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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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비극을 겪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에 작가가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글감으로 소비하기 위해? 그들의 고통을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에 독자인 나마저도 공감은커녕 마냥 겉돌게 된다. 타인의 고통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이렇게 보여주고자 했다면 성공한 것 같지만 뭔가 불쾌한 뒷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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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1-2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이 평만 읽어도 짜증이 나서 이 책이 읽기 싫어지네요. 이 책 집에 있는데...

잠자냥 2025-11-21 10:3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진짜 꾸역꾸역 읽었는데... 다락방 님 취향도 아닐 거 같음;;
암실문고 지금까지 읽은 것 중엔 이게 제일 별로였어요... (근데 빨리 읽고 팔아! 아직 3천 5백원은 받을 수 있어!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11-21 10:44   좋아요 0 | URL
한국에 2월에 가는데요 ㅠㅠ

잠자냥 2025-11-21 12:08   좋아요 0 | URL
그때 팔면 소주 한 병 값은 받지 않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 소주는 니가 사라 순댓국은 내가 살게ㅋㅋㅋㅋ(아 아니구나 ㅋㅋㅋ 요즘 밥집에서 소주 한 병 5천원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11-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100자편 좋습니다. ^^

잠자냥 2025-11-21 15:26   좋아요 0 | URL
음 근데 이 책 좋다고 평한 분들도 많아요~ ㅎ
 
미시마 유키오 - 우국·한여름의 죽음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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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가득한 공간에서는 숨 막혀 죽을 수도 있듯이, 여기 수록된 단편들은 하루에 서너 개 이상 읽기는 무리이다. 그 농밀한 아름다움에 취해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미와 피, 죽음의 그림자 짙은 이야기들.... 첫 단편은 무려 열여섯에 쓴 작품이라니, 미(美)시마 유키오 그는 역시 미(美)친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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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11-22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망설이다 잠자냥님 얘기로 다시 구입 쪽으로...
 
쓰기라는 오만한 세계 - <파리 리뷰> 인터뷰집: 세계적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에 관한 모든 것 파리 리뷰 인터뷰 4
파리 리뷰 엮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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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파리리뷰 인터뷰) 1~3권에 이어 이 책이 거의 마지막 권이자 종결자인가?! 드디어 이 시리즈 다 읽었다. 쓰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쓰지 말라, 글쓰기만큼 답도 없고 보답도 없고 결론도 없는, 고통스러운 세계는 없다. 그러나 쓰기로 했다면 계속 써라. 결국 이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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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19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웃겼다. 진짜 빵 터졌네 ㅋㅋㅋㅋ

2부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중 “섹스 장면 쓰는 것을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런 이유로 저는 그토록 많은 미국 소설에서 보이는 불필요할 정도의 노골적인 성 묘사가 싫습니다. 결국에는 진정한 성애를 유치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맨티사』Mantissa는 부분적으로 그런 풍조를 조롱하기 위해 쓴 책이며 토마스 하디와 알랭 푸르니에, D. H. 로런스, 헨리 밀러 같은 불쌍한 소설가와 수많은 작가가 이 포악하고 에로틱한 악령을 등에 지고 다니며 고생한다는 사실을 조롱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이 악령과 돈이라는 악령, 즉 ‘돈을 많이 벌면 분명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은 남성 작가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요소입니다. -존 파울즈

바로 아래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만족스럽고 풍요로운 성생활을 누려왔는데, 그 부분을 왜 빼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헨리 밀러

독서괭 2025-11-19 21: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헨리밀러 승?! ㅋㅋㅋ

잠자냥 2025-11-20 09:06   좋아요 1 | URL
웅🤣

건수하 2025-11-20 09:31   좋아요 2 | URL
저 두 개만 보면 헨리 밀러 말이 재밌는데 ㅋㅋ 불쌍하지도 고생하지도 않는다는 ㅎㅎ
근데 그가 쓴 섹스신은 싫었어요 ㅎㅎㅎ

저도 예전부터 미국 소설과 영화에 (하루키 소설에도) 왜 그렇게 섹스가 나와야 하는가 불만이었습니다.

