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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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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베르트를 좋아한다.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를 어릴 때 아주 좋아해서 귀에 폰을 꼽은 채로 걸어다녔다.  막 스물이던 처녀가 지금과 같은 계절, 노랗고 흰 꽃들이 풀풀 날리는 햇살 가득한 교정에는 귀를 닫고, 스스로 택하여 소통했던 것이 죽음과 소녀였다니.  지금 생각하니 막연히 이상하다.  그런데 끌렸다.  그 중에서도 2악장에는, 홀렸다 해야 할까...

학교 다닐 때 몇 안 되던 클래식 음악감상실에서 알게 된 노래들 중에서 제일 삘이 꽂힌 노래가 슈베르트의 가곡 <바위위의 목동>이다.  처음 들었을 때, 누구의,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고 듣는데 숨이 막힐만큼, 아름다왔다.  기억이 새롭다.  지금도 내게 그 노래는 그렇다.  나는, 길가다 멈춘 사람마냥 노래의 세계로 들어가버린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작은 기타곡 <밤과 꿈>을 로드리고의 기타곡보다 더 좋아해서 스스로도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슈베르트에 끌린다...  왜일까?" 

... 그러고보니 나는 <약흥의 순간>을, 두근거림, 설레임과 같은 느낌으로 듣는다.  내 차에서. 

또, 또 있다.  한때 내가 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말이다. 

몇해전부터 같은 가곡집에 있는 <물 위에서 노래함>을 보탰다. 

 

교학곡 8번 <미완성>,  피아노 5중주곡 <송어>, 가곡집 <겨울나그네>, <즉흥곡집> 정도가 익숙하고 다른 교향곡이나 가곡집을 사서 들어본 적은 없다.   <마왕>을 다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한동안 칼라스의 목소리로 오페라 아리아들을 들었다.  모짜르트의 돈 지오반니, 피가로의 결혼이나 코지 판 투테에 나오는 소프라노를 듣고 있으면, 곧 천상의 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귀하고 황홀한 소리는 나를 잠시동안 그 높은 세계에 있게 하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사역 중인 죄수들을 잠시 천상으로 인도했던 그 고귀한 아름다움.  모짜르트의 세계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슈베르트는...

고독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적막, 고독, 죽음, 아픔.  쓸쓸함과, 쏟아지는 햇살이 아닌 한줄기 빛과 같은 겸허한 환희.  어디에도 터질듯한 기쁨과 아름다움이라곤 없다.  그토록 유명한 가곡 <보리수>를 들을 때, 노래의 가락을 따라가기보다 피아노 반주에 마음을 빼앗겨본 사람들은 알리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쓸쓸함, 쏟아지는 쓸쓸함을. 

내게 모짜르트는 <천상의 고귀함>이고 슈베르트는 <인간의 슬쓸함>이 되었다.  모짜르트에 홀리고, 슈베르트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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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미 거둘 것 다 거두고 이제 휴식에 들어간 빈들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늦여름 생각이 났다.

늦은 여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저물녘이기도 하고 달 뜬 밤이기도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건계정 가는 길로 발길을 잡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던 길 그 무겁던 발걸음과, 둥근 달을 바라보며 오던 길에 한발짝마다 무겁던 것들을 한줌씩 털어내듯 홀가분하던 마음이 들던 생각이 난다.  그런 생각들이 시가 되어 나와서 집에 오면 어느 쪽지엔가 적어두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일삼아 자전거를 타고 건계정을 다니기 시작했다.  바깥 볼일을 보러 나갈 때 예전과 달리 자전거로 집을 나서니, 들어오는 길에 항상 들러 눈인사를 주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갑갑한 시내 공기와 달리 공기가 벌써 조금이라도 다르고, 오며가는 길에 물색이 풀색이 하늘색이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되니 그 일이 즐거워서 좀 늦다 싶어도 내 욕심을 내어서 다녀오곤 했다.  낮에 조금 여유있게 갈 때는 언제나 옆을 보며 달린다.  들판을 느끼고 밭이랑 옆집이랑, 산자락을 느낀다.  그들은 언제나 가만 있는 듯 하지만, 실은 언제나 변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겨우 올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나는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웠고, 받았다.

