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이렇게 성실하게 장별로 밑줄을 올릴 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읽었다.
아주 사소한 '남성우월적인' 언급에도 짜증을 부리면서 끊임없이 포함될 것을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들.
이란 표현을 보자마자 밑줄을 그었다. 백인 여성에 대해 언급한 문장이었다.
얼마 전 나를 '이렇게'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동기 중 하나가 주재원으로 출국하게 되어 모였다. 남자 동기들 중 하나가 아이 학원 이야기를 하며, (그 학원의 이름은 동물 중 남성형인데) 그 학원에 못 들어가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을 비공식적으로 같은 동물의 여성형 이름으로 부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애들 학원이고 동물 이름이긴 한데, 남성형이 여성형보다 레벨이 높다 이런 얘기다.
애초에 그 학원 이름이 동물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 테고 어떤 맥락으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지 알겠지만 비슷한 동물의 다른 종을 얘기할 수도 있는데 굳이 여성형으로 부른다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부르는 거, 되게 성차별적이다. 기분 나쁜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자 동기들은 살짝 굳어서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일터에서도 교육받고 눈치보고 했겠지만 이런 데서 지적받을 줄은 몰랐겠지. 그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된 기분이었냐 하면.
아주 사소한 '남성우월적인' 언급에도 짜증을 부리면서 끊임없이 성찰을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들.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느낌을 받았다. 훨씬 긴 것 같은 몇 초가 지났고, 뭔가 마무리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 명칭이 그렇다고, 너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라고 마무리했다.
아이들도 학원을 그렇게 부른다는 걸 알고 있겠지. 너가 딸을 키우니까 너는 더 예민하고 주의해야지,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참았다. (나의 배우자에게 자주 써먹는 말이다)
어떤 여성들은 흑인 남성이나 다른 인종적으로 억압된 (또는 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집단의 투쟁을 통해 대리적인 자유를 성취하려는 시도를 여전히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다른 여성들은 이러한 투쟁 모두를 단념해 왔다. 대신 그들은 권력이 옮겨질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으로, 그들 자신의 이익을 남성의 이익과 동일시하면서 억압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 그들의 해결책이란 남성들의 강력한 자아에 완전히 병합되기 위하여 - 흔히 사랑으로 - 그들 자신의 비참한 자아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 P159
그 둘 모두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는 공적 소유나 사적 소유냐 사이의 선택의 여지밖에는 없는데, 각자가 상대편이 무엇인가를 훔쳐 달아난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에 양쪽은 자신들의 좌절을 진정한 적인 ‘남성‘에게가 아니라 서로에게 잘못 쏟도록 속임을 당할 수 있다. - P165
흑인 사회는 백인 가족의 성적 욕구를 공급하면서 그것의 기능을 유지시키는 외집단이다. 그것이 빈민가에는 가족 연대가 없는 이유이다. ... 개별적인 백인 가정은 개별적인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평생 가사노동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 P169
아주 사소한 ‘남성우월적인‘ 언급에도 짜증을 부리면서 끊임없이 포함될 것을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들. - P171
그녀의 협력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여성‘이 되어야만 흑인 남성이 ‘남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178
그들(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오랜 적대감은 그들이 남성에 대해 배워온 소중한 (고통스런) 교훈들을 주고받기 어렵게 만든다. 만일 그들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곧 아내도 매춘부도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두 역할 모두 자기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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