잠자냥 2025-11-20 09:47   좋아요 1 | URL
네 이 챕터에서 인터뷰에 응한 작가들은 대다수가 섹스신을 자세히 묘사하는 걸 꺼리더라고요. 대부분의 작가들이 섹스 장면을 장황하게 자세히 묘사하는 걸 얕은수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어요. 마거릿 애트우드하고. 토니 모리슨 말에 역시! 했는데요. 역시입니다. 직접 읽어보세요.

“섹스”라는 말이 그저 성행위를 뜻한다면, 그러니까 “땅이 흔들렸다” 같은 묘사를 뜻한다면 글쎄요, 전 그런 장면은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순식간에 희극이나 허세나 과도한 은유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가슴은 사과 같았다”와 같은 표현 말이에요. 그러나 ‘섹스’는 누구의 신체 어느 부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두 사람의 관계, 방 안의 가구나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 전후에 나눈 말, 감정이죠. 사랑의 행위, 욕망의 행위, 증오의 행위, 무관심의 행위, 폭력의 행위, 절망의 행위, 조작의 행위, 희망의 행위예요. 그런 것들이 섹스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 마거릿 애트우드

섹스는 쓰기 어려운 소재인데, 글로 쓰면 충분히 섹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섹스에 대해 쓰는 유일한 방법은 간단하게 쓰는 겁니다. 독자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본문에 투영하게 하는 거죠. -토니 모리슨

건수하 2025-11-20 09:54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본 섹스신은 거의 남자 작가가 쓴 것이라서 단순히 많이, 오래 나오는게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불쾌한 부분이 있다보니 빈도가 많은게 더 맘에 걸렸을 수도.

그나저나 제가 최근에 읽은 <아웃랜더> 작가가 I give you body 라는 책을 썼는데요, 부제가 ‘독자를 사로잡는 섹스 신 쓰기‘ 라서.. 급 궁금해지네요. <아웃랜더>에도 섹스신이 꽤 자주 나왔는데요 저는 그냥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봤기 때문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근데 드라마 섹스신에 대해서는 호평이 많더라고요. 전 안 볼거지만 ㅋㅋ

잠자냥 2025-11-20 09:58   좋아요 0 | URL
강 건너 불구경건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자를 사로잡는 섹스 신 쓰기‘ 이거 다락방이 좋아할 거 같은데..... 다락방 요즘 1등하느라 넘 바쁘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5-11-20 09:59   좋아요 1 | URL
그 책 전에 다락방님이 얘기하셨던 거 같거든요.
읽진 않았어도 알고 계실겁니다... 어쩌면 갖고 계실 가능성도 있고 ㅎㅎ

다락방 2025-11-20 17:22   좋아요 1 | URL
얘들아..

독자를 사로잡는 섹스신 쓰기 그거 벌써 읽고 구매자평도 제가 썼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가 아웃랜더를 좀 좋아했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자평 뭐라 썼나 지금 찾아보고 왔는데 별 셋 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11-27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읽고 싶어요> 체크하고 갑니다.
할말이 많지 않은 나를 원망하며ㅋㅋㅋㅋ
애트우드, 토니 모리슨이 고수죠. 😉

