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떠나올 때 우리가 원했던 것
정은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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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듣기에는 설레도 막상 해보면 대체로 고단한 것투성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짝이는 찰나를 위해 고단함도 감내하겠다는 각오를 여행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33쪽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준비부터 설렌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귀찮고 고단해서 쉽게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준비해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성향과 안 맞을 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정하자 더 이상 여행에 관한 글을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서를 마주할 때마다 나도 가고 싶어 질까봐, 현재의 나의 상황을 한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자 여행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고, 오히려 가보고 싶은 곳도 생겨났다. 틀에서 벗어나면 좀 더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경험한 셈이다.

여행자는 자신의 낯섦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일상과 맞교환한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여행 아닐까. 44쪽

그럼에도 종종 안전해서 평범한 나의 일상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일상과 맞교환’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혼자 여행하기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역시나 고단함을 이길 정도의 열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과 그림,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종종 유혹에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함보다는 소소함에서 오는 느낌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할 일이 빼곡하게 적힌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뭔가를 보고 남겨야 하는 여행과는 무관한 빈둥거림을 우리는 원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때론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여행의 느긋함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때론 ‘지금 여기에 없는 답이 여행이라고 있을 리가.’ 있겠냐는 팩트를 날리고 ‘이국의 낯섦을 보는 것도 좋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것 역시 훌륭한 여행이 될 있다. 잘 알고 있다 여기던 것들을 새삼스레 살펴보고 새로운 사유만 할 수 있다면’ 서 사람들이 국내 여행을 잘 하지 않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여행을 간접으로만 경험한 나에게도 제대로 날아드는 말들이 잠시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계 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 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들려주는 게 좋았다. 작가나 책이 되기도 했고, 유명 인물이나 그림이 되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과 얽힌 여행의 느낌들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게, 때론 잔잔하게 흘러가는 글이 책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먼 여행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산보 나가듯 가까운 것을 가족과 거닐고 싶은 마음은 늘 있다. 날씨, 피로, 건강 등 온갖 핑계를 대면서 집 밖을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꼭 특별하지 않아도 풍경을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임을 알았다. 장소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그저 매일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하는 이들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 같아서다. 이래저래 굉장히 깊은 감격을 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일상도 종종 이렇게 깊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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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03-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여기에 없는 답을 여행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냐는 팩트폭격, 완전 좋았음.ㅋ 나도 리뷰 써야지.

안녕반짝 2018-03-0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재밌게 읽으면서,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ㅋ
 
명암 -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보랏빛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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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된 구원 같은 책이 있다. 바로『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인데,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주 오랫동안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한눈팔기』밖에 읽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의 성격이 너무 짜증 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작품 해제와 같은 책을 만나게 되었고, 나의 배경지식의 부족함과 작가와 인물들의 이해도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새로운 시선으로『도련님』을 읽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놀랐다. 그때부터 저자의 작품을 전작하겠다고 마음먹고 조금씩 읽어나갔지만 이내 멈춰버렸다. 그럼에도 출간 순서대로 읽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 되어버린『명암』을 먼저 읽게 되었다. 두툼한 이 책을 지친 기색 없이 읽어 나갔던 것이 비단 저자에 대한 나의 시선의 변화만이 아님을 소설 초반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마음 속의 나쁜 마음과 선한 마음이 교차해서 올라온다. 나쁜 마음을 잘 억누른 날은 그럭저럭 하루를 잘 보낸 날이고 그렇지 못한 날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 허다하다. 그럼에도 나쁜 마음을 늘 억누르고 싶은 건, 내 안에 감춰진 어두운 본성을 들춰내고 싶지 않아서다. 나쁜 본성이 나와 버린다면 내 자신이 어디로 튈지 나도 잘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그런데 이런 양면성을 저자는『명암』이란 작품에서 가감 없이 드러낸다. 등장인물마다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는 착각이 일 정도로 각각의 성정과 성향, 그리고 상황에 따른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보통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묘사에 따라 선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단정 짓기 바빴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경계가 없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명암이 시시때때로 드러나 내 기준으로 인물을 평가하기보다 그저 섬세하게 드러난 내면에 감탄하느라 바빴다.

