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콥 폰 군텐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 작품 속의 야콥은 발전을 거부한, 오히려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바란 반(反) 영웅적 인물로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 한 작품만으로도 발저의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다 읽은 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그 작품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발저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과 단편을 모은 <산책> 또는 <산책자들>, <세상의 끝>이 번역되었고, 드디어 그의 장편 <타너가의 남매들>이 선을 보였다. 장편이라니! 발저의 작품에 목이 말랐던 나 같은 독자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몇 장 읽지도 않았지만, 아, 역시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 틀림없구나, 무릎을 친다. 감탄을 한다. <야콥 폰 군텐 이야기>의 야콥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타너가의 남매들>의 주인공 ‘지몬’이 되었을 것이다. 확신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타너가의 남매들>이 오히려 발저의 첫 작품에 속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타너가의 남매들>이 쓰인 뒤 몇 년 뒤에 발표한 작품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 20대 때, 그것도 6주 만에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로베르트 발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생각을 담은 작품을 그 나이에 쓸 수 있었을까.



“저는 지몬이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받았는데, 방금 막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썼습니다.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요. 뭘 배울 맘은 없었죠. 일을 함으로써 낮의 성스러움을 모독할 만큼 무모하기엔 낮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거든요. 나날의 노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마는지 아실 테지요, 학문을 터득하느라 태양과 저녁달 없이 지내는 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풍경을 감상하는 덴 몇 시간이 필요했어요.” (<타너가의 남매들>, 233쪽)


지몬은 자기소개대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도 때때로 일한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노동만을 할 뿐이고, 그 일의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일을 통한 성장이나 진보 발전 따위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의 젊은 원기를 숨 막히고 융통성 없이 무딘 사무실에서 묵히는 게 싫어 언제나 금세 떠난다. 쫓겨난 적은 결코 없다. 늘 어느 순간이 되면 제 발로 걸어 나온다. 그런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들- 그러니까 ‘근면, 충실, 시간 엄수, 눈치, 냉정, 겸손, 절제와 목표 의식’ 등등 오만가지에 그는 치를 떤다. 절반의 자유를 갖는 게 싫기에 아무것도 안 가진 쪽을 택하겠다는 지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제 영혼은 제 것이거든요.” (15~16쪽)

“저는 출세하고픈 욕망도 전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인 게 저한테는 최소한입니다. 저는 출세라는 걸 맹세코 대단하게 여길 수가 없거든요. 이런 거에 뭐 굉장할 게 있나요. 너무 쬐그만 책상 앞에 서 있느라 일찌감치 굽은 등, 쭈글쭈글 주름 많은 손, 창백한 얼굴, 망가진 평일 바지. 후들거리는 다리, 뚱뚱한 배, 상한 위장, 탈모로 맨숭맨숭한 머리, 핏기 없고 열정 없는 눈, 의무에 충실한 바보였다는 의식에. 사양합니다! 저는 차라리 가난하지만 건강한 채로 있겠어요. 저는 물론 딱 한 사람한테서만 존중받고 있기는 합니다. 즉 저 자신한테서요. 하지만 그 사람한테서 존중받는 게 저로선 가장 중요한 그런 한 사람이죠. 누가 ‘평생직장’이라는 낱말이나 이 낱말에 내포된 터무니없는 요구를 갖고 저를 대하면 저는 광분해요. 저는 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위험한 것, 신비스러운 것, 어슴푸레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322쪽)


간간이 일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회적 출세나 신분 상승, 일함으로써 돈을 벌고, 부를 쌓는 등의 경제적 성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지몬.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연을 벗 삼는 일이다. 황홀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감이 자연스레 휴식하며 생각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산책. 일하면서 휴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에게 지몬은 말한다. 개한테 던져 주듯 그렇게 주어지는 자유는 증오한다고.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과 겨룰 생각이라고.

