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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ㅣ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평점 :
<울기엔 좀 애매한>? 특이한 제목. 만화책을 보다보니 중간에 그런 곳이 나온다. 울기엔 좀 애매한... 그런 상황? 자타 불가촉 루저인 고3, 혹은 재수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러하니.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고아가 된 것도 아니고..." 울기에는 뭔가 좀 애매한..? 어른 태섭쌤은 말한다.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지.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 근데 실은 어째 울만도 한 일이다. 눈물 쏙 빠질만한 일일 수도 있는데.. 담대한 아이들은 전쟁, 고아 정도의 극한이 아니면 울기에 좀 뭣하다고 하니, 요즘 아이들이 약하기는커녕 독하다. 그만큼 내몰리는데 안 독하고 살아남을 수 있으랴, 싶다. 그러나 실은 또 순하다. 이 만화책의 아이들은 다아 순하다. 한 마디로 모순 범벅이다.
이 책의 무대가 되는 곳은 오로지 대입시 미술을 위한 스킬을 가르치는 학원. 미술을 좋아하고 나름 타고난 그림 실력도 있어서 그걸 전공으로 해볼 요량으로 모인 아이들에게 사실 학원은 오로지 한 가지를 가르친다. 더도 덜도 없이 '입시' 미술이다. 나름대로 이미 매뉴얼이 되어버린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다. 그대로 작가의 아바타인 태섭쌤은 냉소, 자조에 위악 개그 전문이지만 동병상련이랄까, 아픔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생선배다. 전작 <습지 생태 보고서>의 최군이 미술학원 강사로 취직한 셈이다. 취직한 지 좀 된 것 같다.. 강사 티가 아주 몸에 배었다. ㅋㅋ
지난 해 서울 어느 미대 앞에 널려있는 미술학원 중 한 군데를 몇 번 들락거렸다. 딸이 고3, 그것도 시골인 고향에서 고등학생 내내 수능 준비를 하며 미술학원에 다니고, 수능을 치자 바로 서울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실기에 돌입한 전형적인 미대입시생이었다. 두 달간 천문학적인 학원비를 내고 같이 상경한 여러 친구를 모아 방을 잡아야 했다. 그런 것도 버거움이었지만, 아이의 버거움은 그보다 훨씬 컸다. 두 달 동안 지켜본 아이들은 뭐, 인간이 아니었다.. (그럼 뭐?) 오전 8시부터 밤 10시 혹은 그 넘은 시간까지, 토요일도 없이 혹은 일요일도 잊은 채 그려야 했다. 생각? 그런 게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수능 전 미술 학원에서 한 달 걸려 완성하던 완성작을 네 시간에 맞춰 그려내는 것, 그것도 자신의 머리속에 암기되어 있는 어떤 내용물을 즉시 꺼내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내용물을 최대한 머리 속에 많이 저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야지 그게 머리 속에도 손에도 저장이 된다는 것.. 그리기를 좋아해서- 이런 말은 그곳에서는 당연 우스개다. 대한민국의 입시 미술은, 학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자서 입시 미술을 준비할 물정모르는 담대함..은 훠어이~ 훠어이~ 다.그렇게 고3, 미대입시생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버겁고 안쓰러웠는데.
뭐, 이 책을 보니 딸 아이의 두 달은 그 동네에서는 일상다반사지 그 어떤 특별함도 아니었다. 찌질한 인생, 불가촉 루저 원빈이, 은수, 또 누구누구누구.. 그리고 불가촉과 접촉할 때마다 보드라운 생살이 터지는 또다른 희생자 지현이, 그들을 지켜보고 밀고 당기는 태섭쌤, 은근하고 엉큼하게 운영에만 관심이 있는 원장과 대장쌤.. 적나라하다. 그런데 그게 또 듣던 그대로다. (놀라움과 공포와 자부심을 묘하게 섞어 딸은 학원 분위기를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들었던 걸 보는데, 아, 마음이 짠한 걸 어쩔 수 없다. 시큼하다. 아니 시큰한가...
최규석이 이런 식으로 적나라한 현장을 그려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처음 볼 때는 그저 조금 긴 한 편의 에피소드를 보는 것처럼, 단편적인 느낌이 들었다. 세태를 고발하는구나, 스스로 말하기를 위악 개그라는 무기를 가지고. 그런데 자꾸 볼수록 더 짠해지고 더 좋아진다. (실은 그의 작품은 늘 그렇다. 난 다 좋아한다. 특히 <공룡 둘리>와 <습지..>) 이미 유명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그가 당당함 대신에, 죄책감인지 책임감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든든하다. 20대부터 30대 초반의 몇몇 시기에 미술학원에서 대학 입시를 위해 가르친 일을 했던 그가, 자신이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림도 작화도 잘 해내는 만화작가이지만, 그 이상의 무엇,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지 않는데다가 특유의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이 진짜 좋다. 이 책에서는 더욱 과감해진 태섭쌤의 변화무쌍한 표정 변화를 보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는 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