신혼인 쓰다가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짧은 시간에 모든 대화, 자잘한 일들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서인지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치 오래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 느껴졌던 것은 사소한 일들과 대화 가운데 모든 인물들의 심정을 헤아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저자 특유의 인물들 간에 얽힌 짜증스런 일들이 많았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나 인물과 인물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주인공 부부가 관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염려될 정도였다.

직장이 있고 결혼까지 했음에도 아버지에게 보조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쓰다는 결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하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다소 자존심과 약간의 허세도 있는 인물이다. 아내 오노부는 ‘누구든 상관없어. 자기가 이 사람이라고 믿어버린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자기를 변함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쓰다와 결혼했지만 점점 남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결혼 생활의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서로 마음을 숨기고 자존심을 세우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인물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게 유쾌할 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인물과의 에피소드는 늘 궁금증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마음이 변하는 모습도 그렇고, 거짓말과 상대방 마음 떠보기,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상식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 유도해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는 방식들이 때론 지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늘 인물들의 대화와 심정에 빠져들었고, 극적인 순간에 다른 인물로 이야기가 넘어가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새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앞의 이야기를 잊기 일쑤였다. 그만큼 저자는 인물의 균형을 잘 잡아 주었고, 섬세함과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심리 변화에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무려 102년 전의 작품인데 왜 이렇게 잘 읽히는 걸까?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결혼에 대해, 부부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동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시대나 가지고 있는 고민이 소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고만고만하고, 그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인간과 인간의 접점을 작품에서 잘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소홀히 읽을 수 없었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수많은 질문과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진지해졌다. 여전히 불투명한 것투성이지만 이런 고민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각자 나름대로의 기준과 방향으로 고민하고 결국엔 전진하고 있다는 다소 두루뭉술한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미완이라는 것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쓰다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신의 친구와 결혼한 기요코의 사연을 듣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쉽다. 이 작품을 쓰다 사망했기 때문에 결말은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래서인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작품은 영원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결말을 알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다가도, 언제든 내키는 대로 상상해 볼 수 있고 추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끝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독서의 매력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 앞에서는 되레 숙연해진다. 많은 생각을 하고 여지를 만들어 준 작품이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의 남은 작품을 만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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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 자연의 위대한 연결망에 대하여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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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좋아하지만 그냥 보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러다 <랩걸>을 읽고 나무에 대해 더 궁금해졌고, 나무가 품고 있는 생명력이 신비했습니다. <나무의 노래>가 그 궁금함을 충족해 줄 것 같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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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빵빠라빵 여행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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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변한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 30대가 되고 나서, 특히 임신을 경험하고 나면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땐 과일만 먹어서 특별한 건 없었는데 둘째 때는 임신기간 내내 입맛이 계속 바뀌었다. 입덧이 지나가자 소고기가 먹고 싶더니 회도 먹고 싶고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것들이 마구 당겼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빵이었다. 빵을 딱히 좋아한다고 할 수 없던 나였는데 임신기간 동안 엄청 먹어댔다. 초코케이크 한 조각 먹겠다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오는가 하면 입맛이 없어도 빵, 먹을 게 마땅히 없어도 빵만 찾았다. 출산을 하고 나면 예전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젠 빵이 좋아져 버렸고 지금도 케이크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떤 행위든 목적의식이 분명하다면 그 과정은 즐거우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빵 먹으러 북유럽 여행을 한다고 하면 배가 불렀다며(빵 먹으러 가는 여행이니 늘 배가 부를지도 ㅋ) 질투의 시선을 던졌을지도 모르는데 빵을 좋아하게 되니 오히려 목적이 뚜렷한 여행이라며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빵을 좋아하는 절친끼리 역시나 빵 이야기를 하다 핀란드와 덴마크 여행을 계획한다. 그리고 정말 그 나라의 빵을 먹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만화책에, 만화 같은 시작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지만 두 나라를 훑고 다니면서 맛보는 빵과 여행기를 보고 있자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그야말로 빵 투어를 외국으로 간 셈인데 빵 하나에 감격하고 빵을 먹을 수 있다는 행복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지 몰랐다. 그야말로 빵을 너무 좋아해서 간 여행이기에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고 빵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뭔가에 빠지면 저렇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들이 소개하고 먹는 빵을 보고 있자니 그간 내가 먹어온 빵은 극히 제한된, 일부분의 빵이라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 있었다. 새로운 맛에 도전하지 않는 편인 나는 빵집에 가도 늘 먹던 것만 먹는다. 아주 가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데 맛이 없으면 평소에 먹었던 빵을 먹지 않은 걸 후회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 속의 빵들은 너무 다양했고 그 종류만큼이나 빵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로운 빵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먼 나라까지 와서 빵만 먹다 갈 수 없으니 그 나라의 가고 싶었던 곳을 구경하기도 하는데 핀란드에서는 역시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빵 투어를 하면서 잠깐씩 드러나는 자연인데도 고요하고 경이로운 느낌이 들어 빵 때문에 핀란드까지 날아온 그들이 잠시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빵으로 해결해야 할 허기짐이 문제였기에 그런 풍경도 잠시 잠깐 지나가는 게 웃겼다.

