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한 권의 책만으로도 홀딱 반해버린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두 번째로 읽은 작품은 <판사와 형리>이다. 제목만 보면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는다. 왠지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작품 중 첫 번째인 ‘판사와 형리’는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첫 페이지부터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은 스위스 베른 시의 유능한 형사인 슈미트 경위.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자신의 푸른 메르세데스 안에서 발견된다. 그 유능한 부하직원을 잃은 베르라하 경감이 사건을 맡게 되고, 동료인 찬츠와 함께 수사를 진행한다. 이윽고 슈미트의 시체가 발견된 차 옆 길가에서 총알 하나를 줍는다. 베르라하는 죽은 슈미트의 집에도 찾아가고, 그의 일기에서 ‘G.’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한 글자를 발견한다. 이 두 가지 단서로 베르라하는  살인자를 쫓기 시작한다.

‘추리소설’임을 알고 읽기 시작했던 터라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데, 이 작품은 어쩐지 좀 특이하다. 대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탐정이나 수사관, 형사 등이 기막히게 잘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꽁꽁 숨겨진 단서를 발견하고, 그 단서를 교묘하게 엮어서 아주 썩 훌륭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 단서와, 단서를 엮어서 빚어낸 과정이 정교하면 할수록 그 이야기에 열광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판사와 형리’ 및 뒤에 실린 ‘혐의’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놀랍도록 잘 짜인 이야기구조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꽉 막힌 사건에 답답해 하다가 어느 순간(주로 끝 부분에 이르러) 와! 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추리(탐정)소설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이 늙은 수사관인 베르라하가 첫 번째 단서를 발견해내는 과정도 매우 싱겁다. 죽은 슈미트의 메르세데스 근처를 조사하다가 그냥 ‘우연히’ 총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우연’이라는 키워드는 <판사와 형리>에 실린 두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한다. 뒤렌마트가 보기에 이 세계는 계획보다는 ‘우연’의 지배를 받고 있다. 때문에 ‘판사와 형리’, ‘혐의’ 두 작품에서 범죄를 추적하는 노수사관 베르라하 역시 우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사관은 대충 이리저리 쏘다니는데, 우연히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싱거운 이야기인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말하는 ‘우연’은 그런 작은 우연-그러니까 뜻밖에 총알을 발견하는-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우연을 의미한다. 베르라하는 인간이 타인의 행동 방식을 자신 있게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나아가 만사에 개입해 작용하는 ‘우연’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죄는 폭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 노수사관과 40여 년 전에 불꽃 튀는 토론을 벌인 남자, ‘가스트만’은 ‘인간관계의 뒤얽힌 상태야말로 인식조차 되지 못할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많은 범죄가 처벌되지 않은 상태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그때 가스트만은 베르라하에게 호언장담한다. 자네 코앞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자신의 범죄를 절대로 입증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자,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가스트만’의 이름에서 문제의 이니셜 ‘G’ 추측해낼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 전 터키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나눈 인간 본성과 범죄 심리에 관한 두 사람의 토론이 오랜 세월이 지나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한 스위스 형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일까? 궁금증을 해결하는 일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우연은 두 번째 사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혐의’에서 베르라하는 ‘우연히’ 펼쳐 든 <라이프>지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어떤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이 늙은 수사관에게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런 설정도 흥미롭다. 죽음을 앞둔 수사관이라!). 전편인 ‘판사와 형리’에서 이 사실이 언급되어 그는 급하게 수술을 받게 되는데, 수술 후 입원 치료를 받던 중 한 잡지에 실린 사진을 그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훙거토벨이 주의 깊게 바라보는 모습을 베르라하는 놓치지 않는다. 훙거토벨의 얼굴에 스쳐가는 온갖 미묘한 표정을 감지한 베르라하는 수사관 특유의 집요하고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질문한다. 무슨 이유로 그 한 장의 사진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훙거토벨은 사진 속 인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과 집시를 가둔 수용소 안에서 마취 없는 수술을 집행했던 고문광 넬레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넬레는 어쩐지 현재 취리히에서 버젓이 고급 병원을 운영하는 어느 의사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이 막연한 ‘혐의’만으로 베르라하는 그 의사의 뒷조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범죄 현장도, 살인도, 살인자도 없다. 단지 혐의만으로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혐의만으로도 어떤 범죄(자)를 쫓는 일은 정당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베르라하도 품고 있다.
 

