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빨간 외투 비룡소의 그림동화 75
애니타 로벨 그림, 해리엣 지퍼트 지음,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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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모두를 가난하게 했던 때, 새 외투를 장만해야 했던 안나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진솔하게 펼쳐진다. 작아진 파란 외투를 대신할 안나의 새 외투를,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던 엄마는 대체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 걸까? 다행히 그 때 엄마에게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 안나의 새 외투를 위한 길고도 즐거운 기다림과 노력이 시작된다.

농부 아저씨께 양털을 받는다. 엄마는 금시계를 드리고. 물레질하는 할머니께 양털을 실로 만들어주기를 부탁한다. 엄마는 램프를 드린다. 안나가 빨간 외투를 원해서 안나와 엄마는 숲에서 산딸기를 따서 실을 물들인다. 옷감 짜는 아주머니가 이 빨간 실을 옷감으로 짜 준다. 엄마는 자기의 석류석 목걸이를 준다. 재봉사 아저씨는 안나의 외투를 만들어 주신다. 엄마는 멋진 도자기 찻주전자를 드린다.

여느 그림책에서도 이런 이야기 구조는 많이 등장한다. 필요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가는 구조는 어쩐지 아주 익숙하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요정 할머니가 호박으로 마차를, 생쥐로 마부를, 또 도마뱀으로, 누더기 옷으로.. 등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결국 하나의 완성품이 준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게는 이 차이가 바로 이 그림책의 이야기를 더없이 미더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시간과 노력, 물물교환까지를 필요로 한다. 안나와 엄마는, 양이 털을 깎을 수 있는 봄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나? 아니다. 일요일마다 두 사람은 언젠가 양털을 주어 외투를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양을 만나러 간다. 양들에게 '털은 잘 자라니?' 하고 인사하고는, 깨끗하고 맛있는 마른 풀들을 먹이고, 꼭 껴안아 준다. 크리스마스 때는 종이 목걸이와 사과를 선물로 주기까지 하고, 캐럴도 불러 준다......(정말 놀라운 이야기!!)

아마..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물론 앞에서 실화라고 밝혔지만, 부분적인 픽션은 혼재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어쩐지 누군가가 생각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안나와 엄마는 그 양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은 내 마음을 무지무지 흔들어 놓았다. 정성을 들이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는 것... 물론 공짜도 아니고 농부 아저씨께는 금시계를 드린다. 하나의 물물 교환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을 , 안나와 그 엄마는 기다림의 한 부분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켜버린다. 양털을 깎을 때도 물론 이렇게 묻는다.

'양들이 아파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안나와 그 엄마가 거치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다음 과정을 맡아 줄 사람들을 찾고, 그러면서 천천히 외투를 위한 준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정 만큼이나 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안나네 집에서는 늘 해왔던 것처럼 작은 파티가 열린다. 올해의 특별한 손님은? 물론 올해의 특별한 선물인 안나의 빨간 외투를 만들어 낸 모든 사람들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그들 모두에게 빨간 새 외투를 입은 안나는 얼마나 예뻤을까?
크리스마스 날, 안나는 양들을 찾아가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정말로 그랬을 것 같다)

글쓴이가 서문에 붙인 이야기가 새삼 마음을 울린다. <새 외투를 몇 달 동안이나 끈덕지게 기다렸고, 25년이나 흐른 뒤에 나에게 그 외투를 보여 준 잉게보르크 슈라프트 호프만에게.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인내심과 결단력으로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마련하여 딸에게 준 어머니 한나 슈라프트를 그리며.>

게다가, 아니타 로벨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그릴 수 있었을까 싶은, 부드럽고 고요한 그림들은 이 그림책을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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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집 4 (양장) - 공포의 계곡 셜록 홈즈 시리즈 4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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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아, 요즘 들어 이렇게 완역본으로 계속 만날 수 있어서 진짜 즐겁다. 네째 권까지 읽었는데 내게는 이 책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사건의 전개보다도, 코난 도일이 자주 그렇게 하듯, 역사적 사실에 버무려진 개인의 과거사가 더욱 흥미로왔다. 이 책에서는 특히, 홈즈를 능가하며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주인공 더글라스의 개인사와, 코난 도일이 배려한 기막힌 반전의 맛이 한참 여운을 남겼다. 게다가 모리어티 교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암시하는, 장막을 꿰뚫어보는 홈즈의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 책은 난다. 책의 말미에서도 팽팽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써비스를 나는 맘껏 즐겼다.