잠자냥 2025-11-27 09:52   좋아요 1 | URL
그리고 조용히...... 써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
그 분야(?)를...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11-27 09:5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그래도 될까요? 🥵 허락 많이 받는 스타일이라… 잠자냥님이 허락하면 한 번 써 볼 용의가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5-11-27 09:55   좋아요 1 | URL
기다리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기꾼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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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에게 고도란 무엇인가. 여기서도 고도를 찾네?! 돈이라는 위력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을 한바탕 풍자. 생생한 캐릭터와 대사가 빛난다. 한데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섭섭한 사람은 나뿐인가. 두 사기꾼이 한탕에 성공한 후 몰락, 미나르가 줄행랑치길 바랐던 나야말로 못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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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굳이 다시 읽은 까닭은 순전히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릿속에서는 책을 괜히 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원작이 있는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겼을 때 책보다 좋았던 적은 극히 드물다(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다). 나의 상상력과 해석이 당신(감독)의 그것과 많이 다르기에, 그 간극에서 비롯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면에서 원작과는 참 다른, 그래서 실망스러웠던 작품이다. 물론 원작하고 똑같이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비틀었어야 했을까?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셸리의 원작과 참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세상을 보는 방식이 원작자인, 여성 메리 셸리와는 애초부터 달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빅터와 그의 가족, 특히 아버지에 관한 묘사이다. 원작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내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부모와의 관계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사촌이자 훗날의 약혼자가 되는 엘리자베스와의 사이, 그리고 절친한 벗 등 주위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상처나 오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물론 열일곱의 나이에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이 빅터를 생명과 죽음의 원리에 탐닉하게 만들기는 한다). 무엇보다 소설 속 빅터의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사랑 넘치며 끝까지 아들 빅터를 믿고 응원해주는 자상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영화 속 빅터에게는 이런 관계가 전무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는 한데 이 어머니는 힘이 없으며, 냉혹하고 차가운 아버지는 빅터를 단지 자신의 의사라는 가업을 물려받을 존재로만 인식, 빅터를 몰아붙이기만 한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내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아내를 닮은 장남 빅터를 차별하고 은근히 혐오한다. 반면 자신을 닮은 빅터의 어린 남동생 ‘윌리엄’은 한없는 애정으로 대한다. 때문에 빅터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의심하며(윌리엄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를 의사인 아버지가 방치해 일부러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 이 미움과 증오는 영화의 빅터를 재능은 있지만 오만하고 비뚤어진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 데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자란 빅터는 결국 생명과 죽음마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인간이 되어 범죄자를 데려와 실험하고 여기저기서 시체를 끌어 모아다 실험의 재료로 쓴다. 이런 빅터에게서 일말의 도덕적 고뇌나 죄의식, 윤리, 양심의 가책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죽음을 정복하겠노라는 그 야망으로만 불탈 뿐이다.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이런 인간 주변에는 비슷한 인간이 꼬인다. 원작에서는 없는 인물 ‘하인리히’(크리스토프 왈츠)가 빅터의 연구에 흥미를 갖고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겠노라며 접근한다. 원작에서 빅터는 몇 년 동안 오로지 혼자 실험실에서 고대 연금술사들의 오컬트적인 이론을 독파하고 화학적 실험을 거듭하는데 이것과는 꽤 다른 지점이다. 하인리히는 굳이 왜 빅터를 후원하는 것일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에게도 죽음을 정복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이유-질병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앓는 질병도 참 상징적이긴 한데, 두 독버섯 같은 인간이 서로의 독을 알아본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야심과 욕망에만 불타는 두 인간에게 생명이나 죽음을 인간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대한 윤리나 도덕, 죄의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단순한 존재인가?



인간은 그렇게 강하고 덕이 높고 훌륭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어떤 때는 악한 원칙만 물려받은 자손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떤 때는 고상하고 신성한 생각만 하는 존재 같기도 했지.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영화에 비해 원작의 빅터는 여러 차례 고뇌와 갈등을 겪는다. 처음에는 그 또한 탄생과 죽음의 비밀을 밝히고 말겠다는, 그리하여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겠다는 야망에 넘쳐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험을 하는 동안을 비롯해 실험이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의 연구가, 그런 선택이 그릇된 것은 아닌가 여러 번 의심하고 꺼림칙해한다.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꺼림칙해할 줄 아는 그 마음, 그것이 인간을 더 인간다워 보이게 하지 않는가? “내 마음이 불행으로 오염되어, 세상에 널리 도움이 되겠다는 밝은 꿈이 나 자신에 대한 우울하고 편협한 회상으로 바뀌기 전”을 빅터는 그리워하기도 한다.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서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따금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를 보았을 때, 움직이고 말하는 그 끔찍한 거구를 보았을 때 가슴이 쓰려서 공포와 증오의 감정으로 바뀌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메리 셸리는 빅터라는 인물의 복잡한 심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그의 오만함, 광기와도 같은 열정도 어느 지점에선 이해가 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괴물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에게 연민마저 든다. 게다가 그의 고통은 자기가 창조한 괴물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때마다 더더욱 커져간다. 내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가 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창조자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엘리자베스는 그 엘리자베스가 아니었기에
그러나 영화 속 빅터라는 인물에게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특히 그의 이기심, 자기의 욕망 앞에서는 윤리도, 죄의식도 도덕적 망설임도 없는 뻔뻔함에는 경멸의 감정까지 솟구치는데, 그가 ‘엘리자베스’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런 감정은 절정에 달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원작과 다른 기묘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이다. 원작에도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성은 등장한다. 그러니까 빅터의 사촌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꿉동무이자, 일찌감치 신붓감으로 점찍은 여성. 빅터와 엘리자베스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자 연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엘리자베스를 원작과 달리 동생 윌리엄의 약혼자로 둔갑시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약간 삼류로맨스....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동생이 약혼녀를 소개하겠다면서 이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형 빅터를 찾아왔을 때부터,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함께한 식탁에서 도도한 표정으로 빅터의 생명창조설 이론에 살짝 반기를 들면서 냉소를 머금은 조롱 비슷한 미소를 지을 때부터, 관객은 모두가 다 예상하게 된다. 아, 저 둘이서 또 사랑에 빠지겠구먼, 동생의 약혼자, 약혼자의 형을 사랑하는 금기 아닌 금기의 로맨스가 펼쳐지겠구먼, 그런데 둘만 안타깝겠구먼....

