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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 식스 센스가 연상 되는 소설이였다.

식견을 넓히지 못해 작은 예시들로 이 두 작품을 연상해 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읽어버린 탓인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보다. 그러나 400페이지를 순식간에 읽게 만드는 마력은 분명 있었다.

책의 제목과 겉모습과는 달리 그리고 줄리에트와 샘의 만남에서는 전혀 이런 결론과 과정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런 반전과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가 있었기에 그리고 글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도 한 몫해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그러나 저자가 바란 대로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큰 행복에 휩싸이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책과 영화가 바로 연상이 될 만큼 어느정도 결과가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미세한 헛점에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에트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왜 이어지지 않았을까...

최소한 가족에게 생존해 있고 어떻게 된 연유인지 뒷 이야기로나마(알고 있겠지만..) 나타났어야 할텐데.. 그리고 조디의 구출과정과 조금은 허무하게 사라진 마약상인들의 모습이 아쉬웠다.(정말 자질구레한한 것들인가...) 그러나 이렇게 옆길로 한정 없이 새면 안된다. 나의 말처럼 미세한 것들을 들추고 있다가는 본질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레이스가 왜 샘과 줄리에트의 사이에서 방황하는지 그리고 줄리에트를 왜 하늘나라로 데려가야 하는지 조금은 쌩뚱맞았다.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가 자꾸 걸리는 듯한 느낌.

그레이스가 그랬다.

그래서 초반에 샘과 줄리에트의 사랑만으로 꾸려질거라는 상상을 뒤집어 주었지만 끝을 보기 전까지(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레이스가 낯설었다. 10년전에 죽은 전직 형사였기에 자꾸 과거를 들출 수 밖에 없었고 샘도 아내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얘기 하자면 과거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영혼이였고 샘은 그런 그레이스를 죽인 사람이였다. 둘다 그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만남이 낯설고 엉뚱해 보였던 것이다.

샘은 죽은 아내 페데리카를 구하기 위해 마약 상인을 찾아갔고 그 마약상인을 검거하기 위해 그레이스는 변장을 해서 그 소굴로 들어간 것인데 샘은 마약상인을 죽여야 겠다고 판단한 순간 총을 발사했고 마약상인은 방패막이로 변장한 그레이스를 죽게 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죽었기에 자신의 죽음이 기억나지 않았고 샘의 행도에 대한 뒷처리를 친구 셰이크가 했기에 누구를 죽인지조차 모른 상태였다.

 

과거의 상처에 치유되지 못한채 희망 없이 살아가는 샘에게 줄리에트와의 만남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줄리에트를 그레이스가 데려가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줄리에트까지 잃어 버리면 더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빈민가에서의 힘들었던 유년시절. 그 과거를 뚫고 의사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페데리카는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 죄책감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죽인 형사가 가까스로 찾은 희망 줄리에트를 데려가려 한다니. 운며은 샘 앞에서 절대 호락 호락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도 자신이 줄리에트를 데려가야 한다는 신념은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기까지 왜 줄리에트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레이스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줄리에트가 아니였다. 그레이스를 사랑하고 있던 동료 형사 루텔리가 그레이스를 따라 갔다. 루텔리가 죽자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린 그레이스의 딸 조디를 자연스레 샘이 도와준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 꾸며 프랑스에서 건너온 줄리에트는 프랑스로 떠나기 며칠 전에 만난 샘과 그렇게 뉴욕에서 살아갈 것이다.

 

과연 사랑에 운명이 있을 것인가.

지금의 진실한 사랑은 만나기까지 과정을 단순히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흘러가는 책을 읽으며 그런 구성에 덤덤하면서도 늘 익숙한 그런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주고 있었다.

단숨에 읽어 버리는 마력이 숨겨 있는 책이였지만 함께 하게 된 샘과 줄리에트의 삶을 온전히 축복해 줄 수 많은 없었다.

거대한 도시 뉴욕이 안고 있는 삶의 본질하며 더 넓게 세계를 돌아 보고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단순히 그 둘의 행복만으로 귀결될 수는 없었다.

삶의 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역경과 상처, 사랑, 죽음등 그것들을 내 자신이 뚫고 가지 않는 한 스스로 바뀌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만남은 분명 존재감을 덧 입혀 줄 것이다.

그런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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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 삶을 재발견하는 최고의 법칙
척 마틴 지음, 김명신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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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부터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관심이란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만 쏟아붓기 마련이고 그것 중에서도 편파적인 관심이 주류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러한 과심을 거둬 들일때는 순식간이였다.