회사에서 주겠다는 증서, 말하자면 경력증명서 같은 것조차도 거부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증서를 물어본다면 자기 자신을 보면 안다고만 말할 것이라고. 그게 오히려 분별 있고 제대로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증서를 거부하는 이유 또한 어딘가에 묶여서 일하는 것과 그 틈틈이 주어지는 휴가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증서란 자신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기억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늘어지고 맥없는 상태를, 부질없이 허송세월한 시절을, 화가 나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오후들을, 아름답지만 쓸데없던 절절한 동경의 저녁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읽노라면 지몬은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야콥이며, 그 야콥과 지몬은 모두 로베르트 발저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된다. <타너가의 남매들>의 다른 인물, 즉 지몬의 형인 카스파, 누나 헤드비히는 실제로 발저의 형과 누나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즉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의 남매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발저라는 인물과 그 일가에 깊은 관심이 생긴다. 그들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이렇게 여느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까? 마주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하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이 작품 속 지몬의 독백과도 같은 이야기들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지몬과 클라라, 지몬과 헤드비히, 지몬과 클라우스 등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지몬과 다른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대화는 독백과 마찬가지이고, 그 독백을 듣는 사람은 독자이다.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몬의 일자리가 바뀌어 있고, 사는 곳이 바뀌었고, 때로는 연인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몬의 이 수다스럽지만 내밀한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성장이나 발전, 진보 같은 개념들이 언제나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그게 선(善)일까?



“아침 8시에 일하러 갈 때면 마찬가지로 아침 8시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는 한 가족이나 되는 듯 느낍니다. 이 무슨 거대한 병영인지요. 이 현대의 삶이란! 그러면서 바로 이 획일성이야말로 얼마나 그럴듯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뭔가를 마주쳤으면 하고 끊임없이 갈망하지요. 그토록 가진 것 없고 그토록 빈곤하기 짝 없는 신세, 스스로가 그토록 가망 없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교육받고 갖추었고 철저하고, 그렇게 다 가진 마당에 말이죠.” (22쪽)

“어떤 사람이 책상 일을 하는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기도 해. 그렇게 되면 그는 50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다’는 걸로 무슨 득을 본 걸까? 그는 50년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문을 드나들었고, 골 천 번 업무 편지들에서 같은 관용 표현을 썼고, 양복 몇 벌 바꿨고 자신이 구두를 한 해 동안 얼마나 조금 소비하는 가에 대해 한 번씩 놀라곤 했지. 우리는 그가 살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수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41~42쪽)


지몬의 통찰력 빛나는 이야기가 뼈저리게 와 닿는다. 위로 올라가기를 거부한 사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에 대한 저항, 일부러 작은 존재이길, 아무런 존재도 아니길 고집하고 그것을 온 몸으로 구현한, 발전 없는 존재 지몬, 그리고 야콥. 자신은 뭘 가져 본 적도 없으며, 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부모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뭐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기이한 인간 지몬. 그의 모습에서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당당한, 인간으로서 더없이 숭고한 모습을 본다. 현대 사회에서 지몬처럼 살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외치는 반 성장, 반 영웅적 이야기는 더 가슴을 울린다.



“남들은 저를 한량이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아마 머물러 있을 거예요. 머물러 있다는 건 너무도 달콤합니다. 가령 자연이 외국으로 가는 거 봤나요? 다른 데 가서 더 녹색인 잎을 틔운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제 모습을 뽐내자고 나무들이 이주하던가요? 강과 구름은 가지요. 하지만 그건 다르죠. 오묘한 떠나감이에요. 결코 돌아오지 않거든요. 간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게 아니라 날면서 흐르면서 쉴 뿐이죠. 다른 사람들은 여행하고 더 똑똑해져서 돌아오라지요. 저는 어느 날 여기 이 땅에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도 남는답니다.” (320~321쪽)


로베르트 발저는 지몬의 저 바람대로,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자연의 품에 안겨 심장마비로 죽었다. 왠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을 것 같다. 야콥-지몬-그리고 발저. 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인 존재. 로베르트 발저가 창조한, 도무지 발전할 줄 모르는 야콥과 지몬은 문학작품이 만들어낸 가장 문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나는 야콥이나 지몬처럼 살 자신은 없다. 도무지 없다. 그럼에도 지몬의 외침은 가슴을 울린다.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한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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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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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항상 나아가야 하지? 왜 발전해야 하지? 그저 이 자연과 머무르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발저.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야콥 폰 군텐이 어른이 되었다면 바로 이 책의 ‘지몬’처럼 자랐으리라. 성장과 진보, 발전에 대한 발저의 끊임없는 의문은 언제 읽어도 크게 전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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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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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하다. 내게 이 책은 공동 선을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삶을 묵묵히, 성실히 살다간 한 인간의 위대한 기록으로 읽을 때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한 인간이 그렇게 살다 가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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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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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국내에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은 무수히 많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도 이러저러한 출판사마다 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피츠제럴드에 무심했다. 첫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이 작품에 대한 명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좀처럼 동의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개츠비라는 인물에도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로맨스 소설 정도로 평가했다. 다시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츠제럴드를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솔깃해졌다.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였던 이유는 번역이 이상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버렸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번역이 이상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김영하 번역본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피츠제럴드 작품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김영하는 고딩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 작품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딩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졸라 재미없다’ 등등 그때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변호를 맡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까지 나온 대부분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에서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가 서로 존대를 하는 등 한국말의 위계질서 때문에 그 젊은이들의 심정에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무척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실제로 내가 읽은 문학동네 세계문학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는 서로 반말을 한다. 20대의 그들답다. 닉, 개츠비,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인 톰 등 각 캐릭터의 개성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과 개츠비, 데이지 인물들을 저마다 이해하기도 훨씬 쉬웠다. 예전에는 이 인물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는데 이번에 읽은 김영하 번역본으로는 아, 이럴 때 그 또는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진다. 외면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을 살려준 옮긴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점에서 개츠비를 욕했던 그런 고딩 중 하나였을 내가 다시 피츠제럴드를 읽고 싶어졌으니 김영하의 ‘변호’는 조금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위대한 개츠비>는 무척 낭만적이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 슬픔과 쓸쓸함은 이 작품이 한때 전부였으나 어느덧 잃어버린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 자신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이미 조각나 버린 꿈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 보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온다.
 
