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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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와우! 이 책 재미있겠다 싶었다. 같은 사건을 99가지 문체로 다시 쓰다니, 어떤 변주가 이뤄질지 생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최근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읽는 내내 그 기발한 생각에 감탄하면서 웃게 되더라. 실제 사건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탄 한 남자의 모습이 묘사되고, 두 시간 뒤 다시 그 남자가 생라자르역에서 친구와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이 그려진다. 99가지 문체로 변주되는 이 사건은 시작 부분인 이 책 11쪽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실었다.


약기略記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문체 연습>, 11쪽)


이런 기본 메모를 바탕으로 99개의 변주가 시작된다. 이 글을 읽고 레몽 크노처럼 당신도 한 번 시도해 보라.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말투를 바꾸거나, 글 형식을 달리하거나, 글의 장르를 다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레몽 크노 또한 이런 방법을 쓴다. 중복해서 말하거나, 조심스럽게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꿈결에서 하듯, 머뭇머뭇 거리는 어조로 저 아침 버스에서의 일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하고(그 솜씨가 참 절묘하다), 시(詩)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 시는 때로 소네트가 되기도 하고,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아니, 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이 희곡도 되고 소네트도 되고 자유시도 된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철학 특강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함께 그려보아요’에서는 마치 아이와 함께 그림 수업을 받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신나는 동요가 되기도 하고, 구성진 가락의 창(唱)이 되기도 한다. 전보, 편지, 광고, 공식서한 등등 레몽 크노의 세계에서는 저 짧은 일화로 모든 게 가능하다.

시선을 달리하면 같은 일화도 완전히 달라진다.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느껴보라고 이 책의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 이 세 구절을 앞부분만 조금씩 옮겨 보았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말이야, 금일의 내 옷차림에 내가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나는, 제법 재미있어 보이는 새 모자 하나, 그리고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외투 하나를 마침내 개시한 것뿐이라고. 생라자르역 앞에서 만난 한 아무개는, 내 외투의 앞섶이 너무 벌어져 있다면서 여분의 단추 하나를 거기에다 더 달아야 하나는 사실을 내게 지적해 보임으로써 내 즐거움을 망치려 들지 뭐야(......) (<문체 연습>, 25쪽)

다른 이의 시선으로
오늘 버스 안 승강대 위 바로 내 옆에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코흘리개 애송이 중 한 녀석이 있었는데, 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자식 중 하나쯤 그냥 죽여버리고 말았을지도 몰라. 그 자식, 그러니까 대략 스물여섯에서 서른 살 정도 쳐먹은 이 덜떨어진 애새끼는, 딱히 깃털이 모조리 빠진 칠면조 목덜미 같은 그 길쭉한 목 때문이었다기보다, 오히려, 그 자식 쓰고 있던 모자에 달린 리본, 그러니까 가짓빛을 띤 끈 같은 것이 리본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유달리 내 화를 돋우고 있었어(......) (<문체 연습>, 26쪽)

객관적 이야기
어느 날 정오경 몽소공원 근처, 거의 만원이 되다시피 한 S선(요즘의 84번) 버스의 후부 승강대 위에서, 나는 리본 대신에 배배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 모자를 하나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정말로 긴 목의 소유자였다. 이 사람은 승객들이 오르거나 내릴 때마다 일부러 제 발을 밟았다고 옆 사람을 갑자기 불러세웠다(......) (<문체 연습>, 27쪽)



한 사건인데도 보는 방식, 즉 관점에 따라 조금씩 어조는 물론 의미가 달라지고, 맨 앞에서 소개한 ‘약기’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다른 정보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목이 긴 그 남자의 모자에 달린 끈 같은 것이 ‘가짓빛’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이렇게 같은 사건을 관점을 달리해서 쓰는 정도는 초보(?) 수준일 수도 있다. 크노의 99가지 실험적 글쓰기는 이런 기초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나 신선한 아이디어라 절로 경탄하게 된다. 이를테면 냄새와 맛처럼 글로는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까지 시도한다(‘냄새가 난다’, ‘무슨 맛이었느냐고’). 언어를 뛰어넘는 시도도 종종해서 ‘라틴어로 서툴게 끝맺기’를 하거나 ‘일본어 물을 이빠이 먹은’, ‘미쿡 쏴아람임뉘타’처럼 읽노라면 웃음이 터지는 글도 꽤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혀를 내둘렀던 점은 ‘수학적으로’ 변형을 시도하거나, ‘사이언스 픽션’으로 만들거나, 하나의 ‘게임’ 설명서로 빚어낸 부분이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정말 이 인간, 천재가 아닌가 싶어졌다(물론 내가 수학은 젬병이라 크노가 쓴 ‘수학적으로’ 이 글이 정말 수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박장대소하며 웃거나 참 기가 막힌 변주라고 생각한 부분 몇 구절을 더 옮겨 본다. 물론 모두 전문은 아니다. 궁금하신 분들을 이 책을 사보시라.



