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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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잊혔다. 그들의 영혼이 봉안된 명단도 없다. 그들에게 이 작은 책을 바친다. 42쪽

 

슬프게도 정말 그렇다. 도리고 에번스가 ‘가이 헨드릭스의 전쟁포로수용소 삽화책에 들어갈 머리말을 이렇게 끝맺’은 것처럼 이 책을 덮는 순간 모든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증발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전쟁이 내게도 달라붙어 현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여전히 타이-미얀마 간 철도 건설 현장 속인 것 같고, 그 안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폭력과 굶주림과 죽음과 질병이 끈덕지게 날 따라온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조차 힘듦에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것뿐이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에요.’란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전쟁 속의 철도 건설 현장은 모두의 삶을 부셔 버린 듯했다. 분명 그들이 그 안에 갇히기 전의 삶과 벗어난 삶이 있는데도 전쟁 속의 기억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더 깊은 정글로 들어가 공사를 진행할수록, 사람들에게 잊힐수록, 인간이라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잔인해질수록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싶었다. 일본 천황에게 바친다는 명목 하에 이뤄지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기이하게도 싸우고 비난하고, 증오할지라도 서로가 살아 있는 순간이 가장 평화로웠다. 종종 읊어대는 시구(詩句)가 현실이 되고, 하나씩 목숨을 잃어갈 때마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데 동료가 지겹도록 뱉어내던 말이 뇌리에 박혀 결국 유언이 될 때 그 세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이 전쟁포로로 잡혀 있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인데도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순간들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지독한 포로생활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다키 가디너가 그렇게 얘기했던 ‘니키타리스 생선식당’에 가서 물고기들을 풀어줄 거란 말을 그의 동료들이 실행했을 때만 해도 무덤덤했다. 그러다 식당 주인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고 사과하고 변상하려 했을 때, 식당 주인이 덜덜 떨린 손으로 돈을 꺼내려는 손을 막아서고 다키 가디너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메뉴를 대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그의 죽음이 실감났고 전쟁은 끝이 났지만 기억은 결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로 성공했지만 자주 불륜을 저지르며 진부한 삶을 살아가는 도리고가 왜 그러는지 의아했다. 사랑해선 안 될 여자 에이미를 사랑하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전쟁터로 가야 했던 그의 마음이 처량하면서도 답답했다. 에이미의 들쭉날쭉한 불안한 마음도, 서로 죽었다고 알릴 수밖에 없는 내정된 배우자들의 거짓이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난 전쟁터에서 자행되는 잔인함을 낱낱이 목도하고 나자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의 삶에 가타부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증언은 할 수 있어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예고없이 끼어든 전쟁의 참혹함이 많은 것을 삼켜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삶까지 갉아먹었던 죽음의 철도 공사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다양한 위치에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삶도 이어졌다. 쉽지 않은 경험을 지닌 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생을 마감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것처럼 결코 진부하고 자극적인 시선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도리고와 에이미의 극적인 만남도, 전쟁 전범들을 억지로 심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과 기억을 촘촘히 엮어가며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이더라도 ‘이게 진짜 삶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담담하게 그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인간의 깊은 심연을 헤집고 다녔다. 아름답고 생생한 문장 앞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숨이 막히는가 하면, 나의 속내를 들킨 듯한 묘사 앞에 위로와 참회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 순간 먹먹했다. 고난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도 방향을 잃지 않고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저자의 참담한 의무를 알아차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죽음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지. 도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 또한 동정의 뒤틀린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곧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뜻했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296쪽

 

전쟁의 기억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지만 삶이 흘러가는 대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결국엔 그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마다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그것이 끝이었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본 나에게는 끝이 아님을, 고뇌의 시작과 동시에 그것 또한 삶의 다른 형태임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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