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엄마와 인도 여행이라니! - 세 여자의 ‘코믹액숀’ 인도 방랑기
윤선영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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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인도 곳곳을 밟고 온 기분이다. 더운 날씨, 땀 냄새, 상상할 수 없는 기차역의 혼잡함, 어디든 사람이 넘쳐나고, 지저분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유의 분위기가 뿜어 나오는 인도. 가보지 못한 나라, 호불호가 갈리는 나라, 겪어보지 못한 불편함을 감수하기 힘든 나라라는 편견들이 무색할 정도로 재미있게 읽어버렸다.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호흡에 읽어버려서 인도를 며칠 만에 다녀 온 기분까지 든다. 엄마와 까칠한 이모와 함께 한 여행. 말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데 역시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걱정은 두려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여행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여행하느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만약 혼자 엄마와 이모와 함께 여행을 하라고 했다면 도망쳤을 것 같다. 성격 탓이기도 하고, 고생길이 훤해 지레 겁을 먹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해보지도 않고 겁을 먹는 나와는 달리 엄마, 이모와 함께 여행을 한 저자가 대단해 보였다. 오로지 좋은 것을 엄마와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여행을 청했는데, 엄마가 망설임 없이 정한 곳은 인도였다. 류시화 시인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도 시인의 에세이를 읽어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책으로 만나고, 상상했던 곳을 직접 보는 일. 분명 설렐 것 같다. 그런 설렘을 책임진다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저자는 엄마, 이모와 함께 일단 부딪혔다.


참 멋지다. 딸, 니는 좋았겠다. 이런 데서 두 달을 보내서. 148쪽

도망치듯 인도로 여행 왔던 과거와는 달리 엄마, 이모와 함께 온 인도는 분명 달랐을 것 같다. 갠지스강을 보며 엄마가 했던 말, 엄마와 여행오기 8년 전에 여행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위로를 받았다는 저자. 그래서인지 유명한 관광지보다 오히려 너무 할 일이 없어 갠지스강만 쳐다보았던 바라나시의 여행이 내게도 인상적이었다. 여행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풍경을 바라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이 있는 여행도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여행이 자연스러웠다.

여행의 묘미는 변수라고 하지만 저자와 엄마, 이모가 겪은 여행을 보면 지나고 났으니 하는 말이지, 나보고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데 몸이 아픈 와중에도 14시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살벌한 현지인의 협박, 멱살잡이를 하는 싸움까지 그야말로 스펙터클 한데 그 모든 걸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여행이 더 흥미로운 게 아닌가 싶다. 인내심을 요하는 일도 많고, 몸이 따라주지 않거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도 천천히 순응해 가는 것. 인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여유와 그곳에 녹아드는 방법을 배운 게 여행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모와 달리 인도 여행을 마치고 다른 여행을 해야 해서 공항에서 헤어질 때의 그 착찹함. 그 여운이 나에게도 전해져 마음이 찌르르 했는데, 다음 여행에 까칠한 이모가 거의 협박에 가깝게 데려가라는 전화와 엄마도 함께 가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야기를 보며 뭔가 서늘해졌다.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면서도 엄마와 이모가 또 어떤 예측불허의 상황을 만들어낼지 긴장된다고나 할까? 발랄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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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1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돌아와서 이모와 엄마가 다시 같이 가자고 하는 내용 생각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안녕반짝님, 좋은하루보내세요.^^

안녕반짝 2018-03-13 14:52   좋아요 1 | URL
다음 이야기가 분명 나올 것 같아요.
필리핀 간 이야기^^
저만 재밌게 읽은 게 아니라고 하니 좋네요^^
고맙습니다^^
 