책이 나왔습니다
일찍이 수많은 걸작을 선보여 그 명성이 자지한 소설가 모씨는 유니크한 재능으로 한껏 빛나는 이번 신작 소설에서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수긍할 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인물들로만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제법 수수께끼 같은 한 인물을 자기가 타고 있는 버스 안에서 공교롭게 맞닥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연이 소설 전반을 가득 수놓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멋쟁이 중 단연코 최고인 어느 친구의 조언을 매우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인물과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문체 연습>, 36쪽)

허세를 떨며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각, 나는 S선 저 구불구불한 노선에 맞서고 있는 암소 눈의 위풍당당한 어느 버스에 쏜살같이 빠른 화살 모양으로 잽싸게 올라타고 말았다. 전투의 길목 위로 드리운 인디언 전사의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는 어떤 젊은이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목은 다리가 날렵한 기린의 것보다 길었고, 문제 연습 한 편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베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문체 연습>, 56쪽)


나는 고발한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고발하고자 한다,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토끼 소굴처럼 바글바글한 S선 버스를. 나는 고발한다, 정오라는 시간과 플랫폼의 폼을. 나는 고발한다, 이 젊은이의 젊음과 그의 목 길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그가 모자 주위에 두르고 있던, 하나가 아닌 리본의 실상을(......) (<문체 연습>,140쪽)

단카
버스가 오네
재즈 모 청년 타니
어이쿠 충돌
차후 생라자르 앞
이제 단추가 문제 (<문체 연습>, 93쪽)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문체 연습>, 91쪽)

게임의 규칙
이 게임은 주사위 두 개와 (접이식) 놀이판 한 개로 진행한다.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8과 4가 나오면 S선(84번) 버스에 오른다. 1과 7이 나오면, 17번(몽소공원)으로 간다. 이 외에는 만원이므로 1번(대기 번호)으로 가고, 이 외에는 포르트샹페레로 간다. 콩트르스카르프에서 되돌아온다. 7과 3이 나오면, 73번(목이 긴 젊은이)으로 가거나 37번(줄을 두른 모자)로 간다(......) (<문체 연습>, 146쪽)

다음 문제를 풀어보시오
조건은 다음과 같다.
a) 축약하여 문자 S로 지칭되는, 소위 버스라 일컬어지는 운송수단 하나;
b) 전술한 버스의 후부 승강대;
c) 이 버스에 실린 호모사피엔스의 대표자 일정수; 이중에서 선택한다(......) (<문체 연습>, 148쪽)


옮긴이의 해제에서는 이 <문체 연습>을 ‘에세이도 소설도 단편도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없고 콩트라고 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며 ‘흔히 말하듯 누보로망의 실험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하거나 과도하다고 느껴지는 글이라고 지적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이 책이 지금 알라딘에서는 ‘소설/시/희곡’장르로 분류되어 있던데, <문체 연습>은 그 모두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참으로 독특한 책이다.

레몽 크노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쓰기를 시도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크노는 “내가 <문체 연습>을 쓰게 된 것은, 실제로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바흐의 음악, 정확하게 말하자면, 플레옐관館에서 열린 연주를 회상하면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 이 열두 편의 에세이에 <정십이면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이 아름다운 다면체가 열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열 두 개의 얼굴,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앞서 내가 사례로 든 ‘당사자의 시선’, ‘다른 이의 시선’, ‘객관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문체는 곧 시선이다. 이 <문체 연습>의 99가지 색다른 문체 시도는 하나같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나를 비롯해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문체 연습>은 문체가 곧 하나의 시선임을 증명하면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독자에게 전한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크노의 이런 글쓰기가 ‘문학 전통 속에서 꾸준히 진화하며 고유한 역사를 갖게 된 문체, 아직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무형식의 문체, 문어보다는 입말로 자주 실현되는 문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문학의 언저리에서 좀처럼 진입하지 못하는 문체, 사라진 문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폐기될 위험에 처한 문체, 백지에서 벗어나 목소리로 발화되는 문체 등을 하나의 테이블 주위에 불러 아흔아홉 개의 의자 위에 앉힌다’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문체를 시선으로 바꿔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크노는 자신의 이런 글쓰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도는 순수한 “문체 연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문체 연습>, 157쪽) 말한다. 그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즐거운 문체 연습은 기존의 고루한 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 새롭게 보는 방식을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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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0-12-09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로 만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지요. 이 책은 더욱!