내 가방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자세히 보곤 했다.  그러다보면 가는 길은 언제나 오래이고, 오는 길은 바람을 맞으며 씽씽 달려오곤 했다.  삼십분이며 가고 올 그 길을 대부분 한시간을 훌쩍 넘어 빠져나오곤 했으니...  내가 건계정에서 보내는 그 시간, 나는 그것이 건계정에 대한 내 사랑이겠거니, 생각한다.  내가 그와 함께 솔찮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건계정은 나에게 그 몸을 열었고 거기에 나는 내 마음을 담았다.  나는 그 속에서 노닐었다.

사진은,

그런 것들을 잡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찍어낸 이 사진들 속에도 어김없이 건계정이 있다.  내 손톱이 내가 아니지만 내 손톱이 또한 나이듯, 그것이 그러하다.  지금 나는 내 사진을 통해 건계정을 본다. 아름다운 건계정... 오직 나와 함께, 나와 둘이었던 그 순간, 너는 내게 너무나 아름다왔지.   

 

 

늦늦여름이었나. 아직 푸른기가 화사한 벼들판.


황금빛 들판이 출렁인다. 나는 몇번이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들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들판은 휴식에 들어간다.


봄에 그 잎을 보았는데, 여름에 이런 꽃을 피우다니! 박주가리 덩굴에 핀 꽃을 보고 한참 신비로왔다. 책에서 본 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논가, 논둑에 심어놓고는 가을에 거두는 콩이, 여름내 이런 꽃을 피우고 지는지를 새삼스럽게 보면서.


올해 건계정 산책로에는 군에서 마음먹고 조롱박이니 호박이니 쑤세미 같은 것들을 넘칠만큼 심었다. 가고오는 길에 문득, 수줍은 웃음이 느껴지곤 했으니... 어둑해질 때면 하마 달밤을 느끼게 하는 하얀 박꽃이라.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지, 인심좋게 이리 예쁜 것도 보여주는 후한 호박꽃.


길가집 쥔 누군가, 들고가던 나팔꽃씨를 쏟았으리... 울타리를 따라 나팔꽃이 작은 불꽃처럼 일어난다.

 


이파리는 이리 완전한 하트- 가만 들여다보는 이에게는 사랑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햇봉오리는 이파리 뒤에 이리 살짝 숨었다가


 


불꽃으로 화들짝 피고 싶어서 이리 몸을 배배 꼬아대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길가 작은 꽃밭에 부러 심어둔 듯, 찾아보니 꽃범의꼬리였다.


꼬리라는 이름 탓인가, 이녀석도 가만 보고 있으면 실실 웃음꼬리를 친다.


도라지꽃은, 언제나 나를 세운다. 도저히 그 부름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을이 드니, 열매조차 나를 잡아끈다. 너- 신비로운 파랑으로 남았구나.


늦여름내내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던 해바라기, 누군가 내려다본다 싶으면 어김없다.


작은 개울을 따라 지천으로 흐드러져 눈부시던 고마리꽃들. 분홍이고, 희고, 끝만 발간 녀석들이 무리져 뭉쳤다가 벌어지곤 했다. 벌어지면 웬걸, 모르는 척 다른 꽃이 되어버리곤 한다.


고마리 옆에 며느리배꼽이 연두빛 꽃을 달고 있더니 어느덧, 파란 열매로 낯색을 바꾼다. 가을이다.


참취가 가을을 알린다. 봄에는 애푸른 빛 향그러운 이파리로 솟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향그럽긴 마찬가지라.


봄에는 별꽃 하염없더니, 늦여름 초가을에 별꽃아재비가 하염없다.


문득, 건계정의 하늘이 높고 짙다.


물 흐름도 차가와지고...