새로운 가족
전이수 지음 / 엘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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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이 책의 존재를 몰랐겠지만 제대로 시청하지 못했고 입소문만 들은 터라 읽는 내내 또 다른 편견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아이가 정말 이 책을 썼단 말이야?’, ‘이 그림도 직접 그렸다고?’ 같은 편견에 갇혀 책 내용을 왜곡하지 않으려 애썼다. 담담히 읽어나갔지만 읽고 난 뒤에는 책을 요리조리 뒤적거리기도 하고 서지정보도 찾아보면서 창작자이자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아이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졌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하면서도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올 때가 허다하다. 심지어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는 과연 다름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새로운 가족』에서는 한 코끼리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름을 어떻게 인정하고 가족의 사랑을 알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음에서 마음이 아팠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가족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마음 찡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가족의 무리에 들어온 다리를 저는 아기 코끼리 때문에 ‘나’는 짜증이 늘어만 갔다. 자꾸 방해만 하고 참아야 하는 현실에 불평을 해보지만 엄마는 ‘모든 코끼리는 다 다르다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서로 돕고 아껴주며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란 대답만 들려올 뿐이다.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자 ‘나’는 너무 속상에서 가족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길을 잃고 만다. 사람들에게 잡혀 등에 짐을 싣고, 우리에 갇히고 나서야 동생 코끼리를 이해하게 된다. ‘나처럼 슬펐겠구나, 나처럼 힘들었겠구나.’하고 말이다. ‘나’는 간절히 가족을 원하지만 우리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사마귀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게 된 ‘나’는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과 엄마가 해준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창작물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좀 틀리더라도 아이의 글씨가 그대로 실려 있어서인지 이야기 하나하나가 더 마음에 콕 박힌 것 같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모두 다르게 생기고, 다른 색과 표정을 지닌 코끼리들을 보면서 다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시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코끼리들의 눈에 눈물이 맺힐 때마다 나도 슬퍼지고, 짜증나는 상황을 볼 때면 나 또한 짜증이 나고 공감이 되는 상황들이 어쩜 이렇게 생생할까 싶었다. 이 책을 쓴 이가 아이이기 때문에 대단하다, 굉장하다는 감탄보다 경험과 상상을 이렇게 맘껏 표현할 수 있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창작물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맞물렸다. 내가 빤히 알고 있는 시선이 다른 이의 시선으로 다르게 드러나는 것. 그 안에서 또 다른 지혜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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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순례 : 바닷마을 다이어리 8 바닷마을 다이어리 8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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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했음에도 며칠을 들췄다 덮었다 반복했다. 읽히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아껴 읽고 싶어서였다. 작년 여름에 출간된 책을 이제야 읽으면서 이러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일 년에 한 권씩 출간되기에 느긋하게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역시나 ‘좋다’를 남발했고 올 여름까지 어찌 기다리나 싶었다. 만화를 많이 알고 있진 않지만 1권을 읽으면서 단박에 좋아졌고, 유일하게 모으고 있고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마음이 따뜻해진다.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난 책에서 언급한 셋째 치카의 임신을 어떻게 풀어낼지 가장 궁금했다. 임신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스즈를 제외하고는 치카는 부담을 주기 싫어 모두에게 임신 사실을 숨겼다. 아이의 아빠가 될 하마다 씨에게도 비밀에 부쳤고, 그는 오랜 마음의 짐을 벗고 새롭게 에베레스트 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치카는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무리하게 신사에 들러 기도를 하다 급기야 쓰러지고 만다. 임신 사실이 가족은 물론 하마다 씨에게도 알려지게 된 상황에서 사치는 치카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만 넌 스즈한테 상처를 줬어. 거짓말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운 거야. 하마다 씨한테도. 넌 그 사람의 산악인으로서의 자긍심에 상처를 줄 뻔 했어. 83~84쪽