잠자냥 2020-12-09 10:1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정말이지 문학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감탄할 책이라고 믿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0-12-0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도를 한 것 자체가 신기하네요. 저라면 상상도 못했을텐데요. 저는 살면서 점점 더 제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가를 깨닫게 돼요. 문체 연습이 의도였다니.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봐요.

잠자냥 2020-12-09 10: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대부분 작가들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자기 문체를 고집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시도를 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99가지를 만들어냈어요! 다락방 님 레몽 크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 많이 쓰세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0-12-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서관에서 빌릴 예정입니다.

얼마나 재밌으려나... 쵝오의 낚시꾼 !!!

<레닌의 키스>는 찾아 두긴 했는디.

잠자냥 2020-12-09 10:46   좋아요 0 | URL
오, 아직 도서관이 문 (다시) 안 닫은 모양이군요!
레삭매냐 님에게도 흥미로운 책이되길 바랍니다!

Falstaff 2020-12-09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범대학 다니는 후배 아이들이, 약기略記 비슷한 걸, 버스에서 만난 사람에 관한 작문을, 글쎄 중간고사 시험문제로 내 준 교수가 있다고, 당시 복학생이었던 제게 신이 나서 떠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선생은 심지어 시험지에 ˝은사시나무 이파리를 투명 테이프로 붙여라˝는 문제까지 냈답니다. 그이가 오탁번 선생이었군요. 아, 오래 전입니다.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집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2-09 13:09   좋아요 0 | URL
오오오, 아주 재미난 문제입니다. ㅎㅎ 수업도 알찼을 거 같네요.
 
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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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이다. 한 가지 사건을 99가지 문체로 변주한 그 아이디어와 재치, 기지에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느라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떤 글에서는 박장대소, 어떤 글에서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글로 풀어냈을까 경탄했다. 전설이 되고도 남을 작품. 천재 레몽 크노. 내겐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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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7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0-12-07 0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차만으로도 흥미로워요. 역자의 공도 커 보이고요.

잠자냥 2020-12-07 09:13   좋아요 0 | URL
네 역자가 정말 애쓴 티가 납니다~

단발머리 2020-12-07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올해의 책이라니!!! 읽어야만 합니다! 너무 궁금해요~~~

잠자냥 2020-12-07 09:14   좋아요 0 | URL
문학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 누구나 좋아하실 거예요.
 
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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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많이 읽지는 않았다. 국가 체제가 특수하다 보니 그런 상황 아래 탄생하는 문학작품도 왠지 어떤 종류일지 뻔해 보인달까. 체제를 찬양하거나(그런 작품은 사실 다른 나라에까지 소개될 리 만무하겠지만), 완전히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아예 체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옌롄커의 <레닌의 키스>는 어느 쪽일까. 이 작품을 쓰고 TV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옌롄커가 이 책을 언급했는데, 직업군인이었던 그가 군대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어떤 작품일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읽다 보면 체제 비판을 이렇게 해도 될까 싶을 만큼 독한 구석이 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느 마을 이야기라고 하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원제는 ‘수활(受活)’이다. 이 제목 그대로, 한자를 병기해 우리말로 옮겨도 선뜻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 원제 그대로 서구에 소개했다면 누가 알아들으랴. 물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해 몇 장 넘기지 않고 ‘수활’의 의미가 나온다. ‘수활(受活)’ 즉, ‘서우훠’는 중국 북방 방언으로 허난성 서부 바러우산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즐거움, 향락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바러우산맥에서는 특히 ‘고통 속의 즐거움’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서우훠’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프랑스어판 번역자가 붙여, 유럽과 영미에도 소개된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도 꽤 그럴듯하다. 아니, 중국에서 왜 레닌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 레닌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레닌의 키스>는 이 두 가지 이야기, 즉 인민공사라는 거스를 수 없는 국가 체제를 벗어나려는 어느 마을과 ‘레닌’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주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우훠마을은 좀 특이하다.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잔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모두 외지로 나갔고, 여자들 또한 전부 외지로 시집을 갔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이런 상황이 이어졌지만 마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서우훠마을을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마오즈’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현재 할머니가 된 마오즈는 서우훠마을의 지도자이자,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도 아픈 기억은 여럿 있다. 마오즈는 열한 살에 홍군이 되었고,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가 되어 산길을 가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가 부러져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바러우산맥을 지나다 한 석공에게 구조되어 그가 살던 서우훠마을로 함께 오게 된 것이다. 그 석공과 결혼해 이 마을에 정착하지만 혁명에 참여했던 그녀는 이 궁핍한 마을에서 숨죽이며 사는 세월이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농사만 짓던 마오즈는 어느 날 다시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이 마을을 이끌어 혁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앞장서서 인민공사에 가입한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칠순 노인이 된 그녀는 왜 이제는 인민공사를 퇴사하겠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게다가 거의 반평생을 그 일에만 매달린 것 같다. 이 책의 한 가지 재미는 이렇게 서우훠마을과 마오즈 할머니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면서 중국의 체제가 지닌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점에 있다.