지대하고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게 무엇이던가. 장시간 생각해 보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 한가지 사실 만으로도 이 책이 내게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기 계발서를 몇권 읽어 본 사람이라면 '관심' 이라는 책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책들과 너무 비슷해서 진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이런류의 책을 읽어 오면서 나름대로 면역이 되어 있기에 늘 이런책을 읽고 느꼈던 마음을 지키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말하는 믿음과 행하는 믿음이 다르듯이 나는 늘 지체하고 있는 행함이 안타까워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정말 실천해 보자고 간곡히 말하고 싶어진다.

이 책에서는 늘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위주로 멈춰서 생각하고 진단하고 변화하고 전달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로지 그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랴.

그다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는 나에게도 충분히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분명 나는 내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 했었다. 사무실에서의 업무가 그리 빡빡한 편이 아니였고 개인적인 시간도 여유가 있어서 일을 하는지 마는지 그런 상실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단계 멈춤에서 생각해 보니 이런 비효율성이 바로 드러났다. 사무실에서도 비효율적이였고 집에 돌아와서도 비효율적이였다.

 

집에 돌아오면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바로 책을 펼쳐든다. 책에 대한 욕망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 보니 늘 책 읽을 시간과 리뷰 쓸 시간이 부족했다.( 일과의 비유보다 나의 책에 대한 열정의 비유가 이 책하고 더 잘 들어 맞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의 생활과 나의 독서 습관에 대해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무실에서의 나는 좀 더 일에 열정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오늘 꼭 처리해야 할 일과 내가 해야할 일을 명확히 구분해 내고 대충이 아닌 성의껏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난 후의 시간을 온라인 개인 홈피 관리나 짬짬히 하는 독서와 리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집에서는 나의 개인적 욕망를 채우기 위해 무조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도와야 할 집안일은 무엇이며 꼭 읽어야 할 책이나 써야 할 리뷰를 따져보는 게획성이 필요했다.

이런식으로 정리해 나가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투정도 식구들과 집안일에 무관심하다는 무거운 마음도 사무실에서 나의 일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상실감도 어느 정도 사라지리라 생각된다. 그 계획들을 추구해 나가며서 마지막 단게 전달하기가 내게 어떤 식으로 응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사무실에서와 집에서 달라진 나의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조금 편해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애정은 쉽게 전위 될 것이다. 그렇다고 독서와 리뷰를 소홀히 할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업무 과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었을때 또는 효율성 있게 움직이도록 배려해 주었을때 어떠한 반응이 나타났던가. 능률이 더 올라갔다.

나의 소망은 하루 종일 책만 보는 날을 갖어 보는 것이지만 퇴근후에 집에 와서 잠들때까지 독서를 해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아 독서가 잘 안될때가 허다하다.

계획을 세워도 기분에 따라 이책 저책 보기가 일쑤이고 쌓인 책들에 대한 푸념도 나온다. 그런 시간들을 집안일을 돕거나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은 후에 하는 독서는 어떨까?

상상만 해도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가벼워서 즐겁게 독서할 것이고 리뷰도 밀리지 않게 할 것이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 지다보면 오로지 책만 아닌 다른 것에도 관심을 쏟아 고립감이 들지 않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의 변화된 모습을 만들어 가면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바이러스처럼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침투한다면 좀 더 밝고 즐거운 삶이 되지 않을까?

나의 문제점과 변화의 과정, 그리고 결과를 유추해 보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벅찬데 실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흔히 읽어와서 분명 진부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얘기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나의 현실은 이렇듯 호락 호락 하지 않다고 푸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시도해 본적이 있는가.

줄줄이 읽어나가는 책 속의 인물들처럼 노력하고 생각하고 난관을 부딪혀 가며 목표를 잊지 않으려 한 적이 있는가.

드물 것이다.

나조차도 뒷통수를 강타할 충격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도 실천하기 보다 변화하기 보다 포기하는게 더 빠르고 안주하는게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이런 결과를 보면서도 이러한 책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을 나누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부터 진지하게 그런 나눔에 동참해 보려 한다.

약을 때로 약아 버린 나이지만 포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아는 나이지만 이제는 나도 변화해 보려 한다.

말하는 믿음이 아닌 행하는 열정을 갖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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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임정진 글, 원유미 외 그림 / 깊은책속옹달샘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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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는 순간 너무나 예쁜 포장과 탐나는 다이어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먼저 읽고 조카를 읽히게 한 후 다이어리는 내가 가질 심산이였다. (욕심많은 이모..) 그러나 책을 읽고 나니 내가 가져야 겠다라는 욕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바로 조카에게 다이어리를 주고 열심히 용도까지 설명해 주었다.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느끼고 계획을 세우고 좀 더 많은 가능성을 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 것인데 이 많은 소망에 비해 다이어리는 심히 소박했지만 책은 꼭 읽히게 하고 싶었다.

