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이 발달함에 따라 알려진 유전학적 사실과 겉으로 보이는 결과 (표현형) 이나 동물의 행동을 어떻게 연관지어 해석할 것이냐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것을 쉽게 풀어 대중에게 알리려 했다는 점에서 생물학계에 있어 중요한 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누구나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기에는 (저자가 물론 쉽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전체적인 논지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잘 정리해두지 않아 유전학이나 동물행동학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가 읽고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논지의 근거 (다양한 학자들의 논문 등)와 다양한 상황에 대한 깨알같은 예시가 많이 제시되어 있고 (이것을 다 책에 넣었다는 점에서 저자가 매우 성실한 학자임을 알 수 있다) 영국식 유머 (모두까기 등) 덕분에 더 산만하기도 하다.
출간 30주년을 맞아 자신이 적었던 것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업데이트했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성실성을 높이 살 만 하다. 다만 기존의 책 말미에 보주를 추가하기보다는 본인의 논문이나 책 등을 인용하여 책을 하나 더 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는 ~이라는 내 논문에 나와있다 - 식의 기술이 많아서) 한 마디로 성실하나 친절하지는 않다고 하겠다.
(재미있게 읽은 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이 내용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들 이 책을 그렇게 필독서로 지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책이 쓰여진지 50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 책을 안 읽고도 지금까지 (과학계에서) 살아오는 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교양으로 읽는다면 여기 나오는 예시들을 다 이해하려 하지는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도 좋겠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유전자' 보다는 meme 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에드워드 윌슨과 어떤 논쟁을 했는지, 또 논쟁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도킨스는 내가 보기엔 상당히 성실하고 직설적인 학자이나 윌슨은 (나름 점잖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도킨스를 가리켜 '요즘 연구도 안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고...
또 도킨스의 실제 연구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는 <확장된 표현형>도 예의상 좀 읽어주고 싶기도 하고. 미미님이 쓰신 글에 따르면 최재천 교수는 도킨스를 만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받았고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를 그리 달가워하진 않았을 것 같다), 최재천 교수는 '[이기적 유전자]는 차가운 머리로 쓴 것 같고 당신다운 논리정연함이 돋보인다' 고 말했다고 하는데, 내가 받은 느낌으론 <이기적 유전자>도 차가운 머리로 썼다기엔 너무 투덜거림과 빈정거림이 많아서 (나름의 영국식 유머... 하지만 나는 그런 거 좋아하며,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사실은 좋았다) 도킨스가 뜨거운 가슴으로 썼다는 <만들어진 신>은 읽고 싶지 않다 ㅋㅋ
개정판 서문에 헬레나 크로닌에게 깊이 감사한다는 말이 있어서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었다. <이기적 유전자> 이전부터 이후까지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을 것 같아서 보관함에 담아둔 책 <개미와 공작> (출판사 책소개를 인용하자면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부터 존 메이너드 스미스와 리처드 도킨스에 이르는 다윈주의의 역사를 관통해서, 일개미들의 자기희생과 수컷 공작들의 아름다운 깃털이 개체들의 번식과 생존이라는 틀을 넘어서 다윈주의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학문적 진화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서술' 한 책이라고) 의 저자가 그 헬레나 크로닌임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읽어보고 싶다. 그러나 책이 두껍고 번역이 별로라는 평이 있어서... 내가 이 주제를 정말 잘 이해하고 싶은건지 좀 고민해 봤다.
.
.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 읽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 그리고 전에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페미니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 지인이 함께 읽고 이야기해보자- 라고 했던 책 <아름다움의 진화>도 잠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지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적어둔다. 그 지인과는 연락을 안한 지 오래되었지만 (페미니즘 때문은 아니고 서로의 접점이 없어졌는데, 따로 연락을 할 동력도 없었던지라) 읽어보겠다 하고서 너무 지루해서 그만두고는 연락 안한게 나라서... 다시 한 번 시도해볼까 싶다. 그때보다는 읽어볼만 할 것 같아서.
3월 8일 시작해서 이제야 끝났다. 두 달간 나의 출퇴근길은 가끔 신기하고 대부분 지루했는데 (가끔 다른 사람의 실수를 콕 집어 지적하거나 빈정거릴 때는 재미있었다) 이제는 다른 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일단은 5월 '정희진의 공부'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