마오즈 할머니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류잉췌’, 즉 류 현장이 있다. 그는 중국에 대기근이 닥쳤던 1960년에 태어났으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이다. 오갈 데 없는 그를 사회주의교육학교 선생이 양자로 입양하면서, 그는 철저히‘사교의 아이’가 되어 어릴 적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 정치, 철학 등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양아버지가 알려준 출세의 비밀을 깨우친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관료의 길에 접어들어 빠르게 현장이 된다. 이제 그는 더 큰 꿈을 꾼다.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솽화이현. 그곳에는 공장도 광산도 없다. 그런데 산이 좋고 물이 맑으니 관광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 류 현장의 생각이다. 베이징에는 마오주석 기념관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도 자금을 마련해 러시아에 가서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것이다. 레닌의 유해를 솽화이현 훈포산에 안치하면 현의 관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할 테고 현도 순식간에 부유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일개 현장이 아닐 것이고 부위원장이나 부서기 정도도 아닌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세계적인 풍운아가 되어 있으리라!!! 이것이 류 현장의 포부이자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이 엄청난 기금은 어떻게 마련할까? 뜻밖에도 류 현장은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특기랄까 신묘한 재주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서우훠마을 묘기공연단을 조직해 세계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공연 입장 수입으로 레닌 유해 구매에 쓸 거액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아니, 그런데 서우훠마을은 장애인만 모여 산다는데 무슨 묘기인가 싶다. 이 마을에는 현재 주민 ‘백구십일 명 가운데 어른 아이 합쳐서 맹인 서른다섯, 귀머거리 벙어리 마흔일곱, 절름발이 서른셋. 한쪽 팔이 업거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 사람, 손가락 하나가 더 있는 사람, 키가 자라지 못한 사람 등 여기저기 불편하거나 모자라거나 불편한 사람들도 수십 명’이다. 그런 그들이 보여주는 묘기란 외다리로 빨리 달리기, 귀머거리 마 씨 귀에 대고 폭죽 터뜨리기, 외눈박이 외눈으로 바늘 꿰기, 앉은뱅이 아줌마 나뭇잎에 수놓기, 맹인이 예민한 귀로 소리 알아맞히기 등이다. 과연 이걸로 공연이 될까, 사람들이 몰려올까 싶은 걱정스러운 것 투성이다. 자, 이 묘기단이 그래서 흥행에 성공하는지 어떤지는 직접 보시라. 레닌의 유해를 사오게 되는지도.



이제 해방이 되어 공산당과 마오주석이 가장이 되었다고요, 집집마다 하나로 합쳐서 농사짓는 걸 호조조라고 불러요. 여러 호조조를 한데 합친 것은 합작사라고 한대요. 저는 우리 서우훠마을을 합작사에 가입시켜 각 가구를 하나로 조직한 후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하며 양곡을 분배하게 할 생각이에요. 저는 서우훠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합작사에 가입해서 서우훠 사람들이 천당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할 거예요. (<레닌의 키스>, 227쪽)


