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국의 송어낚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책의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엉덩이는 들썩 거렸고 속은 부글 부글 끓어 올랐다. 끝까지 읽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책을 덮어 버렸다.
철저한 분리.
그렇게 책과 나는 하나가 될 수가 없었고 폭발의 위험성까지 안고 있었다.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았을때처럼 느껴지는 당황스러움, 불편함 그리고 결국에는 불쾌함이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꾸역 꾸역 화를 눌러가며 겨우 끝까지 읽고 도저히 저저와의 인터뷰 내용은 읽지 못하겠기에 덮어 뒀다가 내 할일을 한 후 그제서야 읽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아니 이런 내 심정을 저자가 구구절절 설명해 주어서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특히 자신의 문장을 읽은 다음 즉시 던져 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문장, 즉 자체취소(self-cancelling)적으로 씌여진 책이라고 생각되어 진다는 부분에서는 후반부를 읽었을때의 답답함이 뻥 뚫린 기분이였다.
그의 말처럼 나는 그의 문장이 아닌 이 책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망각은 시작되었으니 던지기만 하면 이 책을 통한 울화는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과격한 표현을 일삼을 수 있는 원인의 주역은 여려가지 였다.
책을 끝까지 읽었음에도 송어낚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분명 책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고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문체에 대한 찬사도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가운데 나는 철저히 이 책에서 외면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의도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시원함과 고마움 뒤에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으스스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저자와 나는 의를 맺은 적이 없으니 배신이라는 표현이 독단적이긴 해도 저자와 독자의 배신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송어낚시의 의미는 저자로써도 의문이라고 하니 그건 제쳐두더라도 소설이라는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는 나의 발언은 조금씩 모순이 되어 간다는 걸 알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긴 해도 송어낚시의 무의미는 저자의 상상력으로 보아도 될터이고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풍자,유머,죽음,폐허는 현실에서 뿐만이 아닌 허구 속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장단에 맞장구를 쳐줄수 없었기에 나의 힐난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1960년대에 씌여진 책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많지만 브라우티건의 글을 만끽하려면 그 시절의 배경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시절은 내 피부에 와닿기엔 무리였고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엔 현 시대의 나의 괴뇌는 부족했다.
책을 통한 가장 큰 교류가 처음부터 어긋났으니 책을 읽는게 고역일 수 밖에 없었다.
저자와의 인터뷰를 보고서 어느 정도 나의 감정을 누그러트릴 수 있었고 시대적 혼란과 고뇌가 어느 정도 내게 차 있었다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 당기듯 나도 흠뻑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발전에 까지 미쳤다. 내겐 해설과 설명이 필요한 책이였다.
어느 정도의 브리핑 후에 읽었어야 했고 준비해야 했는데 무작정 내게 흡수되길 바랬다.
저자가 그토록 비난하는 목가적인 꿈, 아메리카 드림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무엇이 비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분간도 못했으니 나의 무모함은 미국의 송어 낚시로 인해 크게 당한 것이다.
그 비난의 대상이 나 같은 무지일 수도 있다는 것이 스르르 등골을 타고 오싹하게 전해진다.
현대에서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는 무던하고 오버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내게 뒷통수를 치는 것이였으리라.
절판되었다가 다시 재발행 되었다는 소리에 혹해 달려들었다 독을 마시고 스러지는 오염된 강의 송어처럼, 내 몸속의 독을 해독하지 못하고 이상을 잃어버리는 한심한 모습의 송어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