“혐의란 끔찍스러운 것이며 악마한테서 나오지. 어떤 혐의를 품는 것처럼 사람을 고약하게 만드는 게 없다네. 그래서 내 직업을 곧잘 저주했네. 모름지기 우리는 혐의의 책동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 (‘혐의’, <판사와 형리>, 138쪽)


그럼에도 이 혐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힘겹게 현장을 오가는 늙은 수사관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판사와 형리’에서 ‘G’라는 이니셜과 40여 년 전,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겠다는 한 미치광이의 선언,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른 자가 신분을 숨기고 승승장구하는 의사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 등으로 은퇴를 앞둔 시한부 인생의 노수사관은 ‘즐기듯’ 범죄를 저지르는 미치광이들의 뒤를 기꺼이 쫓는 것이다. <판사와 형리>의 매력은 바로 이런 미치광이들이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 동기를 파헤치는 것과 그 동기를 파헤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서라면(비록 몇 십 년이 지났을지라도!) 기꺼이 자기 한 몸을 내던지는 정반대에 선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기분이 내키면 멋대로 선(善)을 연습하고, 또 기분이 달라지면 악(惡)을 사랑하는 그런 인생’(77쪽)을 살아갈 수 있다. 가스트만이나 넬레처럼 악 그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악을 평생 뒤쫓는 베르라하 같은 인간도 있는 것이다. 베르라하는 부와 명성 뒤에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냉혹한 범죄자 가스트만의 본질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 스스로 말하듯이 가스트만을 ‘심판할 유일한 판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재미나게도 베르라하가 고른 형리는 ‘법’의 범위를 벗어난다. 결함 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이기에 악을 심판하고 그것을 처단하는 형리가 때로는 ‘법’의 범위를 벗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우연’이 빚어낸 심판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악과 선을 넘나들 수 있다. 뒤렌마트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독일 땅에서 벌어졌던 일은 특정한 조건만 갖춰지면 어떤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조건들이야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인간, 어떤 민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 인간 사이에는 오로지 한 가지 차이밖에 없다는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차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유혹에 빠진 자와 그것을 모면한 자라는 구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혐의’, <판사와 형리>,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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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27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열광을 했는데요, 좀 지나서 <약속>을 읽고는 아예 뒤집어졌답니다. ㅋㅋㅋㅋ
세상에 그런 추리소설도 있는가 싶었습지요. <약속>도 놓치지 마세요.

잠자냥 2020-08-27 17:07   좋아요 1 | URL
예! <약속>도 찜 완료입니다!
이 사람 증말 천재입니다. 천재. ㅎㅎ

비연 2020-08-2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거 어제 받았는데.. 좀 이따 읽을까 했건만. 잠자냥님 페이퍼 덕분에 다음 책으로. ㅋㅋ

잠자냥 2020-08-28 12:35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좋아하시는 비연 님께 이 작품은 약간 뭔가 좀 허전한(?) 심심한(?) 그 무엇이 느껴질 법도 합니다만, 좀 색다른 추리소설로 읽힐 거예요.

coolcat329 2020-08-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폴스타프님 글 읽고 이 책과 <약속> 찜해둔 책인데 이번엔 정말 구입해야겠습니다.