실제로 영화는 그렇게 전개된다. 빅터는 동생의 약혼자, 이 당돌한 여자에게 매혹당해 그녀를 갖고 싶어 한다. 엘리자베스가 마음을 줄 듯 말 듯 하기에 더 애가 탄다. 여기서도 빅터는 동생 윌리엄에 대한 죄책감이나 죄의식 등은 없다. 그냥 탐이 나니까 빼앗고 싶을 뿐이다. 시체를 누덕누덕 기워서라도 괴물이라도 상관없으니 생명을 창조하면 그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엘리자베스라는 여성도 좀 신기하다. 약혼자인 윌리엄과는 생김새부터 정반대인 형 빅터에게 처음부터 끌린 것 같은데(망나니 같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오만방자형의 전형적인 나쁜 놈에게 끌리는 심리),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또 그를 경멸하듯이 내치기 때문이다(그런데 왜 또 같이 웃고 싸돌아 다니는지 원....). 사실 이 여자가 결국 빅터를 선택하지 않는 지점에는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하인리히’라는 보이지 않는 손.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냥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남자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메리 셸리의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그냥 전형적인 여자 그 자체인 캐릭터이다. 

엘리자베스를 동생의 애인으로 둔갑시키고, 게다가 ‘괴물’을 마주하게 하는 존재로, 그리하여 ‘괴물’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대상으로 바꾼 것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가장 다른 지점이면서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망작으로 만든, 좋지 않은 각색이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네 남자(빅터-윌리엄-하인리히-괴물) 사이에서 갈등을 촉발하는 존재이면서도 그 갈등을 능동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으로만 그려진다. 게다가 이 엘리자베스가 ‘괴물’을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같이 보던 집사2에게 영화를 보다 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지금 저 여자가 괴물한테 느끼는 감정이 호기심이야? 두려움이야? 공포야? 연민이야? 애정이야? 애정인 것 같은데 그게 사랑이야? 아니면 반려동물한테 느끼는 그런 애정이야?”(아는 분은 제보 바람). 괴물에게 “나를 데려가 달라”라고 말할 때도 타자를 이해하는 또 다른 타자의 동질감에서 비롯한 호소라고 받아들여보려고 애를 써 봐도 그 감정선이 뜬금없어서 생뚱맞아 보이기만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처럼 또 한 번 괴물과 인간 여성 간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영화에 비하면 이 작품의 로맨스는 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인간들은 부와 결합된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도 배웠어.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은 존경할 거야. 하지만 둘 중 하나도 없으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낭비해야 하는 부랑자나 노예로 간주되었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나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돈이나 친구, 재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 게다가 내 외모는 끔찍하게 추악하고 혐오스럽지. 심지어 내게는 사람의 본성도 없어. 나는 사람보다 더 민첩하고, 더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고 살 수도 있어. 또 심한 더위나 추위를 견딜 수 있지. 내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지. 주위를 둘러보니, 나 같은 존재는 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괴물이란 말인가? 모든 인간이 도망치고, 모든 인간이 부인하는 지상의 오점이란 말인가.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눈이 멀어야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타자는 타자의 슬픔을 알아보건만
그럼에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장면들이 있다. 괴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부분이다. 원작을 읽을 때도 괴물의 고통은 빅터의 그것보다 더 절절하게 와닿는다. 영화는 원작의 이 장점을 잘 살린다. 괴물은 추악하고 못생긴, 게다가 태생부터가 혐오스러운 존재이기에 창조자인 빅터마저도 그 기이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달아난다. 그러나 그런 괴물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는 영화에서나 원작에서나 늙은 노인, 그것도 눈먼 노인이다. 눈이 멀어 그는 괴물의 형체, 겉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의 목소리나 행동(남을 돕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으로 괴물이 다정한 친구, 요정, 님프 같은 존재라고 인식한다. 노인 또한 여러 의미로 타자이다(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병들고 약한, 노인이라는 점에서).