셜록 홈즈, 완역본으로 만난 그는 어릴 때 보았던 그냥 명탐정이 아니었는데... 새로 만난 그가 너무 마음에 든다. 그의 기괴함에 끌린다고나 할까. 그는 느슨한 신경을 견디지 못한다. 알고보니 이완의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주사를 맞는다 (1권에서 본, 내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장면). 상습적 마약 중독자! 그렇게라도 신경의 고양을 탐닉한다. 그러다 사건이 들어오면, 완전히 팽팽히 당겨지는 활 시위처럼, 그야말로 홈즈는 팽팽히 당겨진다. 아, 한숨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특성이 아닌가 말이다. 글쎄, 그가 그런 정신 상태로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잘 말 할 수 없지만...어쨌든 내가 그런 인간의 특성에 감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내가 약간--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든다)

게다가 아마도 코난 도일은 수시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어, 내가 꿈에 셜록 홈즈가 된 것인가, 아니면 셜록 홈즈가 코난 도일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게 작가의 이력이 홈즈를 연상하게 해서, 홈즈가 더이상 가상의 인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색다른 보너스라 하겠다.

프랑스에서 자존심을 걸고 신예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에게 요청해서 괴도 신사 뤼팽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뤼팽은 사실 얼마나 출중한가!) 어릴 때 홈즈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뤼팽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곤 했었다. 그때도 그 괴도 신사는 지나칠 정도로 멋있었다. 이거야말로 불세출의 인간이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그때가 십대 초반이었으니 지금까지 거의 이삼십년이 지났다. 지금 그 둘을 반듯한 모습으로 다시 놓고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 인생을 이끌어 가는 그 중요하다는 가치관이나 호오도 세월의 두께를 더하면서 자꾸만 바뀌는 모양이어서. 그때 그렇게 맘에 들었던 뤼팽이라는 완벽하게 멋있는 신사의 모습보다는, 지금 보는 어쩐지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좀 유치하다 할 만큼 극적인 과시를 즐기고, 어떤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문외한인 그토록 불완전한 홈즈의 모습이 지금 더 얼마나 끌리는지 모른다. 참, 세월이 만들어내는 마술같은 변화가 당혹감과 함께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역시 인생이란 살아보기 전에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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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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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읽고 좋았던 책에 대해서 무언가 쓰고 싶어지는 법인데.. 서평을 쓰기가 약간 주저가 된다. 하지만 정리하는 차원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위대한 개츠비, 영화로도 유명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극적으로 등장해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사십 나이에 읽기에 어쩐지 좀 열없게 생각 되었지만 <상실의 시대>에 공감했으니...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처음 보았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이 책은 그렇게 명성을 얻었나? 무엇이 사람들을 그리 사로잡았나? 싶었다. 나로서는 책의 내용이 정말 허탈했고, 책을 만든 모양새나 책 속 그림까지도 정말 실망스러웠다. (나중에 보니까 다른 곳에서 나온 책이 두어권 더 있던데 내게는 그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젊은 날의 슬프고 아름다운 욕망,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첫사랑. (표지에 있는 말)
맹목적인 열정에 자신을 바치는 순정파 남자의 이야기인가.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는 과연 그럴만한 여자인가... 사실 그리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다. 내게는 데이지라는 그 여자가 자신의 이름만큼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남자의 맹목적인 열정도 그만 허무하게 피어오르는 안개같기만 했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와, 그 여자를 일생을 바쳐 어렵게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전혀 공감이 안 갔다.

도처에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란 그 자체가 얼마나 비밀한 아픔과 설렘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가. 하지만 지금, 그러니까 바로 지금에 이 이야기는 얼마나 진부한가? 아마도 이 이야기의 진가는 그 첫 출판연도가 아닌가 한다. 1925년, 그 아득한 옛날, 미국에 이 이야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아마 이것은 너무나 놀랍고 흥미롭고 가슴아픈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2002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던가? 그것도 계속 새로운 버젼으로 새로운 옷을 입으며 갈수록 세련된 방식으로 너무나 많이 보아서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그 명성의 자자함으로 하여 '설마 이렇게 뻔한 이야기가 끝까지?' 하는 의구심을 끝까지 떨칠 수 없다가 '결국?' 하며 허탈했다.