개츠비가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 세계, ‘데이지’로 상징되는 그 세계는 정말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던 것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이런 바보 같은 녀석, ‘바보 같은 개츠비’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 보라고, 자네가 그렇게 평생을 건 그 여자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도무지 아닌 사람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런 존재다. 선망하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뜨겁게 사랑한 첫사랑이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놓아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으리라. 그렇기에 성공하면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이지만 데이지에게 개츠비는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의 존재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 관계는 비극적이다. 평생 데이지만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데이지 또한 그러리라 믿고 싶었겠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도 사랑했고, 그렇다고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는 평생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을 간직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를 그토록 오랜 세월 간직하고 지켜 나가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 세계 때문에 허상 같은 삶을 살다간 그이기에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자신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장례식에 오지도 않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간 아주 바보 같은 놈.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는 안쓰럽고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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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3-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잘 지내시죠. 여전히 리뷰 꾸준히 올리시고, 저는 또 감사히 잘 보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 열린책들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다 읽고나서 잠자냥님께서 처음에 그러셨던 것 처럼 대체 왜??? 란 생각하며 미묘하게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 감상적이다. 너무 낭만적이다.(부정적 의미) 란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나요.
나랑은 맞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긴 했어요.
잠자냥님 리뷰 보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네요.

잠자냥 2018-03-20 13:25   좋아요 1 | URL
잘 지내시죠? ㅎㅎ 저도 요즘 회사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책을 많이 읽지도 리뷰를 잘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잘 읽고 계시다는 댓글을 읽으면 힘이 나네요. ㅎㅎ 어릴 때 읽었던 것보다는 좋았지만.... 그래도 피츠제럴드는 다른 작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ㅎㅎ 그리고 사실 개츠비도 어떻게 보면 좀 스토커 같기도 ㅋㅋㅋㅋㅋ

케이 2018-03-20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다시 생각해보니 열린책들 아니고 민음사 번역본 이예요. 별 거 아닌데 정정하러 왔어요. ㅋ 그리고 저 요즘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면 뒤에서 (이제서야) 읽는 중인데 너무 재밌어요.!!

