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편지함 힘찬문고 38
남찬숙 지음, 황보순희 그림 / 우리교육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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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본 표지 그림이 새삼 눈에 든다. 책 내용 탓인지, 그림 속 아이들 셋의 모습과 낡은 키보드, 그리고 배경 가득한 꽃무늬가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책을 즐겨 보지만 스스로 나설 일 한 번 없는 순남이, 자신의 이름까지 맘에 안든다. 요즘 세상에 순은 뭐고 남은 또 뭐냐고... 이름만 생각하면 입이 툭 튀어나온다. 예민한 아이인데다, 도무지 현실에만 마음 붙이고 살기엔 사는 처지가 너무 팍팍하다. 그런 순남이가 편지인가를 들고 기뻐하며 팔짝 튀고 있다. 그 순남이를 좇아 언니에게 한 번 닿아보려고 덩달아 손을 뻗는 동생 순영이.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선 곳에서 순남이와 순영이를 부러워하는 듯 축하하는 듯, 사려깊은 친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혜민이. 아이들의 옷차림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딛고 선 것은 낡은 키보드라는, 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다. 그리고 온 바닥 가득한 자잘한 꽃송이들... 절로 마음이 확 벌어지게 만드는, 모두 함께 활짝 피어 즐거운 아이들을 뒤에서 한껏 축하해 주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책 전체에서 오는 따뜻한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멋진 표지다. 

뒷쪽 표지도 눈에 띈다. 거기에는 책 속 작가 선생님의 사려깊은 편지 내용이 짧게 몇 줄 담겨 있고, 작은 사진틀 같은 그림이 한 쪽에 마련되어 있다. 낡은 사진틀 같은 느낌의 네모 안에 다시 낡은 사진 같은 그림... 그늘과 햇빛과 그림자로 순남이의 기다리는 마음을 절묘하게 잡아내고 있는 책 속 일러스트를 실었다. 순남이가 작가 선생님의 약속과는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선생님의 새 책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렇게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한 순간으로 표현하고 있다니... 실제와는 달리  다른 모든 사물들은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에 숨었고 순남이의 그림자만 빛 속에 길게 늘어져 있는 비현실적인 그림이다. 그런 비현실 속에 그림은 오롯이 할 말을 다 하고 있어서 들여다볼수록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그림이다. 이런 게 기다림이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심술궂은 사람이래야 고작 순남이에게 질투하는 마음에서 해찰궂게 시비를 거는 반 아이 정도.. 그나마도 그리 큰 해꿎이도 되지 못하게 혜민이가 막아준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의 무대인 것 같은데, 그래도 갈등이 생긴다. 그 갈등은 바로 순남이가 스스로 만들고 순남이 안에서만 와글거리는 갈등이다. 스스로 가진 자격지심으로 하여 내세울 것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 대신 뭐든지 멋져보이는 혜민이를 자신으로 포장하여 동화 작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갈등의 시작이다. 일대일만의 비밀 편지인 이메일에서, 그러니까 순남이 생각에 온라인의 편지가 오프라인의 현실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막연한 믿음이었던 거다. 그러나 물론, 어디 그렇기만 할까.  

동화작가인 이혜숙 선생님은 아주아주 섬세하고 아이들 일에 마음을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첫 메일 발송자이자 어린 독자인 순남이와의 인연을 귀히 여겨 정성껏 대화를 나눈다. 둘은 어느새 서로가 스스로에게 힘이 되는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순남이의 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혼란에 빠진다. 지금 생각하니 순남이 스스로로도 너무나 멀쩡한데, 첫 시작을 공연히 혜민이로 해버린 것을 나중에는 후회하지만 진실을 밝히자니 너무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큰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게 처음에는 사소해도 어느새 눈덩이 불어나듯 하는 법이지... 그래서 순남이 마음 속은 맑게 개지를 못한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혜민이 알고 보니 소탈하고 순남이와도 짝꿍이 되어버리고, 작가 선생님과 혜민이와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열심히 책을 읽다보니 학교에서는 독서왕으로 뽑히는 놀라운 일도 일어나고, 작가 선생님은 순남이를 제일 소중한 독자로 여기며 순남에게 새 책을 선물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믿을 수 없을만치 좋은 쪽으로만 굴러가는 듯해 순남이는 어질어질할 정도이다. 그런데 그 좋은 일들을 어쩌나, 마냥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부쩍 성장해 있는 순남이지만 아직 처음부터 둘러쓰고 있던, 이미 작아져버린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탓이다.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작은 껍질을 쉽게 벗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는 순남이... 

그 어린 마음 속의 갈등이 이 책의 긴장을 유지한다. 모두가 순남이를 도와주고 손 잡아주고, 이끌어준다. 속 깊은 아이였던 순남이는 그 손을 잡고 쑥쑥 앞으로 나아가 불쑥 자라버렸는데 아직도 첫 시작의 그 껍질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란 스스로를 키워가는 것이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껍질을 벗어던지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겠다. 순남이가 어떻게 그 껍질을 벗어 던지게 될까?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 내내 조마조마하다. 착한 사람들만 수두룩하게 나오는데도 이런 긴장이 유지되다니, 책 읽는 독자로서야 살짝 기분 좋은 일이다.  

순남이는 그 무거운 짐을 혼자 힘으로 툴툴 털어내기는 버겁다. 사려깊은 작가선생님은 결국 순남이의 그 무거운 짐을 알아차리고 안쓰러운 마음과 격려를 담아, 순남이의 행동을 고스란히 이해하는 어른으로서 답신을 보낸다. "나는 네 마음을 알 수 있어. 오히려 네가 걱정돼.. 그리고 너는 내 소중한 첫 번째 독자니까... 너의 이름으로 보내줄 편지를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순남이가 스스로 깨지 못한 껍질은 사려깊은 어른 친구의 도움으로 단번에 깨진다. 그렇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순남이는 훌쩍 자란다. 힘들고도 소중한 경험을 몸에 새긴 거니까.. 순남이는 더 커지고 더 단단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 껍질을 깬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누구나 그런 영웅적인 일을 순조롭게 해낼 수는 없다. 순남이처럼, 타인의 도움으로 그 껍질을 깨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일이 상처만을 남긴다면 스스로의 속으로 몸을 말고 다시 들어가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순남이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 전에, 스스로 그 껍질을 깨기 위해 실질적인 준비를 한다. 혜민이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일이다. 써놓고도 맘에 차지 않고 자신이 없지만, 순남이는 그런 시도를 했고, 그건 순남이에게도 보는 내게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비록 그 뒤에 일어난 일이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려서 그 편지는 미처 전해지지 못했지만, 그리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 순남이는 남은 마무리를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하게 다가온 타인의 도움의 가치를 순남이는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절하게 주어지는 도움이라니, 그리고 그 도움을 받아 시원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아이라니...  

세상이 그렇게 따뜻한 손길을 주고 받으며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에 촛불 하나가 켜지듯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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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송이 2013-06-1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쪽수 알려주셧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