스즈의 부담감과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하마다 씨에 대한 모든 심경을 냉철하게 읽어내는 사치를 보며 역시 첫째 언니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들이 결국엔 안정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곧 첫 손주가 생기는 친엄마의 부족한 성의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긴 했지만 네 자매가 지금껏 잘해 왔던 것처럼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스즈가 다니게 될 학교도 역시나 안심이 되었고, 비록 몸을 떨어져 있을지라도 언니들과 후타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걱정이 되진 않았다. 각자 나름대로의 로맨스(?)가 무르익은 가운데 다음 이야기에도 그들의 삶의 방향이 필요한 방향으로 흐를 거란 예감이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고민이 되는 일이 있어도 가족과 이웃 간의 끈끈함이 그 모든 걸 유순하게 해결해 줄 거란 좀 허황된 믿음이 이 만화의 매력이다. 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듯이 만화 속의 인물들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거란 믿음이 언제든 반갑게 맞이하게 되는 이유다. 그나저나 이모할머니가 임신한 치카에게 으깬 토마토와 간 사과를 섞어서 만들어 준 ‘토마토 으깨미’가 너무 간단해서 해 먹고 싶어진다. 예전에는 멸치 토스트(이건 내가 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아니지만)가 그렇게 궁금하더니, 종종 언급되는 음식들에 관심이 가는 걸 보면 이 만화의 자잘한 매력도 역시나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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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3-1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하는 시리즈라 반갑네요-. 소장해두고 종종 들춰보곤 하지요- 최소 세 번씩은 읽은 듯 해요^^

안녕반짝 2018-03-13 14:52   좋아요 0 | URL
이 만화는 한번 읽으면 팬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대부분 소장하면서 계속 들춰보는 것 같더라고요.
올해 9권을 기다립니다.^^
 
고약한 결점
안느-가엘 발프 지음, 크실 그림, 이성엽 옮김 / 파랑새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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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결점 투성이다. 20대 까지는 외모에 대한 결점이 더 크다 생각했고, 30대에 접어들어서는 내면의 결점이 더 많았다. 단단하지 못한 내면, 쉽게 무너지는 자존감, 자꾸 초라해지는 내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게 싫었다. 출산을 하고 난 뒤에는 더 심했다. 육아에 지쳐 겉과 속을 꾸미고 들여다보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내 시간을 조금씩 갖게 되면서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방치해뒀던 나를 찾은 기분이었고, 더 이상 주눅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결점은 여러 종류가 있단다. 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점도 있고,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거나 잘 읽지 못하게 하는 결점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결점들이 큰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전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어.”

태어날 때부터 작은 결점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커감에 따라 점점 커지는 결점이 자신을 방해해서 애를 먹는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 결국 의사 선생님까지 찾아갔다. 뾰족한 수가 없던 어느 날 아이는 특별한 의사 선생님을 만난다. 역시나 자신처럼 결점이 있는 선생님이었고, 아이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작은 결점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아이에게는 꼬불꼬불한 실이 항상 몸에 머물렀다. 가슴에 있던 결점이 커가면서 얼굴에 드러나자 단순하게도 점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래서 결점이 아이의 발목을 잡고,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귀까지 막을 때에도 구체적인 결점에 대한 정체만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혼자 있을 때는 결점이 얌전해진다는 글과 그림을 보고 그것이 눈으로 드러나는 어떤 형태가 아님을, 내면에서 생겨나는 콤플렉스 같은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 자신이 결점인가?’라는 의문까지 갖게 되는 아이는 결점을 없애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특별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야 변화되기 시작한다. 여전히 결점은 아이를 방해하고 괴롭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자, 결점들이 작아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스스로 강해졌다 믿는 아이를 보며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정말 운이 좋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작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신경 쓰지 않게 되자 바로 변화가 시작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이는 다른 사람들도 ‘내 결점이 아닌 나를 본’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한껏 행복해졌다.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 채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표현되고, 형형색색으로 묘사된 결점만 보고 있어도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 존재하면서 때때로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결점들이 어쩌면 정말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너무 움츠리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의 나를 곰곰 되짚어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치중한 결점들이 많이 드러났음을 알게 되었다. 외부의 영향에 쉽게 무너지는 자존감을 보며 내 스스로 좀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달라고 하면서 정작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했으니 충족될 리가 없었다. 따뜻한 그림책 한 권으로 오늘 하루가 훨씬 풍성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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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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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잊혔다. 그들의 영혼이 봉안된 명단도 없다. 그들에게 이 작은 책을 바친다. 42쪽

