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미 거둘 것 다 거두고 이제 휴식에 들어간 빈들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늦여름 생각이 났다.
늦은 여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저물녘이기도 하고 달 뜬 밤이기도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건계정 가는 길로 발길을 잡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던 길 그 무겁던 발걸음과, 둥근 달을 바라보며 오던 길에 한발짝마다 무겁던 것들을 한줌씩 털어내듯 홀가분하던 마음이 들던 생각이 난다. 그런 생각들이 시가 되어 나와서 집에 오면 어느 쪽지엔가 적어두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일삼아 자전거를 타고 건계정을 다니기 시작했다. 바깥 볼일을 보러 나갈 때 예전과 달리 자전거로 집을 나서니, 들어오는 길에 항상 들러 눈인사를 주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갑갑한 시내 공기와 달리 공기가 벌써 조금이라도 다르고, 오며가는 길에 물색이 풀색이 하늘색이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되니 그 일이 즐거워서 좀 늦다 싶어도 내 욕심을 내어서 다녀오곤 했다. 낮에 조금 여유있게 갈 때는 언제나 옆을 보며 달린다. 들판을 느끼고 밭이랑 옆집이랑, 산자락을 느낀다. 그들은 언제나 가만 있는 듯 하지만, 실은 언제나 변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겨우 올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나는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웠고, 받았다.
내 가방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자세히 보곤 했다. 그러다보면 가는 길은 언제나 오래이고, 오는 길은 바람을 맞으며 씽씽 달려오곤 했다. 삼십분이며 가고 올 그 길을 대부분 한시간을 훌쩍 넘어 빠져나오곤 했으니... 내가 건계정에서 보내는 그 시간, 나는 그것이 건계정에 대한 내 사랑이겠거니, 생각한다. 내가 그와 함께 솔찮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건계정은 나에게 그 몸을 열었고 거기에 나는 내 마음을 담았다. 나는 그 속에서 노닐었다.
사진은,
그런 것들을 잡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찍어낸 이 사진들 속에도 어김없이 건계정이 있다. 내 손톱이 내가 아니지만 내 손톱이 또한 나이듯, 그것이 그러하다. 지금 나는 내 사진을 통해 건계정을 본다. 아름다운 건계정... 오직 나와 함께, 나와 둘이었던 그 순간, 너는 내게 너무나 아름다왔지.
늦늦여름이었나. 아직 푸른기가 화사한 벼들판.
황금빛 들판이 출렁인다. 나는 몇번이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들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들판은 휴식에 들어간다.
봄에 그 잎을 보았는데, 여름에 이런 꽃을 피우다니! 박주가리 덩굴에 핀 꽃을 보고 한참 신비로왔다. 책에서 본 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논가, 논둑에 심어놓고는 가을에 거두는 콩이, 여름내 이런 꽃을 피우고 지는지를 새삼스럽게 보면서.
올해 건계정 산책로에는 군에서 마음먹고 조롱박이니 호박이니 쑤세미 같은 것들을 넘칠만큼 심었다. 가고오는 길에 문득, 수줍은 웃음이 느껴지곤 했으니... 어둑해질 때면 하마 달밤을 느끼게 하는 하얀 박꽃이라.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지, 인심좋게 이리 예쁜 것도 보여주는 후한 호박꽃.
길가집 쥔 누군가, 들고가던 나팔꽃씨를 쏟았으리... 울타리를 따라 나팔꽃이 작은 불꽃처럼 일어난다.
이파리는 이리 완전한 하트- 가만 들여다보는 이에게는 사랑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햇봉오리는 이파리 뒤에 이리 살짝 숨었다가
불꽃으로 화들짝 피고 싶어서 이리 몸을 배배 꼬아대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길가 작은 꽃밭에 부러 심어둔 듯, 찾아보니 꽃범의꼬리였다.
꼬리라는 이름 탓인가, 이녀석도 가만 보고 있으면 실실 웃음꼬리를 친다.
도라지꽃은, 언제나 나를 세운다. 도저히 그 부름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을이 드니, 열매조차 나를 잡아끈다. 너- 신비로운 파랑으로 남았구나.
늦여름내내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던 해바라기, 누군가 내려다본다 싶으면 어김없다.
작은 개울을 따라 지천으로 흐드러져 눈부시던 고마리꽃들. 분홍이고, 희고, 끝만 발간 녀석들이 무리져 뭉쳤다가 벌어지곤 했다. 벌어지면 웬걸, 모르는 척 다른 꽃이 되어버리곤 한다.
고마리 옆에 며느리배꼽이 연두빛 꽃을 달고 있더니 어느덧, 파란 열매로 낯색을 바꾼다. 가을이다.
참취가 가을을 알린다. 봄에는 애푸른 빛 향그러운 이파리로 솟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향그럽긴 마찬가지라.
봄에는 별꽃 하염없더니, 늦여름 초가을에 별꽃아재비가 하염없다.
문득, 건계정의 하늘이 높고 짙다.
물 흐름도 차가와지고...
가을을 모르는지 삼색제비꽃이 물정모르고 피었다. 처음보는 너지만, 너 이름을 알겠다. (도대체 삼색제비꽃이 아니면 뭐겠니?..) 이야기를 트고는 묻는다. "그런데 니 친구들은 봄에 일찍들 피던데...?"
길가집을 지나다 길가집 할머니를 만났다. 올여름 팔을 다쳐 대체 거두지를 못했더니 국화가 이모양이네.. 라시는 푸념이 뭔 말인가? 이리 속속들이 예쁜 국화를 내, 이때까지 본 적이 없거늘.
그녀들, 하나같이 예뻐서 모두 보고 있으면 어질어질해진다. 남자들이 길가에 넘어져 널부러져있지 않는게 이상하지...
너 안에 하얀 꽃잎 백합을 품고 있었나. 이제 삭풍을 견딜 듯, 단촐하구나.
오호라, 여기가 대체 어디였으며 그대는 누구였던고? ...아주까리 한 그루가 한마리 타조처럼 지는 해를 지킨다. 그 자태를 심상히 넘길 수 없다.
가까이가면, 잎은 이리 우걱하고 열매는 요리 조콩한데.
수크령이 가을 물살을 물끄러미 보고 있네.
산자락을 돌기만해도 내게 찰싹 붙어오던 숱한 녀석들, 도깨비바늘로 붙을 준비를 한 모습들이 심히 공고하여 굳은 결심을 한 듯 기특해뵌다.
담쟁이가 연두였다가, 초록이었다가, 이제 주홍으로 다홍으로 마지막 선을 보인다. 벌써 마지막 인사를 할 준비를 마쳤구나... 너의 파란 열매 앞에서 내 숨을 고른다.
건계정 두고 오는 길이 너와 함께여서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었지. 내 발끝에서 흘러나와 길을 만나고는 그 길을 내 발끝으로 다시 흘려넣어주던, 신비로운 힘을 간직한 친구라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