영화에서 괴물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기반으로 한 애정을 느끼는 존재도 ‘엘리자베스’라는 여성, 또 다른 타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셸리의 원작에서 말하듯 ‘그들의 눈은 치명적인 편견에 가려서,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친구를 보아야 하는데 혐오스러운 괴물만’ 본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통,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또 다른 존재가 전무한 외로움의 고통,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끝낼 수도 없는 형벌과도 같은 삶. 이 삶을 그나마 견디고자 괴물은 자신과 닮은, ‘추악하고 못생긴 여자 괴물’을 창조해달라고 빅터에게 말한다(영화에서는 ‘동반자’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괴물의 이 간절한 소망, 자기처럼 결함이 있는 존재, 같은 종족이라서 편견 없이 자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줄 또 다른 타자, 그리하여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줄 존재의 탄생은 이뤄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타자인 괴물은 스스로 죽지도 못한 채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사라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메리 셸리는 그 자신이 타자였기에 타자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고통, 그 영원한 형벌과도 같은 삶의 모순을 괴물이라는 타자를 창조함으로써 폭로했다. 그런데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그 타자의 고통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아버지를 죽이고(넘어서고) 싶었던 빅터와 또 그런 빅터를 죽여야만 하는 괴물의 이야기, 타자의 소외와 슬픔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프랑켄슈타인>은 나에게는 실패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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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1-17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를 보며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괴물한테 그대로 주는 걸 보며 (공부 못 한다고 때리는) 원작도 이런건가 싶었어요 근데 완전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읽고 있어요😆 저도 괴물을 처음 보고 오묘하게 반하는? 연민을 느끼는? 사랑에 빠지는? 엘리자베스가 이해가 안 갔어요. ˝갑자기???˝이런 느낌만 들었어요

잠자냥 2025-11-18 09:38   좋아요 1 | URL
영화만 본 분들은 아마도, 원작을 참 단순하게(?) 생각할 것 같기는 해요. 대부분의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좀 괴물의 괴물다움에만 초점을 맞춰서 공포 영화로만 소비되는 거 보면 저세상에서 메리 셸리가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엘리자베스 정말 갑분사... 갑자기 분위기 사랑에 빠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특히 그 지하에 감금된 괴물하고 첫 만남에서요.... 전 약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윌리엄-빅터 형제에 비해 괴물이 겉으로는 남성성이 두드러지잖아요? 그래서 저기에 급반한 건가? 싶었다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11-17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리자베스를 그런 식으로 그려냈다고 하니 좀 실망이네요. 저는 책만 읽었는데... 아주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괴물의 말과 행동에 사로잡혀서 엘리자베스는 잘 기억도 안 나고 그렇습니다.
메리 셸리가 워낙 천재이고 그 작품의 무게가 무겁기도 했겠지만, 결국 감독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그린 것 같아요. 영화를 패쑤하게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드네요.

잠자냥 2025-11-18 09:46   좋아요 0 | URL
원작에서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긴 하죠. 빅터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나중에 그 사랑 때문에 크게 고통을 겪게 하는 존재이니까요. 근데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와 사촌이고 어릴 때부터 약혼한 사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인물로만 표현하기엔 심심하다 싶었던가 봅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부친살해-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려면 엄마를 닮은-엄마와 동일인물이 엘리자베스 역할도 했다고 해요-엘리자베스가 빅터의 여자로 나와야만 괴물의 빅터 살해 욕망 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이 되니까요... 아무튼 원작의 괴물이나 영화의 괴물은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답긴 합니다.

서기장 2025-11-18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서재 글이 따로 올라와서 차분하게 읽어봤는데 비평문 형식의 글을 잘 감상했습니다. 마침『프랑켄슈타인』 원작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의 평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구나 짐작했어요. 어쩌면 서재님의 말대로, 원작을 따라가는 작품은 없나 봅니다. 메리 셸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두서 없지만, 잘 감상하고 갑니다. 이 불운한 프랑켄슈타인에게도 행운을 빌어줘야겠네요.