책 머리에 글까지 써서 통째로 주어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조카에세 무얼 바라는 마음도 없어지고 나도 알 수 없는 뿌듯함만이 남았다.

 

우선은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조카에게 책을 주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 동생들에게도 읽히게 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조건에도 군말없이 냉큼 집어 갔다. 내 독후감 쓰기 편하자고 조카에게 독후감을 쓰게 한 것인데 역시 이 방법은 좋지 않았다. 차리라 물음으로 궁금한 건 없었느냐 무얼 느꼈느냐라고 물었다면 나았을 텐데 초등학교 4학년이라면 어느정도 학교 숙제에 길들여진 상태라 숙제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독후감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단락 끝에 정리된 애니메이션을 중점으로 쓴게 아닌가.

당장 불러서 이모가 원하는 건 이런게 아니다 만화가 중점이 아니라 제니퍼와 아빠의 대화를 중심으로 형식 따지지 말고 편하게 쓰라고 했더니 바로 '간다하게 써도 되지?' 라는 질문과 함께 축소된 숙제 형식의 독후감이 날라왔다. ㅡ.ㅡ;;

형식없이 라는 말은 말은 초등학생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이였나 보다. 나와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다니....

책속의 제니퍼와 아빠의 대화, 그리고 인내가 조금은 가볍다라는걸 조카의 반응을 통해 바로 느껴버렸고 현실과 책과의 일치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뒷따라는 것인지 예상이 팍팍 되는 계기였다.

간단하게 던지면 제니퍼의 반응들이 나올줄 알았는데 역시 되돌아 오는 건 기브 앤 테이크가 강하게 내제된 전달이였다.(벌써 나의 조카가 이런 생리를 알아 버렸단 말인가. 아니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조카는 나의 뜻을 정확히 전달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조카는 제니퍼의 행동을 보면서 반성을 하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제니퍼의 변화된 모습을 닮아가겠노라며.

책을 읽고 바로 변화가 되겠나만은 우선 다이어리 검사를 해보았다. 오늘의 할일 목표를 정해놓고 착실히 이행시켜 가고 있었다.(빈공간의 해괴한 그림들이 조금은 거슬렸지만...)

세상물을 많이 먹어버린 나의 시각으로 조카의 독후감을 봤을때 오히려 내가 조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바로 바라는 나의 조급증이 어쩜 그런 순수성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카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천천히 질문할 것이고 가끔 다이어리를 살펴 볼 생각이다. 어쩜 조카가 나보다 더 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책을 읽을때 재미나게 읽었고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나도 어렸을때 이런 책을 만났다면 좀 더 계획적으로 미래를 꾸릴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중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더 짙게 올라 왔기에 제니퍼처럼 조력자가 없더라도 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정말 가슴 뻐근할 정도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자신감이 가득 찼었다.

그러나 조카에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수 있는 이틀 동안의 시간동안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책의 내용과 나의 다짐들은 지난밤 꿈처럼 아득했고 조카에게 대리 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조카를 통해 다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나니 무척 부끄러웠다. 바로 나를 변질시켜 버리면서 조카에게는 이것은 잘못 되었다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니퍼의 아빠처럼 자상함과 인내심과 현명함이 부족한 이모였고 제니퍼 보다는 좀 더 속이 깊은 조카였기에 빠른 결과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단숨에 읽었기에 제니퍼의 변화가 빠르게 느껴졌을지라도 쉬움은 아니였다.

깨달음, 인내, 노력이 있었을때 비로소 조금씩 조력자의 효과가 나타났다. 조급함, 무관심, 결과만을 바라고 행했기에 조카의 반응이 그랫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통찰력을 갖고 실천의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과 그리고 조카와 타인과 함께 말이다.

그러했을때 그 시작의 물꼬가 큰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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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한승원 외 지음 / 예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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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저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두통이 밀려온다.

최근 들어 잦은 두통이 신경 씌인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일까. 책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아야 겠다라고 다짐했으나 그 다짐은 내 방문을 여는 순간 허물어진다.

나의 읽힘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책들. 그 다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는 책을 펼쳐 든다.

오늘은 '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차례다.

 

무척이나 아꼈던 책이다.