한때 혁명을 꿈꾸고 현 정부의 여주석이나 현장이 됐을 거라 당차게 말하던 젊은 날의 ‘마오즈’- 그녀는 인민공사에 마을을 가입시킬 때 마을 주민들에게 천당의 세월을 약속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되어서는 반혁명주의자가 되어 인민공사 퇴사만을 자신의 남은 생의 가장 큰 과업으로 삼고 있다. 그 어느 현에도 속하지 않고, 정부와 국가에서 나 몰라라 하던 시절의 서우훠마을은 몸이 불편한 이들만 모여 살았어도 말 그대로 기쁨이 넘쳤다. 고통 속의 기쁨, 즐거움이랄까. 그런데 혁명을 거쳐 인민공사에 가입한 후 강철재앙, 대흉년, 문화대혁명 등의 풍랑에 휩쓸리며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고단해지기만 한다. 아니 처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망가진다. 장애가 없는 ‘온전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와 수탈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 잔혹한 모습에는 아연해질 뿐이다. 그들을 과연 정말 온전한 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오즈 할머니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떠받들어졌어도 죽은 레닌의 유해는 러시아에서도 처치곤란, 골칫거리이다. 그러니 중국의 일개 현장이 마을 관광산업을 위해 그의 유해를 유치하려는 야심까지 품지 않는가. 신해혁명, 5·4운동, 문화대혁명 등등 혁명으로 이어진 중국 근현대사. 그런데 혁명은 정말 중국 인민에게 천당 같은 세월을 살게 해주었는가? 서우훠사람들은 묻는다. “제가 평생 할머니 말씀 잘 들었잖아요. 하지만 좋은 세월이 한 번도 없었어요.”(203쪽), “그 천당의 세월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줘요.”(424쪽). 이 절규는 아마도 옌롄커가 중국에 묻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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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4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치인들은 어디에서나 천당 같은
시절을 약속하지만 지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려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레닌의 키스> 제목만 보고 대뜸
샀는데 이거이 분량이 제법인지라
어딘가에 내팽겨쳐 두었네요 이론.

발저의 <산책자>처럼 당장 찾아내서
주말 내내 읽고 싶다는 고런 생각이
잠시 동안 들었습니다.

역시 책은 사거나 빌려서 읽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거군요.

잠자냥 2020-12-04 17:31   좋아요 2 | URL
ㅎㅎㅎ 맞습니다. 이 지상에 어디 천당 같은 세월이 존재하겠습니까. ㅎㅎ

책 잘 찾아서 주말에 읽으실 수 있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ㅎㅎ
 
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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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앗! 정말 재미나다. 처음엔 좀 심드렁했는데 읽을 수록 정말 쫄깃쫄깃. 한문장도 허투루 읽지 말 것! 가스라이팅과 리플리 증후군을 이렇게도 절묘하게 쓸 수 있구나 진짜 감탄이 나온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와 대프니 듀 모리에를 적절히 섞은 듯한 고품격 스릴러. 영화 나오면 꼭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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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2-04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도서관에 주문한 책이에요. 너무 기대되네요. 근데 제 생각엔 탄제린보다 탠저린이 더 제목으로 나을것 같은데...

잠자냥 2020-12-04 10:15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어요? ㅎㅎ 잘 하셨어요! ㅎㅎ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정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제목은 아마 탠저린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들이 이미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봅니다. ㅎㅎ 저도 이 책 검색할 때 늘 탠저린으로 한다는;;;
 
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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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자본을 동시에 비판한 한편의 희비극적 우화. 독특한 형식도 흥미롭고, 의외로(?) 700쪽이 넘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읽다 보면 아주 날카로운 비판에 통쾌함도 느껴진다. 옌롄커, 이런 작품을 쓰다니, 군대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중국에서 추방해 버리고 싶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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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0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습니까? <풍아송>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읽고 에잇, 너하곤 끝이다, 선언했는데, 이거 또 솔깃해지네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02 10:23   좋아요 0 | URL
전 중국소설을 딱히 안 좋아해서 여태 연롄커 작품을 안 읽다가 이건 좀 혹해서 읽었는데요. 이 작품 때문에 다른 작품도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ㅎㅎㅎ 일단 좀 소재가 재미나요. 레닌의 유해를 사오겠다고 ㅋㅋㅋㅋㅋ

파이버 2020-12-0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에서 추방해 버리고 싶을 듯˝하다니 급 궁금해집니다ㅎㅎ

잠자냥 2020-12-02 13: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 책만 봤을 때는 정말 그럴 거 같아요!

Falstaff 2020-12-0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넣으려는 순간! 잠자냥님 영업실패!!
크.... 정가 2만5천원, 판매가 2만2천5백원. 게다가 어쨌든, 이젠 끝이다, 한 번 선언했던 이. 살포시 포기 했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02 14:49   좋아요 0 | URL
네 좀 비싸죠? ㅎㅎㅎ 저도 알라딘이 아니라 예스24에서 쿠폰 모아 샀습니다. ㅎㅎㅎㅎ

레삭매냐 2020-12-0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거의 나오자 마자 사긴 샀는데
두터운 두께 때문에, 못 읽고 있네요.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 :>

내년에나 한 번 읽어 볼까 합니다.

잠자냥 2020-12-03 09:31   좋아요 0 | URL
두꺼운 데 잘 읽혀서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내년에 꼭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