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길을 묻다 - 영상아포리즘 01
김판용 지음 / 예감출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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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선가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자유를 얻고 싶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

그 한마디가 나의 뇌리를 스치며 맞아,맞아 긍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연속에 묻히다 보면 금새 내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도시의 흔적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여서 오랜 간구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늘 자연과 자유가 동경이 되었지만 이 둘의 관계가 이토록 교묘하니 정작 나는 그 둘을 벗어나서 멤도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속에는 늘 끊임없이 자연과 자유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닌 지극히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모른채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나의 동경의 대상인 자연에 한번 푹 빠져 보고자 읽게 되었는데 자주 보아왔던 자연에 대한 찬미, 그 안에서 인간의 미미함을 써놓았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멋진 사진들도 많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사진과 글은 한탄이 아닌 그 안에서 느끼는 단아함을 그려내고 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책의 제목처럼 꽃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들이 참 많았던게 인상 깊었다.

그러나 왜 꽃이였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긴 하지만 금방 져버리는 꽃, 그래서 받는 순간의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 꽃. 그 꽃의 느낌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자는 꽃의 이면까지 들여다 보고 있었다. 단순히 겉모습만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비춰지는 꽃만을 사진으로 담는 것이 아닌 꽃들에게 말을 걸고 애정을 쏟고 있었다. 꽃을 지켜보는 것만도 행복에 겨워 잠시 지친 육신을 내려 놓듯이 태초의 나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대부분 확짝 피어있는 꽃들의 모습이였지만 저자는 꽃이 지는 순간 꽃을 피워올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까지 다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과 앞으로 열어갈 아름다운 날을 그려 보며 나아가라는 의미는 아니였을까?

그래서 꽃들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한게 아니였을까?

 

길을 쉬이 찾을리가 없겠지만 분명 활짝 핀 꽃을 보고 있으면 그 꽃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에서부터 깊은 산 혼자 폈다 지는 꽃까지 말이다.

꼭 꽃에서만 길을 찾으란 법이 있으랴. 자연속에서 그 안에서 어우러지며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질때 우리는 좀 더 맑은 숨을 쉴 수 있을 것이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뿌듯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하거나 외롭거나 슬플 때 자연에 기대듯이 우리는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꽃들에 관해, 장소에 관해, 자연에 대한 추억과 동경을 담담히 풀어낸 저자의 글과 사진은 그래서 더 소박하고 가깝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추억과 담담한 언어는 우리를 일상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무조건적인 자연에 대한 동경만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얼마나 잘 어울려 살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바깥의 세계를, 아파트 밖의 자연을, 치열한 경쟁속의 사회를 떠나 진실된 마음을 보라고 무언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적인 저자의 언어가 좋았다.

아프고 슬프고 씁쓸한 추억도 많았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긍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책을 곁에 두는 내내 즐거웠다.

 

처음 책을 대할 때 꽃들에게 내 길을 말해 달라고 내 길을 찾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안해진 내 마음은 꽃들에게 되려 이렇게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니 라고.......

이젠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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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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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여지는 내가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생각,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그건 단 한사람 나 뿐일 것이다.

그랬기에 나를 드러내는 것보다 나를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글로 써 내려 갈 수 있을까.

그럴 용기가 없기에 일기를 쓰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국'의 고마짱이 했던 말을 빌자면 어쩔 땐 너무 솔직하게 써서 내가 읽어도 부끄러울 때가 있는 자신의 일기처럼 '인생의 베일'은 키티의 내면을 키티보다 내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티 자신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키티의 생각, 키티의 감정, 키티의 마음은 냉정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겪은 고통들이 내게 진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 담담하게 제 3자로써 바라 보고 있을 뿐이였다.