차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에세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사람을 듬뿍 받았다. 더군다나 어디선가 익숙한 '와온'이라는 단어가 나를 이끌었는데 알고 보니 좀 떨어져 있긴 해도 나의 고향시에 포함되어 있는 면소재지의 바다 이름이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큼지막한 글씨로 써 있는 버스를 본 기억이 있던 와온. 그렇게 덧붙여진 사실 하나가 책을 더 아끼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창문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는 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두통이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의 책 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녹차를 우려 놓고(숯가마에서 구운 다기와 나름 대로 맛 좋은 녹차가 있었기에.)읽고 싶었으나 책을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차를 마시는 효과를 맛보아 버렸다.

차 향이 그윽했고 입안에 그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지고 차를 마시고 난 후의 개운함이 어느새 안착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차를 마시고 난 후의 느낌인데.

빗소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 온 몸을 감싸고 도는 개운함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벌렁 누웠다.

너무나 편안했기에 스르르 잠이 밀려 왔다. 눈을 떠보니 30분 정도 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을 이루면서 녹차의 그윽함을 분명 맡은 것 같았다. 꿈에서든, 책에서든, 나의 상상에서든.

 

한비야씨는 '중국견문록'에서 그런말을 했었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원서로 읽는 책보다 한글로 된 책을 만날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단박에 속도부터 차이가 나고 뻥 뚫리는 느낌이라 했다.

원서로 읽어 본 경험은 없지만 번역본과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에서의 차이는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다.

이렇게 핵심을 겉도는 이유는 이 책에 실린 11명의 문장가들의 언어가 너무나 단하 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비야씨가 중국에서 어학 연수를 할 당시 친구를 통해 받아 본 한글로 된 우리책을 읽을때의 느낌이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본다.

어찌보면 차 라는 주제 안에서 어느 정도 압박감을 느끼며 펼쳐놓은 글임에도 그들은 자유분방 했다.

자신의 직업이나 인생이나 여유나 추억을 꺼내서 차와의 만남을 연결해야 함에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다양했다.

그 경혐은 때론 청아하고 단아하고 씁쓰레 하면서도 정갈있는 여러 가지의 차 맛처럼 편안했다.

단지 그들의 언어 속에서 차를 받아들였을 뿐인데 우리의 말이 이처럼 맛깔스러울 수 있었던가. 이처럼 아늑함이 들었던가. 또한 이토록 맑고 다정 다감할 수 있었던가.

수없이 되뇌어 보아도 책에 대한 나의 취함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차를 가까이 하면 그리 되는 것인가. 그들의 글 속에 삶 속에 푹 빠지면서도 억지로 차를 끓일 필요를 못 느꼈다.

 

한잔의 차를 통해 철학을 넘나들고 영화를 넘나들고 생활을 넘나드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함에도 차를 마시는 그들에게는 차의 그윽한 향이 느껴졌다.

차에 대한 남다른 애정, 감출 것 없는 자신의 전부를 털어 놓음에도 소박함이 방대함으로 바뀌지 않는 절제가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정갈하고 담백한 수필들이였다.

차를 통한 여유와 삶의 향기가 편안히 밀려오는 우리의 정서에 딱 맞는 글들이였다. 그런 글들로 인해 내 몸과 마음은 맑아졌고 차에 대한 애정이 더 진하게 솟아났다.

 

찻잔의 소박함에 멋들어지는 수묵화들. 그리고 시들.

차를 마시는데 이것 말고 정말 무엇이 더 필요하랴.

나를 느끼고 너를 느끼고 존재감을 구분 짓지 않음에 차 한잔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랴.

책을 덮고 나서도 그윽한 그 향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입안에 머금은 한 모금의 따스한 차 향은 그대로 온몸으로 퍼져 내 안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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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 그림 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2
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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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때 부터 그림은 젬병이였다.

지금도 사람을 그려 보라 하면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 내고 조카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림은 내게 이상적이였다. 다행히 열등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림을 좋아 하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에 대해서 아는건 없고 우연히 고흐를 좋아하게 되면서 서서히 그림에 대해 친밀감을 갖게 되었고 미술관도 좋아하게 되었고 일반 책들보다 조금 비싼 미술책들도 구입해서 보게 되었다.( 그림을 좋아하기 전에는 그림책을 사서 보는게 이해가 안갔다.)

화가에 대해서나 그림을 통한 해석 뭐 이런것들은 지금도 여전히 문외한이여서 '누구의 그림이구나' 라든가 그냥 '좋다' 이런 정도의 수준이지만 여전히 그림 감상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고 존재감을 끌어다 주는 요소이다.

