로 제3자가 정황을 증거로 '피해자다움'을 판단하는 것 아니던가.  그 정도 접촉은 친분이 있는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게 그렇게 괴로워 할 일이었냐.. 라던가 위계가 있는 관계의 성폭력이 일어난 이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지 않았느냐 (어떤 사건 이후 순두부 요리를 파는 식당을 알아봤다거나 하는), 그 성폭력이 정말 있었던 게 맞느냐_ 라던가 하는 말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까 이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었고, 요즘 더위에 피곤하기도 했고, 책바다 서비스의 기한 2주가 다 되어서 얇은 책이지만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 책이 나온게 2006년, 쓰여진 게 2000년이니 이미 한참 전의 책이기도 하고, 저 구절이 책 전체를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분위기에 이런 뉘앙스를 풍기는 책을 굳이 다시 출간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중반부에도 <자기만의 방>에 대해 극히 일부의 예를 들어 비판적인 언급을 한다. 제인 오스틴이 숨어서 원고를 썼다지만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는 출판을 적극 권장했다거나, 제인 오스틴도 자기만의 방 없이 훌륭한 소설을 썼고, 버지니아 울프도 방이 있는데도 오히려 붐비는 창고방에서 원고를 쓰지 않았느냐면서.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정말 '방과 500파운드'라고 생각하는 우둔한 처사다. '버지니아 자신의 행동과 업적을 통해 자기와 같은 계층의 여성들이 이미 해방되었음을 입증한것이 아닌가?' 라며 중산층 여성의 한계라는 판에 박힌 말까지 덧붙였다. 




실망한 김에 전에 봐뒀던 그래픽 노블을 읽어보기로 했다.


성폭력 부분이 꼭 궁금한 건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그 부분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암시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퀜틴 벨이 어떻게 썼는지를 모르겠어서.. 이 책이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이젤 니콜슨이 언급한 것만큼 가볍게 묘사해놓지는 않았다. 


이 책은 시간 순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있었던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그녀의 작품들 중 그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혹은 있을 것 같은 것들의 일부를 인용하며 함께 배치해 놓았다. 문제는 내가 그 작품들을 거의 안 읽었거나 읽었어도 잘 이해를 못하고 있거나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것.. <자기만의 방> 부분은 잘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는지 레너드 울프라는 사람은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많은 글을 출판했고 활발히 활동한 것을 보면 참 적극적인 사람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아직 호기심은 충족이 되지 않았고 소설은 어려우니 소설이 아닌 글을 읽어볼까 한다. 전에 사두고 안 읽은 <3기니>도 있고.. 



아, 그리고 그래픽 노블까지 읽고 나서야 다른 평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처음 검색했을 때 이 책을 지나쳤는가..)


이 책은 어떨지 궁금하고. 














쟝님이 읽길래, 울프는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궁금해서 주문해봤다. 남의 일기 훔쳐보는 느낌이려나... 그런데 무척 두껍다.












기록되기 전엔 아무 일도 진짜로 일어난 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써야 한다. 일기도 꼭 쓰고." 기록을 하면 고통은 줄어들고 기쁨은 두 배가 된다. - P11

우리가 그녀를 만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질문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관찰의 가르침이었지만 힌트이기도 했다. "아이디어의 날개를 잡아 그것을 못으로 박아두지 않으면 머지 않아 어떤 아이디어도 갖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평생 기억하게 된 충고였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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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8-19 1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 그래픽 노블은 저도 읽었습니다^^
참 저도 자기만의방, 올랜도, 댈러웨이부인 읽고 좋아서~ 등대로 읽겠다고 한 게 어언 몇년.. ㅋㅋ 올해는 읽어야겠어요.

건수하 2024-08-19 18:25   좋아요 1 | URL
<올랜도>가 <고독의 우물>과 비슷한 시기에 비타를 모델로 쓴 소설이고 그게 막 출간되어 반응이 좋을 때 <자기만의 방> 의 강연을 했다고 해서, <올랜도>도 좀 궁금해졌어요. 다 읽진 못하겠지만, 읽을 게 많아서 아쉽진 않네요 ^^

독서괭 2024-08-19 18:34   좋아요 1 | URL
올랜도는 재미는 없더라고요.. 다락방님이 끝내 실패하셨다는 후문이 ㅋㅋ

건수하 2024-08-19 18:36   좋아요 0 | URL
어, 그럼.. <댈러웨이 부인>은 재밌었나요? 전 <파도>만 읽고 나가떨어져서... ㅎ

독서괭 2024-08-19 18:47   좋아요 1 | URL
전 댈러웨이 부인 무척 좋았습니다!!