 

키티에게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절대 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았지만 어쩌면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키티가 처음부터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슬슬 결혼을 제촉하는 적령기에 내가 있다라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보고 있자니 키티의 결혼이 두렵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동떨어짐이 낯설게 다가와 적잖이 당황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마치 바보가 된 느낌, 남들은 정상으로 보이지만 나만 이상해 보이는 가운데 바라 본 키티의 결혼, 외도는 결혼에 대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사교계에 멋지게 등장했지만 꽉찬 나이와 남들의 시선 때문에 도피하듯 결혼을 한 키티는 남편 월터를 따라 홍콩으로 간다.

거기서 유부남 타운센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월터의 분노에 또한 타운센트의 배신에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오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월터는 그러한 키티를 용서할 수 없어 키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같이 중국으로 갔는지도 모르나 키티도 그도 상처와 고통뿐인 마음을 위험한 마을에 흩뿌리듯 놓아 버린다.

자신을 절제하며 키티를 증오하는 월터, 월터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알지만 타운센트의 배신을 보고도 그를 그리워하며 절대 월터를 사랑할 수 없는 키티.

콜레라가 들끓고 하루에 수 십명씩 죽어 나가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들은 달라질 것도 없이 상처와 분노, 그리움, 사랑을 안은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던 월터를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냉랭히 말하던 키티와 타운센트가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알면서도 또 한번 몸을 내주었던 키티를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분명 나의 내면에도 수 없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양면성을 드러내는 키티를 나 또한 키티가 월터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키티는 임신 사실을 알고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채 자살의 가능성을 안고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

월터의 죽음은 충격이였지만 큰 슬픔을 느낄 수 없는 키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타운센트에게 몸을 내 주는 것이다.

 

중국의 오지 마을에서 철저히 혼자가 된 키티는 수녀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많은 자책을 한다.

어떠한 비난도 원망의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죽은 월터를 보며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그의 내면에 잠식된 증오를 떨쳐낼 수 있다 생각하지만 자신에 대한 증오를 번번히 이기지 못한 키티는 월터와 무엇이 다를까.

단지 살아 있음과 죽음? 포기와 희망?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월터가 견디지 못한 것도 있지만)자신의 마음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키티를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모습에서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어 본다.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처럼 나의 죄와 그녀의 행위를 비교함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진실의 베일을 벗겼을 때 나 또한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이리라.

그 나약함이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녀를 맹렬히 비난할 수도 없고 그 나약함이 드러났다고 그녀를 동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그녀가 느꼈던 삶의 공허감이 밀려와 어느 곳으로 치우치지 못한채 중립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자신의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벗어 던지는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 주었지만 온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일까. 

두려움, 미래에 받을 상처에 대한 걱정, 그 상처를 상대방에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진정 용기 없는 자는 나이고 잘못된 길을 걸어갔지만 고통속에서 희망의 길로 빠져나온 키티가 진정한 개척자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가 아닌 내 자신을 향한 용서가 될 터였다.

 

 

 

오타 발견 : p.23 그녀의 릿속엔 -> 그녀의 머릿속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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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철학자 요 미우 마 - 성장하는 삶을 위한 영혼의 지침서
조안나 샌즈마크 지음, 부희령 옮김 / 실천문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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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 미우 마를 보고 있자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가 생각나 잠시 고양이들의 군상(?)을 그려 본다.

뜬금없이 두 고양이를 왜 비교하냐며 의아해 할 수 있으나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이 고양이들을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얻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요 미우 마를 읽기 전까지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라며 가치 부여는 커녕 고양이를 통해 무언가 배울 거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찮다 생각하던 고양이의 삶에서 내가 얻을만한게 있었을까?

인간의 삶을 비웃으며 죽을 때가 되면 미련없이 죽는다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 속의 고양이와 고양이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요 미우 마.

이름조차 없는 소설 속의 고양이와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요 미우 마는 시작부터 다른 삶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을 요 미우 마는 성인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삶에서 고양이의 면모를 잘 드러 냈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인간의 세계에 어울려 살면서 그런 인간을 한껏 비웃고 있었다.

