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가 이 책을 쓸 때와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많이 다르지는 않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 - 특히 여성의 입장 - 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으나 나는 결혼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지는 않았겠지. 나는 얼떨결에 질렀(...)는데, 다른 사람들은 '알면서도 왜 결혼하는가', 아니 왜 결혼'했는가' 궁금하다.
그리고 남성들이 결혼에 대해 가지는 부담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그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왜 결혼하고 싶어하는가 역시 궁금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결혼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시 누가 진지하게 생각하고도 결혼했다면, 정말 물어보고 싶긴 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결혼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결혼까지는 괜찮다, 아이는 신중하게 생각해라-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돌이킬(?) 수 있지만, 아이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때 조금 미안함을 느끼지만,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내가 결혼 생활 혹은 가족 내에서 느끼는 어려움의 상당 부분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와 나의 배우자가 '결혼'이란 것에 대해 선입관 혹은 기대를 별로 갖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사실 배우자의 선입관 혹은 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와 잘 지낼 수 있었으므로 비슷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아이가 나에게 가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꽤 자란 지금까지도 아이는 나에게 책임과 부담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6장의 제목은 '어머니' 이다.
5장 마지막에서 보부아르는
여자는 아내로서는 완전한 개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로서는 완전한 개인이 된다. 아이는 여자의 기쁨이자 존재의 정당화다. 여자는 아이를 통해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자기실현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여성 발전의 이 최고 단계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라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가 되면서 더 종속되었다고 느끼는데 완전한 개인이라니, 나의 자기 실현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는데 자기 실현의 완성이라니... 발전의 최고단계라니..
6장을 읽어봐야겠지만, 한편으로 읽고 싶지 않기도 하다.
결혼의 비극은 약속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 행복에 관해서는 보장이란 것이 없다 - 여자를 불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결혼은 여자를 반복과 매너리즘에 빠뜨려 버린다.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장 고약한 것은 여자의 헌신이 성가신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남편의 눈에는 아내의 헌신이 압제로 바뀌어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헌신의 태도를 최고의 유일한 정당성으로서 아내에게 강요한 것은 남편이다.
결혼은 자율적인 두 존재의 공유여야지, 은둔이나 병합이나 도피나 구제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결혼이 여자에게 하나의 ‘직업‘ 이 되는 것을 지양하면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이 여자의 자립을 금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그토록 무거운 짐이 된다. 여자를 해방함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에게 이 세계에서 할 일을 부여함으로써 남자는 해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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