잠자냥 2018-03-20 17:21   좋아요 0 | URL
ㅎㅎ 민음사면 김욱동 교수 번역본이 것 같군요- 전 다음에 다시 한 번 읽어본다면 김석희 번역본으로 한 번 더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 안 읽을 것 같고요. ㅎㅎ <가면 뒤에서> 정말 재밌죠?!!!! 손에 땀이 나는 흥미진진!!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 일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이 책은 여전히 내 책꽂이에서 때때로 그 푸른빛을 조용히 내뿜는다. 그즈음 이 책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은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소개 글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것은 내가 예상했던 종교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기 어려운,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신을 열렬히 믿는 이들에게 엔도 슈사쿠는 이단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깊은 강> 한 작품만으로 나는 그에게 반해서 그 뒤로 이런저런 작품을 찾아 읽어보았다. 국내에 소개된 책들이 더 많으면 좋겠는데 그리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침묵>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만큼 <깊은 강>에 견줄만한 감동을 줄 듯 싶다. <침묵>을 읽기에 앞서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을 읽었다. 나지막이 읊는 고해성사처럼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마음을 울린다. 첫 번째 작품인 「그림자」를 읽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져왔다. 눈물이 살짝 맺힌다. <깊은 강>을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어찌 보면 ‘수필’ 같기도 하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나’는 엔도 슈사쿠 그 자신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 ‘나’의 이야기들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가톨릭이라는, 일본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낯선 종교를 갖게 되는 계기와 그로 인한 갈등. 그 갈등을 극복하면서 종교를, 신을 자기만의 관점을 갖추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밀히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그림자」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 처음으로 가톨릭 종교에 들어서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자」의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한 신부를 알게 된다. 그 신부는 어머니가 무척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전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어머니와 신부의 관계가 그려지는데, 어머니의 맹목적인 그를 향한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을 뛰어넘어 이성적 호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나’ 또한 왠지 모르게 그 신부에게 반발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나’의 교육마저도 신부에게 맡긴다. 강인함과 단정함, 절제를 두루 갖춘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 같다. 병약한 ‘나’는 그가 바라는 일 가운데 포기하는 것이 많다. 신부는 그런 ‘나’를 정신이 나약한 사람 취급하면서 때로는 경멸의 눈빛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는 ‘나’에게서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가 종교를 믿는 것도, 그 신부와 연락하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 때문에 ‘나’는 죽은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그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신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성인이 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신부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나’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가 신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었다. 신부가 그를 믿고 따르던 한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결국 신학교를 떠나고 말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올곧던 신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더욱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어머니와도 어쩌면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의심까지 하게 된다.


또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어느 백화점 옥상에서 그를 우연히 목격한다. 예전의 단아하고 강직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평범하게 늙은 초라한 모습이다. 그때, 한 여자가 아이의 손을 끌고 그에게 다가가고, 그들은 맞은편 출입구로 사라진다. 평범하고 초라해진 그. 그는 정말 신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그림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나’가 우연히 어느 음식점에서 신부를 만난 장면이다. 그 신부임이 틀림없는 한 남자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를 몰래 지켜보다가 어떤 광경을 맞닥뜨린다. 음식이 나오자 그가 재빨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이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차오르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던 나 또한 그랬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투철한 신부였지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녀와 결혼하고, 그럼으로써 신의 가르침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성직자.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정말로 신에게 버림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신을 저버린 것일까? 그 모든 의문은 그가 음식을 앞에 두고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에서 자연스레 풀린다. 그는 신을 버린 적도 없으며, 신 또한 그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면, 이 세상에 신이, 종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림자」에서는 결혼과 함께 교회를 떠나게 된 가톨릭 신부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과 외로움이 그려지면서 그런 그를 지켜보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와 나와의 관계, 그와 신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런 고민의 과정을 지나왔기에 엔도 슈사쿠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 문제를 일생의 화두로 삼게 되는 작가가 된 것은 아닐지.


나로 하여금 당신 테이블로 다가서지 못하게 가로막은 힘,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내 삶을 형성해 온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소설가가 되고 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세 차례나 썼는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형시켜 썼습니다. 당신은 그 사건 이후 오랫동안 내 작품 속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소재로 한 소설은 거의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아직 당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소재로 한 작품이 계속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존재를 내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림자」, 11~12쪽)


엔도 슈사쿠가 생각하는 신은 <깊은 강>의 인물 ‘오쓰’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가톨릭 신자였던 ‘오쓰’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는다. 신이라는 단어조차 듣기 싫다는 말에, 신을 양파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깊은 강>, 61쪽) 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 받지만 이 세계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을까. 「그림자」의 그 신부의 모습에서 ‘오쓰’의 모습이 겹친다.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깊은 강>, 177쪽)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깊은 강>, 94쪽)


「그림자」의 신부는 원칙에 철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던 성직자로서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더 인간적이며 종교적으로 다가온다. 음식점에서 홀로 남몰래 기도를 올리던 그. 그러한 모습이 더욱 신을 받드는 듯하다. 아마도 이렇게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거대한 생명’이자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로서의 신, 그리고 그런 태도로 종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더욱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이런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주기에 언제나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이제 <침묵>을 읽음으로써 그 깊은 감동에 더욱 빠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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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5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엔도 슈사쿠의 책은 <침묵>과 <바다와 독약>
인데, 아무래도 대표작인 <침묵>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네요.

일본 작가로는 특이하게 가톨릭 신앙인이어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종교인으로서의 그런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잠자냥 2018-03-15 15:02   좋아요 1 | URL
저는 <침묵>말고 <바다와 독약>은 읽었는데 아무래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이 더 와닿기는 하더군요. ㅎㅎ 조만간 <침묵>을 읽어야겠습니다.

2018-03-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