핀란드와 덴마크의 빵 투어를 보면서 빵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것이 녹아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빵 재료만 보고도 그 나라의 문화와 식습관까지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밥은 기본으로 같다 치고 지역마다 다르게 깔리는 반찬이라고 해야 할까? 빵도 종류와 나라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음을, 그런 빵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만약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한다면 나의 목적은 무엇이 될까? 단박에 떠오르는 건 책이지만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할뿐더러 번역이 잘 되어 있는 책들이 많으므로 그림이 떠오른다. 오래전부터 고흐 때문에 프랑스 아를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컸는데 만약 그런 여행이 이뤄진다면 나도 이들처럼 기뻐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대리만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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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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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했기에, 이제 이성간의 새로운 사랑은 경험함 일이 없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씁쓸했다. 먼저는 어설픈 짝사랑과 연애를 하면서 부끄러웠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고 이런 사랑만 존재하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피폐하게만 끌고 가는지 아쉬웠다. 사랑과 집착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믿기에(혹은 경험을 토대로) 사랑보다는 집착과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을 쏟아낸 글이 아닌가 싶었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좋아하고 모두 소장하고 있지만 에세이는 두 번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만화가 더 좋다. 아직 마음에 맞는 에세이를 만나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보면서 씁쓸한 감정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씁쓸함이란 게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 대한 씁쓸함보다 사랑을 풀어내는 저자만의 방식에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노력도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마음이라고 해도 애인이 있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모든 걸 알면서도 끌려가고 따라가는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건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을 아예 공감하지 못한 다는 건 아니었다. 내 사랑을 온전히 줄 수 없을 때(짝사랑이거나, 내가 상대방을 더 좋아한다는 손해감 때문에) 내면은 슬픔과 실망과 절망으로 가득 찰 수 있지만 한 끗 차이로 광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 속의 사랑은 그 모든 게 드러나는 듯하다.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과 절절함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게 속한 삶을 영위해 가면서 드러나는 감정들을 가볍게 써내려가는 듯했다. 그래서 한 여자의 내면이 훤히 보이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좀 더 진지하게 신중하게 사랑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나도 이미 겪었을 숨겨두고 싶은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 순간들도 있었다.


새로운 이성간의 사랑은 없겠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밀당과 사랑의 표현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적당히 드러날 때 결혼생활의 만족감이 높아질 때도 있다. 싱글일 때의 밀당과 사랑과는 종류가 다른 사랑이지만 이미 그 단계는 지나왔으니 마음속으로 혼자만 끓이는 사랑이 아닌 서로 마주보며 하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 기억하기 싫은 사랑의 번민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현재 주어진 내 사랑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이고 그것이 결혼에 대한 최소의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연애할 때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그려낸 이 책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확실한 건가? 모순이 주는 의외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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