어울림 속의 모습 감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반면 요 미우 마는 고양이 세계에서도 평범하지 않는 고양이로 불리운다.

야생의 삶에서 깨달음으로 개척해 나간다고나 할까.

성찰로 이루어지는 삶. 이 또한 흔치 않지만 어디서 많이 보아 온 모습이다.

나는 어떤 고양이에 가까울까. 당연히 나를 드러내면서도 적당히 감추며 많은 것을 비웃으며 자아의 깨달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소설 속의 고양이 일 터였다.

그렇다고 내 삶을 한탄하며 요 미우 마의 삶을 강 넘어 불구경 하듯 바라만 볼 것인가.

과감히 나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놓고 요 미우 마의 삶의 방식을 지향해 보는건 어떨까.

 

 

고양이의 삶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황함을 느끼는게 당연할 것이다. 나 또한 소설 속의 고양이를 적나라하게 보아왔음에도 고양이의 삶에 또 다른 가치부여를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 미우 마 라고 해서 소설 속의 고양이와 특별히 삶의 모습이 다른건 아니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 배가 부르면 게으름을 피우고 때론 영역 다툼과 짝짓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고양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속의 과오를 깨달음으로 다른 고양이들에게 남기고 있었다.

우화를 통해, 늘 마주하는 고양이의 일상을 통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고양이의 언어이고 그를 듣는 나이지만 고양이의 세계에서 말하는 것은 나를 뜨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바로 나의 모습을 꼬집고 있었고 내가 변화 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회피하는 고양이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속임수를 쓴다'(p.68)는 한 줄의 문장만 보더라도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라 부끄러워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정하면서도 과감하게 깨달음을 던지는 요 미우 마의 말 속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건 당연했다.

 

고양이의 모습이 폴폴 풍기는 말 속에서 나는 인간 고양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을 맞이하듯 요 미우 마의 성찰을 덥썩덥썩 물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의 보습이지만 그가 던지는 말은 인간인 내게 이렇듯 커다란 감흥을 주었다.

머리말의 놀라운 발견이 진짜 이 귀한 깨달음을 남겼다고 해도 믿음만큼 요 미우 마의 깨달음을 통해 고양이라는 매개물은 잊은 채 내 자신을 깊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양이의 평범한 모습 가운데 되찾게 되는 나의 자아는 고갈되지 않고 끊임없이 발견을 하게 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의 고양이와 요 미우 마의 비교를 통해 고양이의 삶, 혹은 인간의 삶을 비교하며 비판하는 것이 아닌 왜 요 미우 마 같은 고양이가 흔치 않은가를 아쉬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쉬움으로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은 깨달음의 변화 속에서 누리는 평안을 다른이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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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범우문고 223
타키투스 지음, 박광순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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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한 건 배송료 때문이였다.

배송료를 물기가 아까워서 같이 구입하기 좋은 범우문고를 검색하다 제목을 보고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군. 읽어보자' 라며 별 생각없이 덜렁 주문을 해 버렸다.

막상 책을 받아 보니 장르는 역사,인물(그다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다.)에다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까마득한 먼 옛날이다.

너무 충동적으로 책을 골랐구나를 인식 하기도 전에 책은 나에게 녹록치 않음을 던져준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것과 쓰게 된 배경은 흥미로웠으나 막상 게르마니아의 세계로 들어가니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리 크지도 않는 책의 한 면에 표시된 수 많은 숫자의 매김은 읽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글보다 주석이 더 긴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주석을 봐도 본문이 이해되지 않는 이 사태는 어찌 수습한단 말인가.

어디서 주워들은 게르만인에 대한 호기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덮는 대신 그냥 편안하게 읽었다.

오로지 완독을 꿈꾸며...

완독은 하였으나 저자도 책의 내용도 어느 곳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최선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엄습하여 자책이 되고 있었다.