다락방 2024-08-19 19:13   좋아요 2 | URL
올랜도.. 네, 저는 중도 포기했습니다.. 🙄

단발머리 2024-08-19 21:10   좋아요 1 | URL
아 ㅋㅋㅋㅋㅋ 저는 올랜도는 재미있었고, 댈러웨이 부인 다 읽었지만 넘나 힘들었습니다.

건수하 2024-08-19 21:26   좋아요 0 | URL
앗 세 분의 의견이 다 다르네요 고민됨… 🤔

수이 2024-08-20 07:49   좋아요 1 | URL
올랜도는 재미있었고 댈러웨이 부인은 더 재미있었습니다. 파도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수하님 말씀 듣고보니 읽어야겠다 싶어지는 오늘 아침.

건수하 2024-08-20 08:57   좋아요 0 | URL
가지고 있는 것부터 읽어봐야겠네요 ^^

공쟝쟝 2024-08-19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울프일기는 ㅋㅋㅋ 뭐랄까 알라딘 서재 같아요 ㅋㅋㅋㅋㅋ 읽은 책 읽고 쓰는 일의 기쁨과 슬픔 ㅋㅋㅋ 더 잘쓰고 싶은 욕망…

건수하 2024-08-19 21:27   좋아요 1 | URL
작품 관련된 일기만 모아서 그런가봐요 ㅎㅎ 그러면 읽고 기록을 열심히 하게 되려나… ^^

수이 2024-08-20 07:50   좋아요 1 | URL
수하님은 충분히 성실하게 읽고 기록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요. 저처럼 중구난방으로 읽고 쓰는 분 같지 않아, 저와 다른 결을 지니고 계신 거 같아 저는 수하님을 좋아합니다.

건수하 2024-08-20 08:59   좋아요 1 | URL
아? 수이님 일기도 쓰시잖아요. 저는 읽는 것만 겨우 쓰고 그마저도 요즘엔 잘 안 쓰게 되어서.. 근데 아직은 기억력을 위해 기록을 열심히 하기에는 동력이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어쨌든 좋아한다고 말해주시니 기쁩니다 :)

수이 2024-08-20 09:23   좋아요 1 | URL
역시 사랑을 해서 부드러워지는군요. 서슴없이 좋아합니다 라고 애정 고백을 해도 부끄럽지 않고 🤔

단발머리 2024-08-19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나 손택의 전기에서도 그랬는데, 전기는 ‘전기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니까요.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전, 잘 모르겠더라구요. 왜 이런 고민을 하냐면, 전 잘 믿는 사람이라서요 ㅋㅋㅋㅋㅋㅋㅋ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전 읽었습니다. 무척 좋았어요^^

건수하 2024-08-19 21:42   좋아요 2 | URL
제가 뒤늦게 저 책과 단발머리님 리뷰를 발견했답니다 ^^ 단발머리님이 좋다고 하셔서 읽어보려고요😍

단발머리 2024-08-19 21:43   좋아요 2 | URL
😘☺️😎

수이 2024-08-20 07:50   좋아요 1 | URL
전 잘 믿는 사람입니다_라는 단발님의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단발님은 충분히 그에게 믿음이 생겨야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수이 2024-08-20 0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근사해서 왔어요, 수하님. 근데 댓글들도 잼나서 아침부터 댓글 달았음. 크크. 나도 탐험해보고 싶다, 울프의 세계. 수하님 따라서.

건수하 2024-08-20 09:01   좋아요 1 | URL
수이님은 아렌트랑.. 많이 하고 계신거 같았습니다 ^^ 잘 묶어서 글만 쓰시면 될 거 같은데-

수이 2024-08-20 09:24   좋아요 1 | URL
그 말은 제가 아니라 우리 아렌트 전공자 단발님에게로 반사!

잠자냥 2024-09-06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달의 당선작 박수~!!

건수하 2024-09-06 10:10   좋아요 1 | URL
어머나 🫨 어제 몇 개 눌러봤는데 제가 당선된 줄은 몰랐… 잠자냥님 덕분에 알았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잠자냥 2024-09-06 10:16   좋아요 1 | URL
책 사…..

건수하 2024-09-06 10:2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요즘 사 놓고 못 읽은 책 쌓이는 거 보는 스트레스가 엄청나서...
그래도 적립금 들어오니 신나네요 담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