Falstaff 2020-08-28 12:40   좋아요 1 | URL
이것으로 쿨캣님도 대머리 뚱보 할아버지의 팬으로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28 12:35   좋아요 1 | URL
쿨캣 님은 원래 대머리 뚱보 할아버지 팬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ㅋㅋㅋㅋ

coolcat329 2020-08-28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네! 맞습니다. 근데 잠자냥님의 팬이기도 하지요.☺☺☺

잠자냥 2020-08-28 2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__^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포이에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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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문학과 ‘외국 문학에서의 그리스도교’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펼쳐진다. 엔도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될 뿐만 아니라 그가 소개한 모리아크, 그레이엄 그린, 지드, 쥘리앵 그린, 베르나노스 작품도 한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모이라> 꼭 읽어 보고 싶다! 엔도의 유머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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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뜨 1 창비세계문학 81
샬롯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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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 이 작품으로 극복해 보려 했는데, 역시 나랑 안 맞는 작가인가 나는 왜 이 책이 이다지도 지루한가. 루시 캐릭터는 확실히 남다른데, 그녀가 관찰하는 존, 폴리, 지네브라 등은 너무 전형적 인물들이고 그들의 로맨스도 전형적이다. 2권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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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26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분 가운데 브론테 자매하고 맞지 않다는 분은 처음입니다. ^^;;
저도 진 리스가 샬럿보다 훨 좋더군요.

잠자냥 2020-08-26 09:47   좋아요 1 | URL
제가 <제인 에어> 이런 류를 안 좋아해서요;; ㅠㅠ
이 책도 <제인 에어> 좋아하는 분들은 좋아하실 거예요..... 그러나 제가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물을(물론 이 책은 로맨스가 주가 아니지만 일단 로맨스가 나오기는 합니다. 주인공 루시는 그 관찰자이고요) 참 안 좋아해서리 (그 밀당이 저는 너무 지루하고 싫더라고요;;) 꾸역꾸역 읽고는 있습니다만 힘들군요;;; 하하하;; 샬럿보다는 동생인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을 좀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다락방 님도 <제인 에어> 안 좋아하신다고 했어요. 근데 제가 이 책을 떡하니 선물했으니 ㅋㅋㅋㅋ 이거 참... ㅋㅋ 이 책은 어떻게 읽으실지;;

다락방 2020-08-26 10:38   좋아요 0 | URL
저 제인에어에 대해선 별 생각 없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안좋아하는 건 제인 오스틴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인 오스틴의 [엠마]같은건 딥빡오는 작품이라서 ㅋㅋㅋㅋㅋ

제가 빌레뜨를 읽게 된다면 감상 남기겠습니다. 후훗.

잠자냥 2020-08-26 10:59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아 제가 헷갈렸네요, 그 제인이랑 그 제인이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0-08-2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제인에어보다는 폭풍의언덕 쪽이 더 취향입니다!

잠자냥 2020-08-26 10:33   좋아요 0 | URL
그 황량한 벌판과 우울한 분위기! ㅎㅎㅎㅎ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다시 읽으면 어떨까 싶기도 해요.
 
[전자책] 붉은 망아지 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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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성장하는 소년 조디의 이야기 <붉은 망아지>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한 남자를 그린 <불만의 겨울> 두 편 수록. <불만의 겨울> 읽는 내내 화자인 이선에게 삐딱한 감정이 드는데, 그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를 그가 가장 우습게 봤던 딸이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게 통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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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2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색다른 스타인벡이다, 하면서 재미나게 읽었습니닷! ^^

잠자냥 2020-08-24 10:50   좋아요 0 | URL
폴스타프 님 서재 글 보고 읽어 볼 생각을 더 했습죠. ㅎㅎ 전 <붉은 망아지>가 조금 더 좋더라고요.
 
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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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탐정)소설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 감탄했다. 그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왜 범죄를 저지르고, 또 그것을 어떻게 궤변으로 정당화 하는지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놀라운 작품. 늙은 수사관 베르라하 캐릭터도 무척 인상 깊다. 뒤렌마트는 읽을수록 더 읽고 싶어지는 천재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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