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천둥의 시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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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천둥의 시대 -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
햄프턴 시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11월
평점 :
방금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뭔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든다.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 낸 뿌듯함이랄까? 처음엔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더니 읽고 나니 읽을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저런 대작을 그냥 지나쳤을 거라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처음 들추었을 때에는 내용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로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는데 막상 페이지를 넘길수록 무수히 등장하는 따옴표와 주석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살짝 실망도 하고, 게다가 내용 자체가 지루하기도 해서 책을 덮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따옴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속단은 금물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불필요한 주석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꾸준히 읽어나갔다. 100페이지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이야기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고 조금 더 책 속으로 몸을 들이밀게 되었다.
햄튼 사이즈가 쓴 이 책은 '키츠 카튼'이라는 미국 서부 시대 영웅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그와 얽힌 북아메리카의 영토전쟁, 그 속에서 사라져간 인디언들의 비참한 역사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미국의 광활한 영토 확장을 위해 초인적인 힘과 기지를 발휘한 인물을 미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건조하고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한 편의 서사시라고나 할까? 그런데 담담한 필치와 과장없는 말투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욱 '키츠 카튼'을 멋진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키츠 카튼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이야기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나바호'족이 등장한다. 다양한 인디언 무리 속에 단연 압권이라 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하고 신비롭게 등장하는 나바호. 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다. 네 개의 산봉우리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하는 나바호에게 미국의 영토 장 정책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미국의 발전을 방해하는 걸림돌인 양 여겨지고, 야만인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들은 백인과 서구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였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일깨워 주는 책이었다. 미국이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부족들, 인디언들은 그들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꾸며 살아간다. 특히 나바호족에 대한 묘사를 봤을 때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듯 하다.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여성들의 삶과 4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부여까지, 그들의 삶을 미개하다고만 할 수 없는 모습을 저자는 곳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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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1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나바호 여성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권력을 가졌다. 나바호 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 몇몇은 여성이다. 자비심 많은 가모장 '변하는 여인'이나 현명하고 나이 많은 은둔자이며 사람들에게 베 짜는 법을 가르친 '거미 여인' 등. 나바호들은 모계사회이며 외가 거주제로 산다. 어머니들을 따라 혈통이 이어지며 결혼하면 남편이 처가에 와서 산다. 여자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가정 경제를 꾸렸다. 아이들에게도 재산이 있었고(아이 몫의 가축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 아이들의 의견도 들었다. 노예(습격 때 잡아온 여자와 아이들)도 순수 나바호와 똑같은 권리를 가진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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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보다 너그럽고 관대한 사회라고 자랑하는 이주민들의 나라 미국사회에 비추어 봐도 하나도 하등할 것 없는 사회라는 것을 이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오히려 평등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전쟁을 통해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강제이주시키면서 미국의 영광만을 위해 인디언들을 장기판의 말인 양 취급했던 군장성들, 즉 미국의 태도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보스케레돈도로 강제이주 당한 채 핍박받고 가난에 시달리던 메스칼레로 추장 카데테가 존 크레모니 대위와 나눈 대화는 현재의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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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98 우리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당신들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합니다. 어른이 되면 큰 집도 짓고 큰 마을도 세우고 그런 큰일을 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이루고 난 다음에 그대로 남겨두고 죽습니다. 우리는 그런 걸 노예살이라고 봅니다. 옹알이를 할 대부터 죽을 때까지 노예 신세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멕시코인들이나 다른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 일하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을 것요. 고작해야 당신네들처럼 되는 법밖에는 배우지 못할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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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살이라. 현재에 충실하기보다 더 나은(물질적으로 풍족한) 미래를 위해 달리기만 하는 문명인들의 문제점을 꼬집은 말이 아닐 수 없다. 고작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라니.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일침인가. 물론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더 많겠지만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옷을 입는다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살아가는 그들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겉치레에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미개하다거나 불쌍하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오만임에 틀림없다. 이 이야기는 나라와 나라,민족과 민족에 국한되는 이야기이기보다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 사람의 시선이 볼 수 있는 모습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 책은 독단적인 미국의 행위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과 부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 책 앞부분에 쓰인 무수한 찬사가 과장이나 거짓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감상을 느끼려면 적어도 100페이지는 넘겨야 한다는 것을 다른 독자들에게 조언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