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가까이하기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에 대해 조근조근 풀어주면 참 고맙다. 내 내면에는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이 약간 있었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잘 몰랐는데 그걸 연결해주는 느낌 말이다. 너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한 거라고. 그게 딱딱 맞으면 더 반갑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이 딱 그랬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반사적으로 느끼는 반감 (그래서 처음엔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반감을 느끼는지를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은 나의 사고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미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거부감을 갖는 페미니즘을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여전히 페미니즘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들이밀 수는 없겠지만.
1장에서 행복이란 단어의 속성이 어떤지, 그것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차근차근 파헤칠 때 특히 좋았다. 행복은 명료한 것 같으나 막연하고, 약속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뒤로 도망가며, 사회적 규범들을 합리화한다. 2005년쯤 행복학, 행복경제학이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도 그때 나왔던 책 중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책 본문에 나왔던 BBC 다큐멘터리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 책을 언제 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어쨌든 굳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고 내가 결혼을 함으로써 '행복' 의 정상 궤도에 진입할 때 쯤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BBC지만 (그러면 다큐를 보지 그랬니?) 읽어보니 별 내용이 없다고 느껴졌다. 이건 다 아는 내용 아닌가? 왜 굳이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책을 만들었지 라고 생각했었다.
미국에서 경제위기는 2008년에 터졌지만 이미 그전에 서구, 소위 선진국에서는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해져서 이제 경제로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복'으로 눈을 돌리도록 유도한 것 같다. 결국 행복은 마음에 달려 있다며. 알랭 드 보통의 책 중에도 '사랑'을 다루지 않는 책들에는 그런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불안>이 그러한데, 이 책에서는 대놓고 '행복'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대책을 제시한다. 다섯 가지가 뭐였더라... 철학, 기독교, 예술, 정치, 그리고 마지막이 좀 웃겼는데 '보헤미안' 이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을 굳이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 결과인 것 같다.
이 <불안>이 2004년에 나온 책이다. 이 시기 한국은 IMF 외환 위기로부터 좀 벗어나고 있었을 때였고 나는 어쩌다가 정상 궤도로 진입하고 있었기에 저 <행복>의 말들이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좀 다를까? 어쨌든 뻔한 얘기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행복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니까.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개념을 파헤친 후 2,3,4 장에서 각각 페미니스트, 퀴어, 우울증적 이주자의 입장에서 '행복' 이 어떤 일을 하는지, 행복이라는 것이 왜 모두에게 좋은 것일 수 없는지를 이야기한다. 페미니스트, 퀴어, 이주자는 사라 아메드 자신의 입장이기도 하다. 모든 소설이 자전적이라고 하듯이, 학문도 대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 입장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서구의 많은 남성학자들이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결국엔 서구를 옹호하며 꼰대짓으로 마무리하는 거고 (니얼 퍼거슨이 대표적인 경우랄까), 얼마전 정희진의 매거진 5월호에서 언급했듯 서구 사람이 아니면서 영어를 잘 하는 사람 - 스피박, 차크라바르티 등 - 이 결국 새로운 성과를 내는 이유인 것 같다. 가끔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행복의 약속>을 읽으며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잊고있던 나의 소수성에 대해 다시 기억해내고 생각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니다 싶기도 한데,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꽤 부담을 주는 것이었고 이후 나의 행동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기는 했다.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왼손잡이라는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쓸 때는 거의 왼손을 먼저 쓰는 편이다. 다른 때는 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는데, 식사할 때는 주목을 피하기가 어렵다. 왼손잡이의 원인이 밝혀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다), 가끔 내가 거울상으로 보고 배우는 것에 서툴렀던 건 아닌가 생각도 해보는데 (그러니까 맞은편 사람이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것을 보고 왼손으로 따라한 것일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른손으로 시도했을 때 잘 교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성향은 드러났다. 요즘은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속한 가정에서는 교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숟가락은 쉽게 오른손으로 옮겨갔으나 젓가락은 잘 안되었고 원래 밥 먹는 속도가 느렸기에 오른손으로 더 느리게 식사하는 것이 싫어서 교정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포기했지만 조부모님을 만나면 항상 혼났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는 항상 지적을 받았고 알아서 왼쪽 가장자리 자리를 잡으려 노력하며 살아왔다. 의외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모르거나 지적을 안하거나 하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 그리고 한 번 만나고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쉽게 지적하곤 한다. 젓가락 사용을 시도해보는 외국인에게 '쟤는 different style로 하는데?' 라고 얘기 들은 적도 있다. 아마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사이에서는 실례라 생각해 말하지 않고 참는게 아닐까 싶다.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엄마가 정말 작정하고 독하게 교정을 시켰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위인 만화를 보다가 그도 왼손잡이라는 사실에 반가워하며 엄마한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고 뭐고 글씨는 절대 안된다며 글씨를 오른손으로 쓰기까지 엄청나게 혼났다.
그런데 꼭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 같은 걸 받은 적이 있었으니, 그건 친할머니로부터였다. 가끔 만나는 손녀(손녀라는 것도 불만이셨고)의 젓가락질에 할머니는 매우 못마땅해하셨었는데, 어느날 저녁을 먹으며 (그날도 아마 혼났을 것이다) 티비에서 '왼손잡이가 머리가 좋다' 라는 내용의 뉴스가 나온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한 번 훑어본 뒤, 엄마에게 '놔둬라!' 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적어도 친가에서 왼손잡이라는 걸로 얘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대신에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 딱 한 번 친구를 따라가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데 공부를 해야 할 팔자라고 했었다. 그 사주 같이 보러갔던 친구는 너가 공부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계속 하더라 라는 말을 지금도 하는데, (지금도 편하게 살면 될텐데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있고)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그 얘긴가?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어린 나는 머리가 좋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어쨌든 할머니 덕분에 아니 그날 때맞춰 나온 뉴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부담은 느끼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지 않아도 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걸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됐다. 언젠가부터 '꼭 그래야만 해?' 라는 생각을 하는게 자연스러웠다. 물론 그 생각을 어른들에게 내보이진 않았지만.. 그리고 조금 더 커서 패닉의 '왼손잡이' 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을 때, 참 반가웠었다.
(은오님은 아실까, 패닉의 <왼손잡이>?)
https://www.youtube.com/watch?v=LoQ08C_jiQg
어우야 가요톱10... 그리고 이때는 다들 춤을 참 느리게 춘다..^^
도저히 못 보겠어서 음악만 있는 링크를 다시 가져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lyBcLvlaM
학생운동을 하던 친오빠는 반가워하던 나에게 이적의 왼손잡이는 사실 좌파를 가리키는 거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래서 좌파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고 내 성향에 딱 맞았다. 오빠에게 이미 많이 세뇌당하기도 했지만. 왜 우는 우이고 좌는 좌인지도 궁금했고 그런 걸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왼손잡이로서 특별히 많이 억압당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자꾸 지적받는 것, 신기하게 보는 것,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는 것은 싫었다.
나는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해도 언제나 분위기를 깨는 자였다. 그래서 주목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습관화되었다. 또 하나 나를 주목받게 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도 여전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한 번 보고 말 사람들만 언급한다. 그래서 그걸 지적하면 무뚝뚝하게 '네' 하고 만다. 더 이상 얘기가 이어지지 않도록. 이제는 분위기를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왼손잡이보다 여성은 많이 억압받지만, 여성은 인류의 반이라서, 그래서 좋았다. 같이 얘기 나눌 사람이 많아서.
그래서 페미니즘은 우울하지 않고 든든하다.
'행복'을 조금 포기하면 나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고 하고싶은 말을 하며 사는 것, 나에겐 그게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