예전부터 알아오던 고흐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림은 영영 내게 그렇고 그렇게 남아 있었을 텐데. 참 신기하며서도 아이러니하다.

 

각설하고,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같은 네델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나온다. 어디선가 '빛의 화가' 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렘브란트의 그림을 기억하거나 관심을 둔적은 없었다.

그러나 늘 다른 화가들에 대한 호기심은 팽배하기에 이번엔 렘브란트를 골라봤다.

 

어디선가 주어들은 빛의 화가라는 말에 걸맞게 겉표지의 그림은 빛이 난다. 빛이 비추는 것인지 황금 스스로가 빛을 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이지만 따스한 빛 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림속 주인공은 놀라고 있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씌여진 글자가 아마 그런 원인인 듯 하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성서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 왕이다.

그는 왜 저렇게 놀라고 있는 것일까.

렘브란트의 첫 이야기는 벨사살 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선왕이 닦아놓은 나라를 이끌어 가기는 커녕 놀고 먹고 마시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왕이였다. 그런 왕의 횡포는 심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날 엄청나게 큰 궁중연회가 벌여진다. 또 놀자판인 것이다. 벨사살 왕은 술에 취해 선왕때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온 성배에다 술을 마신다. 그리고 연회가 절정에 무르익었을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 나와 벨사살 왕이 앉은 뒤쪽 벽에 낯선 글씨가 새겨진다. 연회장은 혼란의 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언어는 낯선 언어였다. 그 누구도 그 글시를 해석할 수 없었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그는 바로 다니엘이였다.

그 글이 해석된 저녁 벨사살 왕은 침소에서 살해 당한다.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고 마감하셨다. 그리고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그리하여 왕의 나라를 이웃나라에 갈라 주신다.'

 

즉, 벨사살 왕은 이젠 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우리는 자칫 커다란 의문을 지나치기가 쉽다.

수천년 전의 일, 게다가 성서에 글로만 존재하는 벨사살 왕의 연회를 어떻게 그렸으며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는가이다.

그림 솜씨도 솜씨지만 렘브란트는 상상력이 뛰어난 화가였다.

그리고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연구하고 모델들로 하여금 그 연회처럼 하도록 자기의 화실에서 한편의 연극을 하도록 하였으니 이토록 사실적일 수 밖에.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모두다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베껴오는 그림조차 원작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니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재능이 있는 화가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이였다.

그림 속의 인물이나 사물들은 움직임의 한 조각을 떼어온듯 서로 어울려져 있고 따뜻한 느낌조차 든다. 물감을 두텁게 쓰는 그의 화풍의 영향도 있고 책 속에서의 그림들이라는 실재감이 떨어지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의 그림들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또 그의 그림에는 빛도 있다.

겉표지 <벨사살 왕의 연회>처럼 빛인지 금빛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의 따뜻한 빛은 렘브란트의 그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빛은 빛이 비추는 곳을 돋보여 줄뿐만 아니라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을 더 잘 보여주는 효과까지 안고 있다.

 

자신의 변해가는 자화상 속에서도 그는 비처럼 따스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의 노년은 그다지 평탄치 않았다. 화가가 되면서부터 경제적 어려움은 당해보지 않은 그였기에 무절제한 씀씀이로 어려운 노년을 보냈다.

다행히 그의 화가 인생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별로 없어 마음껏 재능을 펼쳤지만 경제적 부의 유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세명과 부인이 모두 일찍 죽고 두번째 부인격인 유모와 마지막 남은 아들도 렘브란트보다 모두 먼저 죽었으니 렘브란트는 몹시 외로웠을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겐 그림이라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었으니 그가 불행했노라고, 노년은 불후했다고 단정짓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렘브란트의 삶과 그의 그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렘브란트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내가 미술에 관심을 갖고 책을 사서 볼때 그 화가에 대해서 모든걸 알고 싶었다. 그런데 겉핧기만 하는 책이 많아서 실망한 책도 적지 않았는데 이 책 '내 손안의 미술관' 시리즈는 그런 책보다 훨씬 무게감이 있었지만 책의 두께와 시리지의 이미지상 렘브란트 외에도 다양함을 싣고 있다.

17세기의 네델란드의 배경이라든가 역사 등 렘브란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렘브란트에 올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노파심에서 던지는 염려리라.

그러나 렘브란트에 푹 빠져 있거나 관심이 있다면 입문서든 소장용이든 나름 괜찮다는걸 말해주고 싶다.

이 시리즈가 너무 괜찮아 고흐의 책이 세권임에도 또 고흐책을 사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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