그렇다. 1925년에 그것은 아마 대단한 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조금도,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깊은 공감을 주는 책이 있지만, 이 책은 세월과 함께 더이상 그 명성을 이어가기 어려운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게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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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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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별한 책이다. 아마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절로 '어, 독서에 관한 한 내 스승이 여기에 있었네!'라고 외치게 했음직한 책이었다. 법률, 우주, 뇌 등등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에까지 책임있는 태도로 취재, 조사 연구해 가는 태도는 정말 신뢰가 갔다. 게다가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의 다양함에도 굉장한 동지 의식이 느껴졌다. 프로 독서가와 햇병아리 아마츄어 독서가로 갈리겠지만.

그의 독서에 대해 듣다보니 내 독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자신 다양한 분야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이 생기는 바람에 온갖 종류의 책들을 접하게 된다. 즐거워서 읽고 호기심에서 읽고,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다보니 나름대로 책읽기에 대해 할 말이 생긴다.

하도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보니 뭔가를 이해하는데 다소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창고 안에다 많은 정보를 차곡차곡 쟁여놓고 언제 어떻게 그걸 꺼내 써야 되는지 알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이런 상태는 내 경험으로는 아주 자주 유용하게 쓰인다. 유용하면서도 즐겁다. 하여, 내가 읽어가는 분야도 점점 늘어간다.

세상과 그 이치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정신적 영역에, 아름다움에 대하여 등등 ... 많은 것들이 궁금하고, 그것을 충족시켜가는 과정이 바로 내 독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은 또 자주 유용하게 쓰인다. 다치바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공감이 간다. 인간의 사회를 변화시켜온 것은 인간의 지적 욕구이다.

인간의 지적 욕구를 살펴 보면 (여성 주간지적 욕구를 제외하고) 실용적인 지적 욕구와 순수한 지적 욕구가 있다. 언뜻 보면 실용적 지적 욕구가 문명 사회로 이끄는 동인인 것 같지만, 실은 표면적인 측면일 뿐 우리 인류를 보다 깊은 곳에서 움직여 온 것은 보다 원초적인 순수한 지적 욕구, 즉 어찌되었든 알고싶고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구였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지적 욕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어떤 이익이 발생할까와 같은 실리성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고, 언제나 선행되었던 것은 실리는 뒷전으로 한 순수한 지적 욕구였다. 다치바나식 독서론을 읽으며 그의 말에 무한한 공감을 느꼈고 커다란 즐거움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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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0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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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인 동생이 있는 탓인지 20대에 건축가들이 보는 저널을 보다가 '야, 이것 정말 흥미로운 분야로구나,'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르 꼬르뷔지에, 안토니오 가우디 들의 이야기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문외한인 누나에게 설명해 주었던 남동생의 덕으로 살면서 소홀히 보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이후로 여러 잡지들에서 간헐적으로 소개되는 건축들, 건축가들을 주의깊게 보았고, 김석철씨가 쓴 다른 책들이나 서현 씨가 쓴 책, 단행본으로 나온 가우디, 들을 구해서 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 이 책은 그런 간헐적인 정보들을 정말 제목처럼 <산책>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해 준 책인 것 같다. 산책하는 마음은 느긋하고도 가득찬 느낌이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20세기 인류 문화의 유산을 만들어 온 대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좋은 글은 알지 못하던 세계에 발을 딛게 하는 역할을 하거니와(지은이의 말), 분명히 이 책은 더 멋진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하는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자주 잊고 사는 것이지만, 건축가가 아니라 해서 건축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이 아파트를 떠나 살 집을 짓기 시작하고, 부모님들이 사시던 집을 정리하고 평화로운 여생을 구상하시며 집을 짓고, 심지어는 남편이 올 초에 새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부 인테리어를 함께 고민할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건축, 너무나 창의적이고, 복합적이며, 현실적인 예술!

집 한 번 지어본 사람은 두번 다시 집 지을 엄두를 안 낸다는 말이 있다.(남편도 그랬다^^) 아름다움과 경제력 사이에서 고민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알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일은 얼마나 황홀한가! 정신이 핑핑 돌 정도로 복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다.

너무나 가능성이 많지만 또 현실적이 제약이 너무나 많은 건축이라는 분야, 그 분야에서 이토록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 낸 20세기의 건축가들의 작품을 많은 사진들과 함께 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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