 

1장 게르마니아의 영토, 습성은 그래도 그럭 저럭 읽을 수 있었지만 2장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은 정말 그냥 읽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저자 타키투스의 태어난 해가 서기 50년대다보니 도저히 감지할 수 있는 내가 가진 사전 지식이 없다. 이러한 상황이니 책의 내용은 말해 무엇하리.

그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은 옮긴이가 칭찬했던 저자의 문체 정도.

 

알아가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알고 있음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걸 알며 이 읽힘이 알고 있음의 시초가 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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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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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호미>를 읽고 나서 어느 정도 저자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하여 내 책 꽂이에서 간택(?)된 그 전의 산문집 두부.

최신작 호미와 왠지 모르게 다르면서도 친밀감을 주는 이 느낌은 무엇 때문이였을까.

그건 아마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호미라는 농기구는 조금 예외일 수도 있겠다.)것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느낌을 온전히 지켜가기에는 '두부'는 호미보다 약간 까칠했다.

두부의 그 다양한 쓰임새에서 출소한 다음에 먹는 두부를 가지고 정치적인 얘기를 끌어냈으니 그리 유쾌한 내용들의 채워짐은 아니였다.

 

저자도 밝혔듯이 조금은 민감한 얘기들을 많이 머금고 있었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읽은 셈이다. <호미>보다는 조금 더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고 저자의 반복적인 에피소드의 등장도 여전해 읽으면서도 익숙한 친밀감을 많은 곳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비교적 <호미>에 비해 글들이 깊어서 글들의 끊어짐을 기다리며 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지루하다거나 따분한 기다림은 아니였다. 저자의 이야기에 넋을 빼다 보니 숨을 쉬고 싶어서라고 할까. 이상하게 박완서님의 글에서는 읽다가 덮어 버리는 끊김이 잘 되질 않는다.

단락 끊김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한 끝마침을 보아야 비로소 책을 덮을 수 있는 끌림을 가진 이야기 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별로 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호미>에서 였던가.

자신은 겪은 것 밖에 뱉어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경험은 누구나 다 하고 있지만 조리 있게 편안하게 재미나게 끌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기에 나는 이야기 꾼이라고 버릇없이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경험에서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무조건 저자의 경험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독자의 사고를 넓혀주며 그 안에서 간접경험을 시켜주니 자신은 경험한 것 밖에 쓸 수 없다는 말은 겸손한 것이리라.

 

아마 박완서님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사실감에 매료되어 편안히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끌려하는지도 모른다.

그 경험의 사실감은 얼마나 많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수 없는 글의 또 다른 재료가 되어 왔던가. <호미>와 자꾸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두부>를 읽으면서도 <호미>에서 보았던 소재의 과거 혹은 <두부>에서 보았던 소재의 미래를 오며 가며 느꼈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이것을 나는 한 얘기 또 하고 또 한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해보았지만 같은 얘기를 들을때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새롭게 들리는 것은 저자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 때문일 것이다.

 

책 머릿말에 저자는 한물 간 것으로 느낄까봐, 그 당시의 세상의 숨결까지 드러나는게 민망해서 수필이나 산문집을 낼 때마다 조심스럽다고 하셨다.

독자들도 어느정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알면서도 저자의 문체와 익숙한 편안함에 매료되는 것을 어이할까.

나도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간다. 투덜 대면서도 저자의 작품을 찾는 것.

저자가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써야 겠다는 생각보다 손이 스르르 가서 글을 쓰게 만드는 익숙함.

창작의 고통을 익히 앎에도 나는 감히 이렇게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자꾸 저자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도 방어막을 쳐가며 핑계거리를 대고 있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우스워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못마땅하여 저자의 글에 올인하지 못하는 걸까.......

현실로의 도피가 아닌 현실의 두드러짐에 대한 부각을 푸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또한 현실에서 왜 자꾸 도망치고 싶은 것일까.

답이 없는 질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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