 

슬프게도 정말 그렇다. 도리고 에번스가 ‘가이 헨드릭스의 전쟁포로수용소 삽화책에 들어갈 머리말을 이렇게 끝맺’은 것처럼 이 책을 덮는 순간 모든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증발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전쟁이 내게도 달라붙어 현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여전히 타이-미얀마 간 철도 건설 현장 속인 것 같고, 그 안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폭력과 굶주림과 죽음과 질병이 끈덕지게 날 따라온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조차 힘듦에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것뿐이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에요.’란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전쟁 속의 철도 건설 현장은 모두의 삶을 부셔 버린 듯했다. 분명 그들이 그 안에 갇히기 전의 삶과 벗어난 삶이 있는데도 전쟁 속의 기억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더 깊은 정글로 들어가 공사를 진행할수록, 사람들에게 잊힐수록, 인간이라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잔인해질수록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싶었다. 일본 천황에게 바친다는 명목 하에 이뤄지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기이하게도 싸우고 비난하고, 증오할지라도 서로가 살아 있는 순간이 가장 평화로웠다. 종종 읊어대는 시구(詩句)가 현실이 되고, 하나씩 목숨을 잃어갈 때마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데 동료가 지겹도록 뱉어내던 말이 뇌리에 박혀 결국 유언이 될 때 그 세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이 전쟁포로로 잡혀 있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인데도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순간들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지독한 포로생활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다키 가디너가 그렇게 얘기했던 ‘니키타리스 생선식당’에 가서 물고기들을 풀어줄 거란 말을 그의 동료들이 실행했을 때만 해도 무덤덤했다. 그러다 식당 주인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고 사과하고 변상하려 했을 때, 식당 주인이 덜덜 떨린 손으로 돈을 꺼내려는 손을 막아서고 다키 가디너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메뉴를 대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그의 죽음이 실감났고 전쟁은 끝이 났지만 기억은 결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로 성공했지만 자주 불륜을 저지르며 진부한 삶을 살아가는 도리고가 왜 그러는지 의아했다. 사랑해선 안 될 여자 에이미를 사랑하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전쟁터로 가야 했던 그의 마음이 처량하면서도 답답했다. 에이미의 들쭉날쭉한 불안한 마음도, 서로 죽었다고 알릴 수밖에 없는 내정된 배우자들의 거짓이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난 전쟁터에서 자행되는 잔인함을 낱낱이 목도하고 나자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의 삶에 가타부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증언은 할 수 있어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예고없이 끼어든 전쟁의 참혹함이 많은 것을 삼켜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삶까지 갉아먹었던 죽음의 철도 공사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다양한 위치에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삶도 이어졌다. 쉽지 않은 경험을 지닌 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생을 마감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것처럼 결코 진부하고 자극적인 시선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도리고와 에이미의 극적인 만남도, 전쟁 전범들을 억지로 심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과 기억을 촘촘히 엮어가며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이더라도 ‘이게 진짜 삶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담담하게 그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인간의 깊은 심연을 헤집고 다녔다. 아름답고 생생한 문장 앞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숨이 막히는가 하면, 나의 속내를 들킨 듯한 묘사 앞에 위로와 참회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 순간 먹먹했다. 고난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도 방향을 잃지 않고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저자의 참담한 의무를 알아차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죽음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지. 도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 또한 동정의 뒤틀린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곧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뜻했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296쪽

 

전쟁의 기억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지만 삶이 흘러가는 대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결국엔 그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마다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그것이 끝이었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본 나에게는 끝이 아님을, 고뇌의 시작과 동시에 그것 또한 삶의 다른 형태임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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