가을을 모르는지 삼색제비꽃이 물정모르고 피었다. 처음보는 너지만, 너 이름을 알겠다. (도대체 삼색제비꽃이 아니면 뭐겠니?..) 이야기를 트고는 묻는다. "그런데 니 친구들은 봄에 일찍들 피던데...?"


길가집을 지나다 길가집 할머니를 만났다. 올여름 팔을 다쳐 대체 거두지를 못했더니 국화가 이모양이네.. 라시는 푸념이 뭔 말인가? 이리 속속들이 예쁜 국화를 내, 이때까지 본 적이 없거늘.


그녀들, 하나같이 예뻐서 모두 보고 있으면 어질어질해진다. 남자들이 길가에 넘어져 널부러져있지 않는게 이상하지...

너 안에 하얀 꽃잎 백합을 품고 있었나. 이제 삭풍을 견딜 듯, 단촐하구나.


오호라, 여기가 대체 어디였으며 그대는 누구였던고? ...아주까리 한 그루가 한마리 타조처럼 지는 해를 지킨다. 그 자태를 심상히 넘길 수 없다.


가까이가면, 잎은 이리 우걱하고 열매는 요리 조콩한데.


수크령이 가을 물살을 물끄러미 보고 있네.


산자락을 돌기만해도 내게 찰싹 붙어오던 숱한 녀석들, 도깨비바늘로 붙을 준비를 한 모습들이 심히 공고하여 굳은 결심을 한 듯 기특해뵌다.


담쟁이가 연두였다가, 초록이었다가, 이제 주홍으로 다홍으로 마지막 선을 보인다. 벌써 마지막 인사를 할 준비를 마쳤구나... 너의 파란 열매 앞에서 내 숨을 고른다.


건계정 두고 오는 길이 너와 함께여서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었지. 내 발끝에서 흘러나와 길을 만나고는 그 길을 내 발끝으로 다시 흘려넣어주던, 신비로운 힘을 간직한 친구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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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2005-04-1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쁘고 아름다워요^^
꽃들이 아기자기 하고 색깔이 너무 이뻐요^^

sprout 2005-04-12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 저랑 같은 마음이어서 기뻐요. 꽃을 사랑하는 분일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이제 봄이 되어 다시 건계정을 자전거로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아름다운 건계정에.

실비 2005-04-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꽃을 좋아한답니다. 가까이 보죠^^
 


글쎄...

 


이녀석 좀 보세요

 

친구네 집에 놀러갔더니 글쎄,  이 녀석이...  그집 식구 저금통 안에다가 살짝 집을 지었네요.  조그만 방방이 아기들이 들어있네요.  작은 집, 작은 방, 작은 알들.   정말 단촐한 집 구경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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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ks 2004-05-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 녀석 집을 나갔다우.
밥 먹으러 갔다가 집을 못찾는건지 어쩐건지...

sprout 2004-05-2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사진찍는다고 저금통 열었다 닫았다 하니까 이집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싶었나... 글쎄 그렇다고 아기들을 포기하고 가면 어쩐다냐. 이제 그 아기들이 깨어나면 뭘 먹이며 키우나 글쎄. 험한 세상 엄마 없이 어찌 살지....
 


어느 날 이런 모습으로

 


내게 왔다.

 


플라스틱 작은 화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어느 날 문득 들른 꽃집에서 이 파란 꽃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답하여 플라스틱 작은 화분에 담긴 너를 내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보고 또 보며 사랑한다.    봄내 보고 다닌 꽃마리를 닮았으니 아마도 지치과의 식물일 것이다.    돌돌 말려있다가 풀리며 피는 꽃봉오리들,  드물게 파란 꽃잎의 빛깔,  꽃 안에 놀랄만큼 소담스런 또 하나의 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온통 봄 들판을 살살 기는 깨알만한 꽃마리의 우아한 친척 쯤 될까.     나는 지금도 날마다 이 꽃을 보며 논다.    네가 있던 꽃집에서는 너를 물망초로 부르고 있었지.....  하지만 어쩐지 나는 너를 그리 부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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