잠자냥 2025-11-18 09: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은 원작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 호불호도 있겠지만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대체로 극찬받고 있으니까요. 감상은 늘 주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원작을 워낙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영화에서 느낀 아쉬운 점을 좀 끼적여봤습니다. 델 토로의 다른 작품인 <나이트메어 앨리>는 제가 영화부터 보고 영화가 매혹적이어서 원작까지 찾아 읽었던 작품인데, 이건 또 반대로 영화가 더 좋다고 느꼈어요. 결국 뭘 먼저 접하느냐의 차이일까요? ㅎㅎㅎ

종이 2025-11-18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두 작품을 보았습니다.
원작이 가진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고전의 힘이겠죠. 델 토로 감독은 아마 이 소설에서 부자 관계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확인하고 영화도 그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나봐요. 어릴 때부터 이 소설을 읽고 좋아했으며 영화화 된 작품들에 불만스러워 했고 본인이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고 저도 내용상으로는 의아함이 좀 있었습니다. 다들 느끼시는 것 같던데 엘리자베트가 좀 그랬죠. 이전에 곤충에게 보인 관심이 예사롭지 않고 대화에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전체 시간의 압박 때문인지 피조물에게 너무 빨리 밀착감을 느낀다는 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배에서 두 인물의 마무리 장면이 역시 쉽게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고요.
하지만 피조물 캐릭터는 아주 좋았습니다. 전쟁터의 잔해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영원한 추방과 고통 속에 남겨진다는 점, 그것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원작에 없던 인물인 무기상의 지원으로 가능해 진다는 점 등, 현대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원작과 달리 피조물이 못 볼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은 외모를 가졌고 불필요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점에서 감독의 의도가 잘 이해 되었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못 봤는데 찾아 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5-11-18 15:17   좋아요 0 | URL
네, 원작이든 델 토로의 영화든 두 작품 모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이므로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엘리자베스는 초반엔 곤충학자처럼 나오기에 저 여자도 과학자로서 빅터에게 뭔가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기대를 했는데 곤충과 관련한 이야기도 그냥 흐리멍덩해지고 말씀하신 것처럼 피조물에게 느끼는 감정이 너무 급작스러워서(시간의 압박! ㅋㅋㅋㅋ)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 빅터와 피조물의 급화해 마무리씬도 마찬가지고요. <스타워즈>의 “아임유어파더”가 갑자기 떠올라서 혼자 빵 터지기도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피조물은 눈이 참 예쁘더라고요? 저는 영화 보면서 저 배우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실물은 잘생긴 사람을 썼나 보다 했습니다. (나뭇잎이 떠내려가는 걸 지켜보는 장면 등) 여러 의미로 아름다운 캐릭터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원작의 배경보다 좀 더 현대로 시대 배경을 선택하고 하인리히가 무기상이었다는 점이나, 전쟁터의 시체를 끌어다가 피조물을 만든다는 점도 색다른 시도이긴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저는 그런 설정조차도 남자(델 토로) 창작자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와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크구나 싶었지만요. ㅋㅋㅋ

델 토로의 <나이트메어 앨리> 꼭 보세요. 저는 <프랑켄슈타인>보다는 이쪽이 더 좋았습니다. 기이한 존재들도 더 많이 나오고요. ㅎㅎㅎ

독서괭 2025-11-19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엘리자베스를 동생 약혼녀로 ㅠㅠ 가정사정은 또 왜그렇게 바꿨을까요. 엘리자베스 캐릭터가 젤 별로네요. 그래도 잠자냥님 리뷰는 재밌다!

(그런데 왜 또 같이 웃고 싸돌아 다니는지 원….) => 빵 터짐 ㅋㅋㅋㅋ

프랑켄슈타인은 정말 매력적인 작품 같아요. 그 시대에 여성 작가가 어린 나이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놀라워요. 진짜 천재인 듯..

잠자냥 2025-11-20 10:28   좋아요 1 | URL
사실 원작에선 동생들이 빅터에 비해 참 어린데 말이죠.... ㅋㅋㅋㅋㅋㅋ
나중에 프랑켄슈타인은 음...여자 감독 그러니까 <서브스턴스> 만든 코랄리 파르자 감독 같은 사람이 다시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색다르고 재미나게 만들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